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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25. 2015

추억이 바래질 땐

그때 그 장소는 사라졌어도  


결국 같은 걸 주문할 게 뻔했지만 괜스레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연말을 맞이해 새롭게 출시된 프로모션 음료들이 가득했다. 오늘도 역시 라떼가 좋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 라떼 한 잔 주시는데요."


"두유로 바꾸실 거죠?"


바리스타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란 표정을 짓자


"늘 같은 거 주문하시잖아요. 저도 햇수로 4년인데 당연히 다 기억하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도 웃으며 네, 그걸로 주세요, 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주말에 꼭 한 번씩은 노트북과 읽다만 책을 들고 이곳을 찾았으니. 높이가 딱 맞는 널찍한 책상이 좋아서이기도 했고, 유독 혼자 무언가에 몰두해있는 사람들이 많아 편안해서이기도 했다. 도란도란 기분 나쁘지 않은 소음이 정적이 흐르는 집보다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라떼 한 잔을 주문하고 나면 꼭 외부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곤 했는데 어떤 건물이 새로 생겼는지, 또 어떤 가게가 없어졌는지도 훤히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아, 저기 또 다른 가게가 생겼네.'


건너편에 있던 개인 카페가 체인점으로 바뀐 듯했다. 언제 공사를 다 끝냈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다른 풍경이 들어서 있었다. 몇 번 가보진 못했지만 남부터미널 역을 빠져나와 집까지 걸어 내려오다 보면 주방까지 모두 보여 왠지 모르게 내 공간처럼 느껴지는 가게였다. 지나칠 때마다 앞치마를 두른 선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무언갈 조물조물 만들고 계셨다. 다양한 수제청과 쿠키도 맛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울퉁불퉁 못난 형태마저 정겹게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아, 이제 아주머니도, 그 귀여운 쿠키도 볼 수 없는 건가, 생각할 무렵 주문한 라떼가 나왔다. 따끈한 컵을 꼭 쥐고 자리로 돌아오려는 찰나,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보단 손에 들려있는 테니스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운동 다녀야 되는데,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낯선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13년 만에 보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야, 너 뭐야. 여기 살아?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때 그 시절과 똑같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이 친구를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던 터라 나는 그저 야, 웬일이니, 만 연달아 내뱉어냈다.


"일단 너도 주문하고 저기 저 자리로 와. 이게 진짜 얼마 만이야."


조금 후, 그녀는 한 손엔 아메리카노, 다른 손엔 초코 쿠키를 들고 돌아왔다. 그때도 초코 쿠키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다른 건 변해도 이 맛은 안 변하니까, 라며 그녀는 씩 웃었다.


"넌 뭐 똑같아서 바로 알아보겠다만 난 어떻게 알아본 거야? 나 쌍수도 했는데 너무 곧바로 알아봐서 섭섭할  뻔했어. 영 보람이 읍따."


그녀는 달라진 눈을 손으로 콕 집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때랑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난 네 얼굴이 워~낙 익숙해서 보는 순간, '쌍수한 ooo이네, 생각했어. 풉. 야, 근데 똑같다는 것도 칭찬은 아니잖아."


세월이 무색할 만큼 우리의 대화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무섭기로 유명한 선생님이 담임이었던 덕에(?) 우리 반은 단합이 참 잘 됐다. 전반적으로 모든 아이들이 사이좋게 잘 지냈다. 공공의 적이 있으면 급격히 가까워지잖냐, 회사만 봐도 그래, 그녀가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당시 꽤 오랜 시간 짝꿍을 한 적이 있는 우린 시도 때도 없이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대화 소재와 개그 코드가 참 잘 맞았다. 야, 그거 있잖아, 하면 아, 그거? 찰떡 같이 알아듣는, 그런 친구였다. 제법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것만은 또렷했다. 입만 열면 킥킥거렸던 순간들이. 그땐 뭐가 그리도 즐거웠는지-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했던 일들이 하나 둘 선명해지면서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만나는 사람은 있고?"


"응, 최근에 엄마가 하도 선 봐라 선 봐라 해서 하나 봤는데 우리랑 5살 차이 나는 사람이었거든. 5살이면 딱 좋다 생각했는데 나이를 따져보니까 글쎄, 34살이나 되는 거 있지. 나 깜짝 놀랐잖아. 34살과 선 보는 나이가 되다니.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거니. 야, 그리고 우리 살던 동네 싹 다 바뀐 거 알아? 그때 선 본 남자랑 그 근처에서 만났는데 야, 못 알아볼  뻔했잖아. 아파트도 다 재개발 중이고, 죄다 쇼핑몰로 바뀌어버리고. 놀이터는 다 어디 간 거니?"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지난 시간 동안 느꼈던 모든 것들을 쏟아냈다. 그녀와 비슷하게 겪은, 나에 대한 변화들도 하나 둘 이야기했다. 버스 타면 10분 거리에 있는 옛 동네는 그녀 말대로 과거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지각을 면하려 미친 듯이 달렸던 그 골목도, 점심시간, 만화책 하나 빌리겠다며 깡총 뛰어넘었던 그 담장도, 하굣길에 꼭 들르곤 했던 아파트 단지 안 그 놀이터도- 시간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공간이 없어지자 우리의 추억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아 씁쓸했던 날이 있었다. 어느 한 때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녀도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야 그래도 이렇게 만나니까 그때가 정말 생생히 떠오른다. 완전히 잊고 살았어. 같이 매점 가서 피자빵 사 먹던 거, 수업시간에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라디오 듣던 거. 그거 담임한테 뺏겨서 한참 동안 못 들었잖아. 학교 내부도 싹 바뀌어버렸겠지만- 이렇게 같이 얘기하니까 정말 또렷하게 기억나."


맞아 맞아, 그녀는 오늘도 찰떡같이 그 느낌과 생각을 알아주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왜 한 번도 마주치질 못했지, 이 만남을 미리 갖지 못한 게 아쉬웠다. 1-2시간가량 정신없이 추억여행을 떠났던 우린 종종 이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작은 일에도 깔깔 거리며 웃었던 때가 그리워질 때, 추억은 자꾸 희미해지는데 옛 공간들마저 몽땅 사라져버려 마음이 적적할 때, 주저 없이 연락하기로 했다. 그 말에 그동안 느꼈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모두 녹아내려 없어지는 것 같았다.


추억은 모르는 사이, 우리 속 어딘가에 선명히 남겨지나 보다. 사라진 듯했지만 우리 곁에 언제고 머물고 있었다. 그때 그곳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변해버리더라도, 그때 그 기억이 노랗게 바래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게 되더라도, 언제든 되새겨지길 바라며 마음 언저리에서 계속해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사라져도 괜찮다. 변해가도 괜찮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건 그저 흘려보내 주기로 했다. 그보다 더 오래오래 기억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 이제 조금만 아쉬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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