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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은 Nov 16. 2019

카타르시스

 

‘제국주의의 확산, 백인 남성의 전유물…’ 그렇게 어벤저스 보기를 거부했다. 약간의 마이너 기질이 더 멋있어 보였던 건 왜일까. 은근하고 은밀하게 이야기를 전하며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가 좋았다. 모두가 어벤저스를 본다면, 죽어도 나는 보지 않으리. 매스미디어가 현혹하는 세상에 나만은 살아남으리!


  단어로만 알고 있던 카타르시스를 이해하게 된 건 어느 전공수업 때였다. 범죄영화가 실제로 범죄 발생률에 영향을 끼치는지 토론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카타르시스 가설이었다. 범죄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일으켜, 실제로 블록버스터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범죄 발생률이 낮은 경향을 보였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물론 영화를 보려고 술집을 찾지 않았거나 카드게임 한 판을 덜 했다면 그 시간에 범죄가 줄어드는 게 당연한 결과지만, 그래도 카타르시스란 게 어째 대단해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카타르시스를 퍽 즐기는 류의 인간이었다. 옛 애인이 나를 속상하게 할 때 꼭 슬픈 영화를 찾았다. 눈물 콧물을 다 흘리곤 속이 후련해졌다. 애인에게 내고 싶었던 화마저 누그러졌다. 한번 이 효과를 알고 나자, 울분이 쌓이고 쌓이는 날엔 꼭 슬픈 영상을 부러 찾았다. 카타르시스 중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소리 내어 꺽꺽 울어야, 좀 살 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를 보면서도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유족의 눈물을 보며 함께 울었다. 측은지심이겠거니, 공감이겠거니 했으나, 그리 울고 난 후 마음은 또다시 평온해졌다. 


  이때부터였을까. 눈물에도 승화에도 도덕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게. 차분해진 마음이 죄스러워진 게. 나의 마음은 해소되어 묵혔던 감정은 사라지고 없는데, 티브이 속 유가족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타고 있을 것이기에 함부로 눈물을 지어선 안 됐다. 내 걱정은 제쳐두고 뉴스 속 산불을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게, 불이 꺼지고 난 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좀비 드라마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픔은 내게 그저 수단이었던 것이다. 


  합법적 카타르시스. 모두가 어벤저스를 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소한의 도덕은 지킬 수 있다. 대놓고 펼쳐지는 폭력과 파괴, 감동과 기쁨의 서사, 더욱이 비현실이자 환상. 현실에 기반하지 않았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자유롭다. 이 같은 커다란 자유를 매스미디어의 천박함이라 규정하고 멀리하려 했던 내 스스로가 더 천박했음을 고백한다. 실재하는 아픔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나 혼자 해방되는 경험은 이제 하지 않으리. 의도가 어쨌든 감정의 메커니즘은 그렇게 작동하기에, ‘느껴지는’ 것이라고 변명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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