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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Mar 13. 2024

왼손잡이 - 조금 다르긴 한데, 뭐 어떻습니까.

 왼손잡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내 부모님은 왼손잡이라는 것을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던지, 나는 언제나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씨를 썼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왼손잡이가 사람들에게 다름 또는 틀림으로 여겨진다는 느낌은 늘 받았다. 명절이 되어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어른들은 꼭 내게 한 마디씩 했다. “얘는 아직도 왼손을 쓰니?” 하는 고모의 말에 밥을 먹다 괜스레 서러워졌던 것도 생각난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식구들 중 유일한 왼손잡이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장손, 내 사촌 형도 밥을 먹을 때 왼손을 썼다. 어른들은 그를 통해 이미 왼손잡이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가진 터였기에, 내가 어떤 손을 주로 사용하느냐에 보낼 관심은 별로 남지 않았다. 가장 큰 어른의 사랑을 받는 장손이 이미 왼손잡이었기에, 구태여 다른 손을 쓴다는 이유로 나를 질책하거나 교정하려 들기에는 모양새도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 덕에 여러 왼손잡이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갖고 있는, 오른손잡이가 되라는 강요는 거의 받지 않았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지나간 일들을 생생하게 떠올리지 못한다. 메모나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어떤 일이 있었는 지도 잊을 정도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욱 그렇다. 학년마다 그 해에 정말 가깝게 지내던 두셋을 제외하면 학창 시절 친구들의 이름이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그렇기에 내게 남은 기억의 상당수는 사람들이 2시간짜리 영화를 인상 깊었던 두어 장면으로 떠올리는 것처럼, 그 당시에 충격적으로 남았던 일들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들이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의 기억들도 비슷하다. 유난히 내게 못되게 굴었던 담임교사, 다른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나도 잘못했다며 복도에서 손을 들고 있었던 일, 같은 학년에 있던 쌍둥이가 헷갈려 혼란스러웠던 경험처럼 단편적인 기억들의 총량은 시간으로 나누어 합쳐도 24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는 받아쓰기에 관한 것이다. 아마 요즘도 그렇겠지만,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이들에게 학습 면에서 가장 우선시되던 건 한글을 떼는 것과 구구단을 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교사가 불러주는 단어 또는 문장을 공책에 쓰고,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받아 집에 가서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어린 나는 뛰어노는 것보다 책 읽기를 더 좋아했는데, 그 덕에 또래에 비해 한글을 빨리 익혔다. 당연히 받아쓰기 공책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받는 일도 많았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던 몇 안 되는 자부심거리였다.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그날에도 나는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내는 담임선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뾰족하게 깎인 연필로 열심히 단어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번쩍’ 하는 느낌과 함께 손등에 화끈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담임선생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오른손에는 내 왼손을 후려친 30센티 자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교실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왼손으로 글씨 쓰래!”


 너무 놀란 나머지 왈칵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내게 뭘 잘했다고 우냐며 타박하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씻고 오라며 교실에서 내보냈다.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을 가는데 오른손에 맺힌 피가 보였다. 왼손을 맞으며 손에 쥔 연필로 오른손바닥을 찔렀는데, 놀란 나머지 다치고 아픈 것도 몰랐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혼이 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고, 왼손으로 쓰는 게 나쁜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내 오른손 손바닥엔 그때 찔린 연필 탓에 생긴 회색 점이 남아있다.




 왼손잡이를 터부시 하는 전통(?)은 오래됐다. 얼마나 오래되었던지 오른손은 이름부터 ‘옳은’ 손이고, 왼손은 옳은 것의 반대, 옳지 못한 것이 되었다. 물론 이전 세대들에 비해 왼손잡이에 대한 차별은 확실히 줄었다. 왼손을 식탁에 묶어놓고,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도록 강제 교정 당했다는 삼촌뻘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90년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최근까지도 어느 공공기관에 남아있던 ‘오른손 사용자만 채용 가능’이라는 조건도 사라졌다. 그러나 다름에 따른 불편은 자연스러운 차별이 되기도 한다. 이는 일상에 여전히 남아있고,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 같다.


 밥을 먹을 때에 오른손잡이의 오른편에 앉으면, 서로의 팔꿈치가 부딪혀 식사에 방해가 됐다. 똑같은 가위도 왼손으로 사용하면 날 사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종이를 자르기 어려웠다. 체육시간에 공을 던지는 법을 배울 때에도 오른손이 기준이라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고, 공중전화에선 왼쪽에 놓인 수화기를 오른손으로 당겨 들고 왼손으로 숫자를 누르다가 전화선에 걸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글씨를 지저분하게 쓴다고 혼이 많이 났는데, 이는 왼손으로 글을 쓰면 손날이 연필이나 볼펜이 묻은 곳을 뭉개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불편을 호소하면 어른들과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왼손잡이의 불편은 일상에 만연했고, 지극히 평범한 곳에서 생겼다. 누군가에게는 의식조차 못한 당연함이었기에 오히려 오른손잡이들이 가늠하기 어려웠다. 왼손으로 꺼내든 카드를 오른쪽에 있는 지하철 개찰구에 찍으려 몸을 틀어 버벅거리다가 뒤에 줄 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릴 때의 기분은 얼마나 아찔한지.


 왼손잡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노래가 있다. 그룹 ‘패닉’의 1집 앨범에 실린 ‘왼손잡이’다. 대학시절, 아무 생각 없이 왼손으로 소주병을 들어, 오른손으로 밑동을 받치고 윗사람에게 술을 따른 적이 있다. 화장실을 가려고 나가는데 바로 위 선배가 나를 쫓아 나와 인상을 한껏 찡그린 채 훈계했다. 그는 내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며 싸가지와 인성을 운운했다.


 왼손잡이라 그게 자연스러웠다고, 오른손으로 해야 하는지 모르고 두 손을 쓰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고 기죽은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말라며 말을 잘랐다. 씩씩거리며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을 보며, 나는 노래 ‘왼손잡이’의 구절을 떠올렸다.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조그맣게 소리 내어 말했다. “욕하지 말라고 개새끼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전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학급이나 학교처럼 한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으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사람이 참 많다고 느낀 만큼, 나는 세상에 왼손잡이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단체로 밥을 먹는 자리에서 왼쪽 끝 자리로 가다가, 그 자리에 앉으려던 누군가와 부딪혀 "제가 왼손잡이라 이 끝에 앉아야 하거든요."라고 말할 때, 상대방이 "저도 왼손잡이예요."라고 답을 하면 묘한 동질감과 동료의식이 샘솟았다.


 같은 왼손잡이를 만났을 때 느끼는 동질감은, 오른손잡이를 만날 때 불편을 피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것에서 해방된다는 안도와, 살아오며 서로가 겪었을 불편에 대한 막연한 공감에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결국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들에 비해 소수다. 틀리다 여겨졌던 과거에 비해서는 존중받지만, 다수의 타인과 같은 일상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수와 소수의 차이는 불편을 느끼는 빈도와 정도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 왼손잡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수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생각이다. 그것이 생활의 편의이던, 시설의 이용이던, 타인의 시선이던, 다수의 집단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편이 있다면, 고치고 보완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조금 다르지만, 뭐 어떤가. 이 작은 지구별에 사는 우리끼리 서로 존중하고 나아가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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