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질문에 찰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의 대답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정도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을 수도 있고, 확신을 가질 정도로 무수한 경험을 쌓아왔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떠한 질문에 고민 없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답변에 대해서만큼은 (옳고 그름의 판단과 관계없이)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
‘창조주의 존재를 믿느냐’던가 ‘빈부격차의 해소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들에 대해서 결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성찰과 사유보다 ‘아 몰라’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에 가까우니,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면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울 거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찰나의 고민 없이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누군가 ‘최애’ 음식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단호하게 답할 수 있다. “제 최애 음식은 돈가스입니다. 그것도 경양식 돈가스요.”
다른 여러 음식들이 그렇듯, 돈가스의 종류도 예전보다는 많이 다양해졌다. 나이프로 썰어 들어 올리면 흰 치즈가 쭉 늘어나는 치즈돈가스도 있고, 고기와 튀김옷 사이에 달달한 으깬 고구마를 넣은 고구마돈가스도 있다. 학창 시절 학교 앞 허름한 분식집에서 대충 튀겨 자극적인 소스에 푹 담갔다 꺼내주던 피카추돈가스도 어쨌든 돈가스의 일종이다(이름도 돈가스니까). 요즘은 냉동식품도 어찌나 잘 나오던지 대형마트에 가면 밥반찬으로 먹기 좋게 작은 크기로 만들어진 미니돈가스도 많다. 두꺼운 고기를 선홍빛 심이 남을 정도로 육즙 갇히게 튀겨 소금이나 소스에 찍어먹는 일식 돈가스가 유행이라 3대 돈가스, 5대 돈가스 하는 식으로 유명한 맛 집이 여럿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망치로 두드린 고기에 빵가루를 고루 입혀 얇게 튀기고 그 위에 양송이버섯과 피망 등이 흐물거릴 정도로 끓여진 달달한 소스를 끼얹어서 나오는 경양식 돈가스다. 메인메뉴가 나오기 전에 전채(前菜)로 나오는 수프(주로 양송이나 크림)는 후추를 살짝 뿌려 먹으면 금세 입맛을 돋우고, 돈가스 옆에 보기 좋게 놓이는 스위트 콘과 완두콩, 토마토케첩과 마요네즈를 뿌린 양배추 샐러드는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물리지 않게 받쳐준다. 상큼한 피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나이프로 썰어 먹을 정도로 두툼한 노란 단무지와 배추김치도 빼놓을 수 없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던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생일이나 어린이날 정도의 기념할 일이 생기면 우리 가족은 광주 방림동에 있던 ‘융프라우’라는 레스토랑에 가곤 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에서 이름을 따온 융프라우는 나지막한 비탈길에 멋들어지게 지은 목조 건물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시간대면 곳곳에 놓인 동그란 전등이 운치를 더했고, 식당 안에 들어서면 영화에서나 보던 샹들리에와 테이블마다 동그랗게 각을 잡아 놓은 냅킨이 동화 속 어느 나라의 연회장을 상상하게 했다.
부모님은 본인들의 어린 시절 가난을 심심찮게 이야기하면서도 당신의 자식들이 ‘귀티’ 나길 바라는 분들이셨는데, 융프라우에 가는 날이면 밖에서 뛰어놀다 지저분해진 얼굴을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혔다. 식당에 도착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조금이라도 방정맞은 태도를 보이려 하면 ‘이런 데에서는 그러는 거 아니야’하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씁’ 하는 소리를 내며 매섭게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이런 데’가 어떤 덴 지는 잘 몰라도 일상과는 다른 특별한 공간이구나 하며 머리에 새기던 기억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근사한 턱시도를 입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 무거운 나무의자를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당기면, 엄마는 두툼한 천 재질의 냅킨을 반으로 접어 내 무릎에 올려주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고블렛 유리잔에는 종업원이 주전자를 가슴께까지 올리며 멋들어지게 물을 채웠다. 로브스터나 달팽이까지 취급하는 제법 고급스러운 그 식당에서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려 하면, 나는 항상 단호하게 (메뉴판에는 포크커틀릿이라 적힌) 돈가스를 외쳤다.
