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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nger Jan 26. 2020

분노의 금요일

16. I'm from Korea.

März 30, 2012

후,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래도 시간 순서대로가 좋겠지. 유난히 긴 금요일이었다.

아침부터 팀원 5명이 동시에 전화기를 들고, 멀리 있는 보스와 함께하는 컨퍼런스콜을 했다. 대략 십 분 넘게 보스가 다른 분들에게 폭풍 독일어로 얘기하는 시간이 끝나고, 나에게는 H회사에 3월 안에 해결해야 결제대금이 3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연락하라고 영어로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출근하자마자 H에 연락해야 된다고 헬레나 아주머니도 얘기했고, H에 납품하는 공장의 아시아 담당자한테도 같은 내용의 메일이 와 있었다. 한국과의 시차가 걱정되어, 컨퍼런스 콜이 끝나자마자 H에 연락했다.

H에서 지급할 대금 내역의 결제일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전화를 끊고 조금 뒤에 메일을 받았다. 1/3은 이미 3일 전에 입금됐고, 나머지는 4월 2일에 입금 예정이라고 되어있었다.


독일은 금요일 오전이지만 한국은 금요일 저녁 6시. 나라면 당장 집에 뛰쳐나갔을 시간이었다. 일단은 H의 이런 답장을 그대로 회계팀과 자금 담당자인 헬레나 씨께 포워드 하고, 4월 2일에 입금되어도 괜찮은 건 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건 공장 담당자가 결정할 일이라고 해서 또 따로 연락하고 있는데, 좀처럼 말을 걸지 않는 보스가 메신저로 얘기를 시작했다.


Boss : 왜 H는 3월 말이 due date인데, 지급을 4월에 한다는 거야?

Boss : 우리는 그들이 3월 안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해.

Me : 그럼, 제가 다시 전화해서 그렇게 요청할까요?

Boss : 응. 그래야 해.


일단은 현재 한국시간으로 사실상 H의 업무시간은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송금한다 해도 독일 은행에서는 3일 뒤에나 받을 것이다.(이 답답한 시스템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지급 결제일을 내가 통화할 결제팀 담당자가 당장에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지도 나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담당자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4월 2일에 보낸다는 메일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지금 전화해서 다시 요청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입금해 줄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난 보스에게 다시 답장을 했다.

Me : 지금 다시 전화해서 말할게요. 근데 지금 한국은 업무가 이미 끝났을 시간이라, 해줄지 모르겠어요.

Boss : 대금 지급일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기한에 맞춰서 대금을 결제하는 것을 강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최종 결과에 상관없이 다시 요청하라고 한 것이야.


그래 맞다. 독일식 사고방식으로는 이래야 할 필요가 있다. 설령 결과가 바뀌지 않더라도 일단 내가 이런 걸 요구한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어필할 필요가 충분하다. 이들에게 분명한 의사표현은 매우 중요한 행위이고, 게다가 계약서 내용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사안이니까.

 

근데, 한국은 지금 금요일의 퇴근시간이다. 난 이미 그분과 오늘만 3번을 통화했고, 그분은 다행히도 친절하게 메일로 이미 결제예정일까지 확정해줬다. 그리고 정말 3월 안에 돈을 받고 싶었으면,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3월의 마지막 날 금요일 오후 7시에 전화해서 '4월 2일이라고 하신 거 안됩니다. 지금 당장 지급해주세요.'라고 왜 또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결과가 바뀔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따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한국 사람에게는 싸우자는 얘기밖에 안된다. 이유를 설명하고 서로 타협이 가능한 문제라면 모를까 이미 정해진 일을 가지고 계속 얘기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강력한 자기 의사표현이 될지 몰라도,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 아니면 내가 싫은 거냐?' 밖에 더 될까? 한국식 사고방식으로는 물건을 납품하는 입장인 우리 회사는 어찌 보면 을인데 내가 반복된 내용의 전화 독촉으로 혹시나 갑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회사에 피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갑을 같은 소리를 독일인에게 해봤자 전혀 안 통할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결국 오전 내내 5번은 통화를 한 것 같다. '어떤 이유로 4월에 지급이 되는 것인가요?'로 시작한 통화는 약속한 날짜가 지났지 않느냐. 이월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냐...로 내가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는 것으로 길어졌다. (보스가 하라는 대로 했다...)


놀랍게도 계속 캐묻다 보니 이유를 찾았다. due date를 세는 기준이 우리 회사와 H가 달랐던 것이다. 우리 회사는 우리가 물건을 싣는 날짜 기준, H는 한국에서 물건을 하역하는 날짜 기준으로 각자 세고 있던 것이다. 근데 H의 주장대로라면 계약서에는 하역하는 날짜로 되어있다고 하니, 우리 회사가 due date를 빠른 날짜로 설정해놓고 여태 매월 닦달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 놓고 우리 회사는 H를 결제일도 지키지 않는 짜증 나는 거래처로 취급하고 있었고 갑자기 난 한국인으로서 화가 났다. (후, 이럴 때만 생겨나는 애국심...)


