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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nger Jan 08. 2023

독일어를 독일어로만 배울 수 있을까?

독일 교환학생 수업 회고 (1)

생초급 독일어 수업

  독일에 도착한 순간의 나는 독일어라고는 'Hallo'만 알고 있었다. 교환학생들은 학기 시작보다 한 달 앞서 도착해서, 기초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교환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첫 수업에서, 독일어 선생님은 오늘이 자신의 수업에서 제일 영어를 많이 쓰는 날일 것이고, 앞으로는 질문도 독일어로 하라고 하시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알파벳(독일어)으로 몇 가지 질문하는 문장들을 알려줬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선생님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몇몇 상황이 아니고는, 오로지 독일어로만 수업했다.

  선생님은 '몇 페이지를 펴세요', '책을 읽으세요' 같은 말은 물론, 독일어 문법을 설명할 때도 독일어로만 설명했다. 한국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지만 당연히 한국식 외국어 교육방식이었다. 글자도 못 읽고 그 글자를 발음하는 법도 모르는 상태의 학생에게 외국어로만 수업하는 외국어 수업은 처음이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너무 황당해서 '자국어에 대한 높은 자부심 때문에 저런 교육방식을 하는 걸까?, 아니면 선생님이 영어를 못하는 건가?' 며칠 동안은 그런 의심의 생각들로 가득 찼었다. 그 수업이 끝날 때 까지도 이상한 선생님한테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기들에게 말을 알려주듯이 선생님은 교실에 있는 모든 사물의 단어를 하나씩 말해주고, 칠판에 써주고 반복해서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 기초 단어를 가르쳐 나갔다. 독일 알파벳의 발음도, 기초 단어도 배우기 전 단계의 학생들인데, 교과서를 읽어보게 했다. 학생들이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다고 영어로 말하면, 독일어로 혼이 났다. 뭐라고 혼냈는지 조차도 못 알아들었지만, 선생님이 격양된 톤으로 화냈기 때문에 혼냈구나라고 모두가 이해했다. 그리고 독일어로 질문하는 법을 간단히 알려줬다.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하니 스스로 추측해서 읽어보라는 게 그분의 교육 방침이었다.

  물론 독일어 교재에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림과 독어뿐, 영어 설명은 전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열심히 독어를 공부할 생각이었던 나는, 서점 가서 개인적으로 독어와 영어가 병기된 책을 사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독어로만 독어를 배울 수 있다고?' 의심이 가득했지만, 놀랍게도 1달이 지나고 슈퍼에 가서 캐셔랑 말을 하고, 숫자를 읽고, 짧은 자기소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를 아예 못 쓰게 하니, 수업받고 생활하기 위한 최소한의 독일어 단어들은 단어장 따위로 외우지 않아도 뇌가 기억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한 학기 동안 그다음 레벨의 초급 독일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이셨고, 영어로 질문해도 혼내지 않으셨다. 독어로 설명해 주시다가, 아무도 못 알아듣는 표정이 되면 영어로 다시 설명해 주셨다. 아마도 내용이 좀 더 어려워졌으니, 독일어로만 설명하면 알아듣는 애들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나의 독어 의지력이 방학보다 떨어졌기도 했지만 (독어 문법의 난이도가 사악해지고, 전공 수업은 영어로 들었기 때문에, 갈수록 의지를 잃어갔다.), '독일어로만'이라는 규칙이 없어진 것도 한 몫했던 것 같다.

  '외국어 교육을 이런 방식으로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은 '단지 외국어뿐만이 아니구나'로 변했다. 초보자가 틀리는 것은 당연하니, 처음부터 스스로 해보게 하는 방식이 신선했다. 외국어는 틀릴까 봐 내뱉지 못하는 것이 학습을 막는 장애물 중에 하나다. 아예 언어를 처음 배울 때부터 이걸 깨부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적응 초기의 나는 머릿속으로 적절한 단어나 표현을 생각하다가 지금 당장 영어로 말해야 상황에서 괴로워했다. 영어로만 살 수밖에 없는 유럽에 온 교환학생이, 실전에서 눈앞에 기다려주는 공무원을 앞에 두고 내 영어실력 때문에 시간을 끄는 것은 사치였다. 독일어를 막 해 본 뒤로는, 영어도 틀리든지 말든지 막 내뱉었다. 외국어는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 도구일 뿐이라는 나만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독일이 영어 모국어 국가도 아닌데, 그들도 틀릴 수 있고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이 생각 때문에 지금까지도 내 영어 표현의 정확도를 높이려면 갈 길이 멀지만, 동시에 영어 원어민을 만나도 난 틀려도 되고(나도 모국어는 잘할 수 있다고!), 너는 당연히 잘하겠지라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교육할 때도, 아기가 무언가를 처음 배울 때 처럼 하는 방식이 통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학원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렇게 언어 수업을 할 수 있는데, 10년 넘게 사교육 영어에 돈을 들이는 한국의 현실이 대비되었다.

  독일에서의 정규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 여름방학 한 달짜리 생초급 독일어 수업에서부터 한국이랑은 너무 다른 교육경험을 했다.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독일어 선생님의 단호한 'Nein!' (독일어로 No, 영어 쓰지 말라는 소리...) 목소리가 떠오를 만큼 인상 깊은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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