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 Jan 24. 2024

고양이 - 우리와 같은 그들의 생존에 건투를 빕니다.

 고양이는 귀엽다. 집고양이와 길고양이 모두 귀엽다. 검은 고양이, 노란 고양이, 얼룩고양이까지 색이나 무늬와 무관하게 귀엽다. 윤기가 흐르는 털과 걸을 때 씰룩이는 엉덩이, 살짝 치켜 올라간 눈과 미간과 코를 잇는 선, 분홍빛이 감도는 코와 제 멋대로 뻗친 수염들, 앉을 때 다소곳하고 가지런히 모아놓은 다리까지 귀엽다. 마치 귀여움이 그들의 생존전략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레 그들의 귀여움은 인간의 호감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넘쳐흐른다.


 집으로 갈 때 지나는 칼국수 집 옆 좁은 골목에는 이따금씩 길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곤 한다. 한 마리도 아니다. 노란 고양이 두 마리와(어쩌면 비슷하게 생긴 세 마리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회색과 흰색이 얼기설기 섞인 줄무늬고양이 한 마리, 이 세 마리의 고양이는 서로 순번이라도 정한 것처럼 동시에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각기 며칠에 한 번쯤 골목에서 만날 수 있다. ‘요 며칠 안 보이네’하고 생각하면 ‘아직 잘 살고 있다’고 답하는 것처럼, 딱 그만큼의 빈도로.


 고양이들은 그 골목에서 날아다니는 작은 새를 눈으로 좇고, 건물 주위의 연석(沿石)에 걸터앉아 해를 쬐고, 쌓인 낙엽을 발로 들쑤시거나 도도하게 담벼락 위를 걷는다. 사람이 지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골목의 풍경을 구성하는 일종의 배경요소나 장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잘 만든 영화는 인물의 배경에도 다양한 장치들을 정교하게 계산해서 넣는다고 하던데, 저렇게 자연스러운 고양이들은 감히 의도해서 배치하고 연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홍대나 성수 등의 번화가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을까 하며 사람에게 다가오는 개냥이들과는 다르다. 반경 몇 미터라는 기준이라도 가진 듯,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어느 정도 거리 안으로 들어가려 치면 고양이들은 무엇을 하던 중이더라도 화들짝 놀라며 어둡고 으슥한 곳으로 몸을 옮긴다. 철제 대문 아래의 틈새나 주차된 오토바이 뒤에 숨어 시선을 내게서 떼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한 걸음 더 다가가서 미안해’라는 마음까지 들곤 한다.


 몇 해 전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며 동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우리 동네 길고양이들이 그렇게 사람을 경계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동네 사람들, 특히 할머니들에게 고양이는 ‘때려죽일 놈들’이었고, 고양이가 보이면 돌을 던지거나 지팡이를 휘두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에게까지 지팡이를 휘두르는 노인을 본 적도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오래된 주택가다. 3-40년쯤, 어쩌면 그 이상 된 붉은 벽돌의 낡은 주택들이 즐비하고, 바로 옆 구역에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달리 한 동네에서 오래 산 고령의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사람의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고, 아무 때나 집 앞에 쓰레기봉지를 내어놓는 사람이 많은 동네는 주 3회씩 쓰레기 수거차량이 지나가도 늘 몇 개의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다. 분리수거라고 제대로 될 리 없다. 종량제 봉투에, 때로는 그냥 검정 ‘봉다리’에 온갖 것들이 담겨서 길가에 널려있고, 고양이들에게는 쓰레기봉지만 잘 터트려도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우리 동네다.


 먹을 것을 찾아서 고양이가 헤집어놓은 봉지가 성할 리 없음은 당연지사. 그러니 늘 길가에는 오물이 흩어져있고, 주택이 곧 음식점이고 세탁소고 이발소인 동네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가 길가를 어지럽히고 벌레를 들끓게 해, 내 영업과 삶을 방해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렇게 주민들은 쓰레기를 제대로 분리수거해서 내어 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고양이가 보이면 ‘죽이네 살리네’ 소리를 치게 된 것이다.


 고양이들 입장에서는 어떻겠는가. 보기만 해도 때려잡을 듯 달려드는 인간들이 도처에 있으니, 두 발로 걷는 것들은 일단 피하고 경계하고 보게 되지 않을까.




 가방에 스틱으로 된 고양이 간식을 넣고 다니다가 이따금씩 길고양이에게 꺼내어 줄 땐 있지만, 개인적으로 밥을 꾸준히 챙겨주면서까지 길고양이가 사람 손을 타는 것이 생태계에 이로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양이의 개체수가 늘어났을 때 도시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얼핏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력해서 고양이를 배척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응원의 마음이 더 크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그네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고, 같은 물리적 공간에서 다른 두 종이 공존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사람을 경계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내 주변에 있는 또래 몇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각자의 자리를 잡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 상처가 아물어도 크게 흉이 남아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들. 데이고 다치고 아파서, 또는 데이고 다치고 아플까 두려워 사람을 경계하게 되는 이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경계하다 못해 ‘목적 없는 호의는 없다’는 생각까지 단단히 박혀서 선의로 내미는 손에도 거칠게 발톱을 세워 할퀴고 도망치는 모습들도 선명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취업준비와 인턴생활, 취업과 창업까지 이른 게 딱 내 또래다. 서른, 그리고 그 언저리의 청년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대부분은 따스했을 가족의 품과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나이만 같으면 친구가 되던 어린 시절의 우정은 잊히고 무뎌진다. 현실은 피부로 와닿고, 내 생존까지 위협하며 살갗에 닿는 감각들은 떠올려야 비로소 따뜻한 그리움보다 매섭다.


 누군가 다가오면 고양이처럼 숨어버릴 수도 없다. 힘들어도 학교로, 직장으로 매일 아침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만 한다.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는 차마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나약해서 그래’라던가 ‘우리도 다 겪은 일이야’라며 나의 어려움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이들의 말에는 상처를 입는다. 숨고 싶어도, 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고양이는 젖먹이 시절 부모의 품을 기억이나 할까. 이따금씩 떠올릴 따뜻한 기억이나 있을까. 어쩌면 고양이, 그것도 야생 길고양이의 삶은 되새길 추억도 없는 당장 오늘의 투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집 앞 골목의 고양이들이 내 걸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도 속상한 마음보다는 안쓰러운 마음과 그들의 치열한 생존에 보내는 약간의 응원이 더 크게 남는다. 저마다 삶의 터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와 같이, 길고양이들도 하루하루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야생’에서 살아내고 있다.

  

 그래도 고양이에게는 밥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웃음도 나오는 최고의 필살기가 있다. 누가 철 지난 유행처럼 “우리 집에 고양이 보러 갈래?”하고 유혹하면, 혹시 나를 납치해서 장기매매로 넘기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어도 기꺼이 감수하고 쫄래쫄래 쫓아갈 만큼의 매력이 그들에게 있다. 길을 걷다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시선을 잠시 고정할 만큼, 어디로 떠나버리기 전에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닦고 서둘러 사진을 찍을 만큼 말이다.


 귀여움이라는 장점을 가진 고양이들의 삶을, 귀엽지도 않은 서른 살의 내가 응원한다. 누군가의 호의에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는 나와 내 또래에게 보내는 응원만큼, 매일 치열한 아침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건투를 보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