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가(家)와 재벌
구한말, 조선은 아비규환이었다. 외세는 몰아쳤고, 삼정은 여전히 문란했다.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지경이었으니, 또 나라의 주권자가 중심을 잡지 않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버렸으니, 시대를 알만 하다. 이즈음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이숍(Isabella. B. Bishop)이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책을 내는데, 그것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구한말 시기가 흥미롭다. 여기서 비숍 여사는 우리사회에 일침을 놓는다.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5분의 4는 피를 공급하는 하층민인 평민 계급이다.”
현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한진 그룹 총수 일가의 행위들을 보건데, 비숍 여사의 일침은 여전한 듯하다. 마카다미아의 완판녀이시며, 닥터 스트레인지마냥 비행기를 돌리시는 마법을 행사하시어 대한민국을 만방에 알리신 장녀는 자신의 흡혈 면허를 자랑질 한 지 오래다. 이어 광고업 특유의 피로함을 달래주려 친히 물세례를 해주신 차녀는 떠오르는 신흥 강자시다. 이들 사이에서 빛이 좀 바랜 느낌이 있지만, 여전히 잊어서는 안 될 한진그룹의 둘째이자 대항항공 대표이사인 장남도 건재하심을 알아야 한다. 현실을 GTA게임마냥 즐기시며 단속하던 경찰관을 들이박으시는 용감무쌍함이 가히 흡혈 왕자의 모습이다. 지금은 그 어미가 내가 이들을 나은 흡혈의 대모라며 울부짖는 동영상이 인기를 얻고 있다.
한진의 흡혈귀들만 언급하면 다른 흡혈귀들이 섭섭해 할지 모르겠다. 피를 공급하는 우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친히 영화 <베테랑>의 표본이 되신 SK M&M의 최 전 대표님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어이가 없네”라는 명대사를 그분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1인 시위 노동자를 사무실로 불러 뚜까 팬 것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는 후문이 돈다. 아들과 시비 붙은 술집 종업원을 산으로 끌고 간 한화 회장님의 부성애 넘치는 이야기는 좀비와 흡혈귀가 싸우면 분명 흡혈귀가 이길 거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더 나열하자면 대한민국 흡혈귀사(史)를 써내려가야 할지도 모르니 이쯤하는 게 좋겠다.
2018년의 대한민국, 구한말과 크게 다른가? 비숍 여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여행하고 책을 썼다면 어땠을까? 갑오개혁으로 법적 신분제가 폐지된 지 123년 되는 해다. 그러나 흡혈 계급은 여전하다. 자본이란 양식으로 면허를 발급받고 우리의 고혈을 빨아먹는다. 자본의 테두리 안에서 신(新)신분제가 생기고 있다. 바로 재벌과 평민. 한때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말은 조선시대처럼 신분제가 여전하면서, 이를 숨기고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피를 공급하게 만드니 더 지옥 같다는 우리들의 한탄이었다. 또 어디선가 이들의 흡혈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오히려 흡혈귀한테 미안한 지경이다. 흡혈귀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