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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06. 2016

그러면 좀 어때

열일곱, 소낙비가 내리던 날



회사 가기 싫다, 생각하고 잠든 날은 꼭 비가 내렸다. 마음껏 심통 한 번 부려보란 뜻인가 싶을 정도로 꽤나 잦은 일이었고, 지난주 금요일에도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1시간 일찍 나와서 기분 엄청 좋았는데 완전 폭우야, 폭우. 신발 다 젖었어."



갑작스러운 퇴근으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영화표를 예매했다. 상영시간이 2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몇 분 사이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택시는커녕, 버스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가방 한쪽은 이미 폭삭 젖어버린 상태였고, 보러 갈까, 그냥 집으로 갈까 수 없이 갈등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빈차 표시등을 켠 택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수역 사거리에 영화관 있죠. 그 앞에서 내려주세요."



목적지를 말한 뒤,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아 옷에 묻은 빗방울들을 털어냈다. 잠깐 사이에 많이도 젖었네. 축축한 느낌이 싫어 탈탈탈 털어내고 또 털어냈다. 물에 푹 담갔다 뺀 것 같은 샌들은 에어컨 바람이 잘 닿는 곳에 바짝 갖다 댔다. 10분이면 갈 거리인데, 비가 오면 이렇게 막힌단 말이야. 기사님은 지루하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조금씩 속도가 줄어들자 뿌연 창문 사이로 빗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이고, 저 학생들은 찝찝하지도 않은가 봐."



창밖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빗물이 사방에 튀도록 거리 위를 뛰노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까머리 남학생은 코 끝에 간신히 걸터 있는 뿔테 안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 옆에서 깔깔깔 웃고 있는 여학생도 두 볼에 딱 달라붙은 긴 머리카락은 잊어버린 채, 뛰었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둘은 우산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두 학생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자 오른쪽 가슴에 새겨진 학교 마크가 보였다. 반갑게도 그 여학생의 교복은 10년 전 졸업한 모교의 것이었다.



"우산 없으니까 조금만 기다렸다 가자. 같은 아파트 단지 사는 애들 꽤 있잖아."



저 여학생과 같은 교복을 매일 입고 다니던 시절, 지난 금요일처럼 비가 사정없이 내린 날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기예보를 잘 보지 않는 나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같은 시간에 교실을 빠져나온 옆 반 친구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손바닥을 펼쳐 빗방울의 양을 가늠하는 걸 보며 그녀도 우산이 없음을 알아챘다. 조금만 기다려보자는 내 말에 커다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웃음기를 띈 얼굴로 말했다.



"우리 그냥, 같이 뛰어갈까?"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나갈 무렵엔 하복 윗도리가 모두 젖어 온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제법 먼 길을 가야 했음에도 우리는 뭐가 그리도 좋았는지, 연신 꺄르륵 대며 그 길을 참방참방 뛰어갔다. 그땐 비를 있는 그대로 맞아보는 것도, 축축하게 젖은 옷으로 버스에 타는 것도 마냥 불편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에어컨 바람이 옷깃에 닿을 때마다 더위가 가시는 느낌도 싫지 않았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비가 오는 날이 그다지 반갑진 않았지만, 그것 만은 좋았다. 비를 쫄딱 맞은 후, 갈림길에 서서 인사를 하며 비 좀 맞으면 어때, 이렇게 시원한데, 맑은 얼굴로 이야기하던 그 친구가 떠오르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은 둘 중 하나인 게 좋겠구나. 함께 우산을 쓰거나, 함께 비를 맞거나.



"비 조심해요, 아가씨."



두 학생을 지나쳐 다시 속도를 올리던 택시는 영화 시간에 딱 맞춰 건물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우산을 펼치려는 찰나 기사님이 말했다. 어느새 비는 조심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고, 감미로운 빗소리보단 젖어버린 옷가지를 먼저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게 조금은 서글펐다. 만약 그  옆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처럼 소낙비가 내리는 거리에 주저 없이 뛰어들 수 있을까. 한 번으로 끝나버린 그 기억이 나는 몹시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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