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13. 2016

열정의 증거

쓰디쓴 면접



"면접 한 번 봐봐."



일전에 내 이력서를 받아 본 적이 있는 선배에게 불쑥 전화가 왔다. 듣자 하니 규모는 조금 작지만, 열정 넘치는 회사인 것 같다고, 신입이 경력 쌓기에 괜찮은 곳인 것 같다고 했다. 우연히 내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었다는 대표는 그로부터 며칠 후, 선배를 통해 면접 일정을 통보해왔다. 지금껏 경험했던 취업 절차와는 달라 이렇게 이루어지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당시 그 일이 절실히 하고 싶었던 나는 통보받은 날짜에 30분가량 일찍 도착해 있었다. 회사에는 앳된 얼굴의 두 여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볼 일이 있으시다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가정집을 개조했는지 회사라고 보기엔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다. 벽 곳곳엔 누런 때가 껴 있었고, 꽉 닫힌 창문 옆엔 만지는 순간 파삭, 소리를 내며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식물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열 개가 조금 안 되는 책상은 자리의 주인들이 대략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모양새였다. 여자는 자리를 안내해 준 뒤, 차가운 커피를 한 잔 가져다주며 아마 들어오시자마자 담배 피우실 거예요, 라며 한쪽 창문을 열어주었다. 면접이 어떻게 진행될지 도통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 먼저 이 공간에 빨리 익숙해져야겠다 싶어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대표라는 사람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미리 언질 했듯 앉자마자 뒷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나에 대해서는 좀 듣고 왔나?"



이 질문을 화두로 자신이 일궈 온 것들을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담뱃불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퇴사한 신입의 이야기를 할 무렵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15분 동안 쉼 없이 말을 하던 그는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그제야 근무 환경에 대해 설명했다.



"출근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게 될 게 아마 담배 심부름일 거야. 가끔 드라이클리닝 맡긴 것도 가져오게 될 거고. 그것 말고도 할 게 아주 많지. 주어진 일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요즘 애들은 너무 곱게 자라서 하고 싶은 것만 하려 하지만 나 때는 꿈도 못 꿨어. 회사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닌데. 월급은 여기 적혀 있는 대로야. 신입들은 모두 같고, 협상은 없어."



속사포로 쏟아낸 말속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아랫사람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묻어났다. 페이퍼에 적혀 있는 월급은 지금 생각해도 참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그는 별안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또래들이 한 번쯤 느껴봤다는, 왠지 모를 억울한 감정. 아, 애들이 말한 씁쓸한 면접이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 정도도 못 견디면서 이 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어? 무급으로도 오겠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는 까칠한 말투로 말했고, 나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대표는 방까지 안내해주었던 여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커피 갖고 와, 커피.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댔다. 그날, 몸에 밴 담배 냄새는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빠지지 않았다. 유독 독하게 느껴지는 냄새였다.



"열정이 어느 정도 되는지, 엉뚱한 걸로 확인하려는 곳이 있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쥐꼬리만 한 월급, 부당한 대우도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근데 그 상황을 다 알고도 오겠다는 애들도 있으니까 이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잘했어. 나한테 미안할 건 전혀 없고. 또 기회가 올 거야."



소개해준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하자, 되려 이런 사회가 부끄럽다고, 너는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시작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회사에 대한 아무런 기준도 없던 때였지만 한 가지 만은 확실해진 것 같았다. 이 일을 얼마나 하고 싶어 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당연시되어야 할 것들을 무시하는 회사는 멀리 두어야겠다고. 그건 내가 가진 열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던 신입과 어느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놀랍게도 회사 안에서 그 누구보다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대표가 말했던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할 만큼.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도 선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