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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17. 2016

누군가의 언니

내 딸 같아서 그래



내내 힘을 주고 있던 탓인지 한쪽 어깨가 욱신거렸다. 승객들은 잠을 청하기 위해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고, 승무원들은 이륙 준비를 하기 위해 선반 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일찌감치 좌석에 앉았음에도 나는 허리를 빳빳이 세운 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시선은 발 밑에 둔 캐리어를 떠날 줄 몰랐다. 앞좌석을 모두 확인한 한 승무원이 자리에 가까워지자 내내 조용하던 캐리어에서 미야 미야, 염려했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안돼. 딱 1시간만. 1시간만 참자. 착하지. 캐리어에 대고 속삭이자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도 같이 탔나 보네요."


"아, 이번에 서울로 데려가게 돼서요. 죄송해요. 곧 있으면 조용해질 거예요."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저희 집도 키웠었어요, 라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보, 고양이래 고양이. 그가 옆에 있는 아내에게 말하자, 그녀 역시 눈을 반짝이며 어떤 종인지 물어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아내는 이제 갓 200일을 넘긴 듯한 아기를 꼭 안고 있었다. 친구도 같은 종을 키운다며 반가워했지만, 아기 때문인지 오래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나는 곤히 잠든 아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곧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 비행기는 곧 이륙하겠습니다. 안전벨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바닥에 두었던 캐리어를 번쩍 들어올려 안았다. 잔뜩 겁에 질렸는지 내 품에 바짝 몸을 붙였다. 가는 동안 괜찮을지 걱정스러웠다. 그건 옆자리 부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잠에서 깬 아기는 엄마의 옷깃을 꽈악 움켜줜 채, 커다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낯선 느낌이 불편한 모양인지 부웅 공중에 뜨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둘은 어쩔 줄 몰라했다.



"가방에서 딸랑이 좀 꺼내봐."



나무로 만든 딸랑이를 열심히 흔들어 보아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그녀는 아기를 안은 채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자니 주말 내내 보았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를 재우느라 선잠을 자던, 좋아하는 커피도 멀리 했던 우리 언니와 꼭 닮아 있었다. 가장 바깥쪽에 앉아있던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건 좀 진정됐나. 혹시 배가 고픈 건 아닐까. 갖가지 보기들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왔다 갔다 해서 불편하시죠."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여자는 잠에서 깬 게 짜증이 났는지 매서운 표정으로 눈치를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고양이 때문에 내내 깨있을 참이었거든요. 편하게 다녀오셔도 돼요."



그녀는 고맙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바로 뒷자리에 있던 40대 아주머니가 바짝 붙어 앉아 아기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해보기도, 두 눈을 깜빡깜빡해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기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있는 눈으로 생긋 웃어 보였다. 아이고. 착하네. 조곰만 참자, 아가. 엄마 힘드니까 네가 조금만 참아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무사히 공항에 착륙하자 각자의 짐을 챙겨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양쪽 어깨에 잔뜩 짐을 든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하철을 향해 걷고 있었다. 다시 울음을 터뜨리게 되더라도 애기가 그럴 수도 있죠, 안심시켜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좋겠는데. 버스에 탈 때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아저씨에게, 잔뜩 짐을 든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해드리며 우리 가족들에게도 누군가가 이런 친절을 베풀길 바라곤 했었다. 어쩌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아빠, 엄마, 언니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전에 없던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아가씨, 가방 무거워 보이는데 이리 줘. 내 딸 같아서 그래. 얼른."



"이 시간까지 일한 거예요? 몸 다 상하겠어. 내 딸이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겠어요."



별안간 무릎 위에 선뜻 내 가방을 놓아주신 아주머니, 야근 후 집 바로 앞까지 바래다주셨던 택시 아저씨가 떠올랐다. 딸 같아서. 우리 자식 같아서. 그 생각 만으로 이름도 모르는 타인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짐을 느꼈다. 저 자그마한 아기를 꼭 안은 사람도 누군가의 언니, 누군가의 딸이겠지. 그녀를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부디 마음 졸이지 말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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