그래서 이 어이없는 오해를 H의 부장님이 직접 우리 회사 동료들에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한국 회사와 독일인들 사이에서 양 쪽의 행동이 이해가 가면서도, 각각을 이해시켜야 하는 내 입장에선 너무 곤란했던 오전이었다. 양 쪽에 낀 샌드위치 신세였다.


힘든 오전이 끝나고 점심을 먹었다. 중국계 프랑스인 아저씨가 산 낙지를 먹는 영상을 본 얘기를 하면서, 나 보고도 그런 걸 먹냐고 했다. 나는 무척 짜증 났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산 낙지가 매우 맛있고 그걸 먹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설명해줬다.


그리고 하필 그가 2주 전에 나를 일요일에 프랑스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초대했던 게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을 먹고 나서 그 아저씨가 나와 안쏘니에게 '일요일 점심 1시에 우리 집으로 와~'라고 말했다.


2주 전 점심을 먹고 잠깐 산책을 하면서,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시간 돼? 너랑 안쏘니를 초대해서 프랑스 요리를 소개해줄게.'라고 하길래 나는 '아마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마도 일요일 저녁식사 초대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1시 라기에 '아, 점심에는 내가 교회에서 봉사해야 되는 스케줄이 있어.'라고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 아저씨는' 그냥 하루 안 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에게 개인 스케줄은 회사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회사 일정 중에도 자녀 픽업하고, 피곤하고 아프면 회사도 쉴 만큼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분이 왜 나의 일정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됐다. 독일에 와서 시간 약속을 정하면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러웠다.


분명 일요일 점심에 일정이 있어서 어렵다고 미안하다고 얘기했는데도, 그는 굳이 오후에 메일로 초대장을 보냈다. '하루쯤 안 가는 건 괜찮잖아. 아마 네가 믿는 신도 이해할 거야.'


남의 일정을 쉽게 말하는 것이 기분이 나빴지만, 초대에 못 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서 한 번 더 참았다. '내가 그 날 맡은 일이 있어서, 이번 초대에는 못 갈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초대해줘서 고마워.'라고 다시 한번 더 답장했다.


그랬더니 그가 보낸 답장은 'Oh, that's embarrassing.'


'이 사람 대체 뭐지?' 나 화나게 하고 싶은 건가 싶었지만, 이들의 문화에서 호스트가 초대했는 데 거절하는 게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감이 오질 않아서 황당했다. 혹시라도 내가 메일로 얘기한 게 무례했던 건가 싶어서, 그에게 가서 얼굴 보고 '초대해주신 건 감사한데 못 가게 돼서 너무 유감이에요.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 난 그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이러면서 장난 반 진심 반인 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 버렸다. 이 모습을 본 안쏘니도 당황해서 '저 사람 왜 저러지?'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분은 매 번 점심때 진짜 말도 안 되는 아시아 혹은 한국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것들을 (나한텐 거의 무례하게 느껴지는 것들..) 물어봤다. 나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참아왔는데, 오늘의 태도를 보니 이 정도면 인종차별인가 싶었다. 내가 계속 참으니까 한국사람을 무조건 예스맨으로 생각한 건가? 마지막에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도 내가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을 보고 놀리려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정말 분노의 금요일이었다.


그래도 난 명확히 거절했고, 결과적으로는 속이 다 시원했다. 생각해보니 초대해준 예의를 생각해서 그의 집에 갔다면, 식사초대에서도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과 행동들로 내가 얼마나 더 화가 났을지 모를 일이다. 앞으로 독일에서 못 하고, 안 하고 싶은 상황에서는 'No'를 더 많이 해야겠다.


2020.01.26

두 가지 사건이 한 번에 일어난 금요일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도 이 날 배운 것을 유용하게 쓰며 살고 있다.


독일에서 내가 담당했던 일은 한국어로 하자면 '매출채권추심'이다. 그런데 보스가 나에게 강조했던 것은 대금이 입금되는 결과가 아니었다. 왜 약속된 날짜를 지키지 못했는지 원인을 알아내길 원했다.


'실제 대금 입금이 중요한 것이라면,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독촉 메일을 자동으로 보내고 최종 기한을 어길 경우 경고하는 방식 같은 걸 사용할 거야. 네가 일일이 전화나 메일을 할 필요도 없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하면 다음 달에도 그 기업은 연체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 우리가 연체의 원인을 알 지도 못했고, 해결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야.'  


결과가 바뀔 것 같지 않을 일에 계속 커뮤니케이션을 하라는 보스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오랜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 나니 그의 방식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슈의 표면적인 현상과 결과보다는 원인과 과정에 관심을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배웠다. 그리고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왜?'라는 질문과 호기심은 여전히 쓸모있는 것이라는 것도.


그 날의 불쾌했던 초대와 거절의 과정을 겪어서 이후로 나는 예의상 참고, 웬만하면 동의해주는 착한 한국인으로 살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그렇게 몇 번 거절을 해보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에만 기쁜 마음으로 '예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와 시간을 벗어나는 일들은 열심히 거절하고 있다. 한국에서 거절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느껴져서, 매 번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거절 의사표현을 하지만 항상 성공적이지만은 않다. 상대방이 내심 서운해 하는 순간도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그 날의 교훈대로 내가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명확하게 내 의사를 표현하고, 필요하다면 거절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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