주문을 마치면 종업원은 늘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하고 물었다. 늘 ‘둘 다 주면 안 되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고, 그렇게 주문을 마치면 따뜻한 수프가 테이블에 놓였다. 테이블 한편에 놓여있던 후추를, 행여 과하게 들어갈까 조심스럽게 톡톡 수프에 뿌릴 때면, 아버지는 “아빠 어릴 때 니들 큰고모가 처음으로 돈가스 집에 데려갔는데, 수프만 갖다 주는 걸 보고 이걸로 어떻게 배를 채우라는 건가 했다.”는 말을 정해진 레퍼토리처럼 하셨다. 모르면 촌놈 보듯 무시당하니까 뭐든 다 경험해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앞의 수프는 바닥을 드러냈다. 수프 한 그릇이 들어가면 시동이라도 걸린 듯 비로소 허기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고, 나는 그제야 숟가락을 접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접시를 박박 긁었다.
숟가락을 핥으며 기다리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배추김치와 단무지가 테이블 가운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가스 접시가 내 앞에 놓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게 서툴던 어린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는 나의, 엄마는 동생의 돈가스를 꾹꾹 눌러가며 잘게 잘라주었고, 한 입 크기로 잘린 돈가스를 하나씩 찍어서 입에 넣으면 그보다 행복할 수 없었다. 접시에 넓게 펴진 흰 밥에 돈가스 소스를 묻혀서 먹고,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완두콩까지 싹싹 긁어가며 접시를 비우면,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먹는 (물론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들이었지만) 로브스터나 스테이크도 부럽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 나오던 초콜릿 시럽이 뿌려진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해치운 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식당에서 나오면, 길을 지나는 그 어떤 사람도 나보다 행복할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가 경양식 돈가스가 유행하던 마지노선이었다. 불과 한두 해 지나지 않아 전화 한 통에 돈가스를 배달하는 체인점이 중국집이나 치킨집만큼 많이 생겼고, 동네 분식집에서도 돈가스와 쫄면을 같이 내놓기 시작했다. 그나마 처음에는 넓적한 원형 접시에 구색을 갖추던 배달 돈가스는 그리 오래지 않아 플라스틱 용기에 썰어 담긴 채 왔다.
스무 살에 대학을 가며 또래 친구들과 돈가스에 대한 추억을 나누면, 경남이나 강원 등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은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며 공감했지만 서울내기들은 삼촌들이나 그렇게 먹었지 않았냐며 킬킬대고 신기해했다. 그들은 내가 경양식 돈가스를 먹을 때, 베니건스나 TGIF 같은 패밀리레스토랑을 찾았다. 같은 나이의 비슷한 또래라도 자라온 장소나 환경에 따라 쌓아 온 추억은 달랐다.
요즘은 제대로 된 경양식 돈가스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서울 근교에서 유명하다는 돈가스 집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막상 가보면 돈가스가 메인 메뉴인 기사식당이거나 방송에 여러 차례 등장해 관광지처럼 되어버린 남산의 돈가스집들 정도였다. 내가 추억하는 고풍스러운 경양식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테리어나 분위기까지 그대로 간직한 곳은 동인천의 유명한 몇 곳과 춘천의 ‘함지 레스토랑’, 수원의 ‘로마 경양식’ 정도일까. 그나마도 추억의 맛과는 사뭇 다르다.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 묻던 그때의 감각이 그리워, 아주 가끔 집에서 넓적한 돈가스를 튀기곤 한다. 오뚜기 크림수프를 끓여 그릇에 담고, 옥수수 통조림을 까서 접시에 한 숟가락 올릴 때면 한 자릿수 나이일 때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서른 살 내 모습에 아련하기도, 우습기도 한 묘한 감정을 느낀다. 어느덧 조금씩은 추억을 뜯어먹고 사는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하지만, 혼자 사는 낡은 전셋집 주방에 튀는 기름이 싫어서 감히 자주 돈가스를 튀겨내지 못하고 ‘서울 근교 경양식 돈가스’를 검색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건실한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경양식 돈가스가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