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일, 돈, 가족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가요?
"모든 성취의 시작점은 갈망이다"
–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
6년간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직원들의 성향이 참 다르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온 다국적의 사람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한 회사에서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것이 그래서 신통하기만 하다. 여기엔 비밀이 있는데 아무리 다양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라도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한가지 공통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동기부여'다. 그런데 이 동기부여에는 필요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확신이나 신념 뭐 그런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신이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면 언젠가 결고로 돌아온다는 믿음 말이다. 그 보상은 성취감, 사내 영향력, 경력과 연봉 같은 것인데, 중요한 것은 결과를 제대로 낼 수 있다는 믿음이 결국 강한 동기부여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하면 된다'라는 식의 자기 암시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러한 확신은 직간접적인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본인이, 옆 자리의 팀원이, 나아가 자신이 소속한 팀과 조직이 회사를 변화시켰던 경험을 쌓을 때 자연스럽게 '나라면 할 수 있다'라는 의욕이 생겨난다. 이러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을 가질 때 비로소 동기부여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실리콘 밸리에서 봤던 이들의 동기부여 크게 세 가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첫째는 '일' 그 자체였다. 자신의 일이 적성에도 잘 맞고, 업계에 파급력도 있으며, 새롭고 도전적인 과제가 주기적으로 주어진다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된다. 이런 직원들은 조직에서 '승진'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곤 한다.
둘째는 '가족'이다. 가중 중심문화가 일반적인 미국 사회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간혹 이것이 특출 난 사람들이 있다. 일을 무시하지는 않되 필요한 만큼만 집중하고, 나머지 노력은 가족에게 쏟는다. 이런 직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시간'이다. 그들은 일과 시간은 지키되 퇴근 후 철저히 일에서 멀어진다.
셋째는 '돈'이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만,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커리어를 쌓아 자신의 몸값을 키우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직원들은 주로 주기적인 '이직'을 통해 직급과 연봉을 향상하며 목표를 달성한다.
물론 이 세 가지 가치관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돈을 포기하지도 않고, 돈을 중요시한다고 가족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가치관이 인정되고 각자만의 길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일, 가족, 돈. 나는 이곳에서 그동안 무엇으로 동기 부여를 얻었을까. 지금 이직을 시도 중이니 '돈'이 우선일까. 직급을 올리려 시도 중이니 '일'인 것일까. 다만 확실한 것은 이왕 시작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나를 담당하던 HR직원 툴툴이로부터 메일이 왔다. 담당자가 바뀔 거란다. 내가 지원하는 포지션이 F로 상향되면서 앞으로는 자신의 상사가 나를 담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뒤 디렉터급의 HR 직원 '호들갑여사'와 간단한 약식 미팅을 가졌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인상 좋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향후 인터뷰 절차와 인터뷰어들에 대해 그리고 F가 받는 복리후생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F는 준 임원급(executive hire)이라면서 매우 고급진(very prestigious) 위치라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P직급과 F직급의 베네핏 차이를 한 가지만 알려줘"
"휴가일수가 무제한이야"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회사생활 1-2년 한 것도 아니기에 알고 있었다. 그 정도 책임이 큰 직급이면 일 때문이라도 휴가를 무제한으로 가기 쉽지 않을 것이란 것을. "그레잇! 땡큐!" 나는 미국사회의 종특인 예의성 감탄사를 남발했다.
이후 매니저 돌돌이에게 F직급 인터뷰를 위한 추가 서류를 작성해 보냈고, 일정을 조율해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호들갑여사는 면접관 두 명의 링크드인(LinkedIn) 주소를 보내줬다. 한 명은 A사의 저전력 설계 분야의 본좌, 한 명은 A사 상품기획의 달인이었다. 직급은 Senior VP, Corporate VP. 그 둘의 차이는 모르겠지만 누구 말마따나 베리 프레스티저스한 분들이겠구나 싶었다.
"단순히 사실만 나열하지 말고 의미를 담으라고!"
S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룹장이었던 한 임원은 주간 회의에 참석한 팀장들에게 자주 주문하곤 했다. 데이터에 의미를 담으라고 말이다.
주간 회의에서 팀장들은 돌아가며 프로젝트의 진척 사항이나 경쟁사 동향을 보고했다. 이때 도출된 실험 결과나 발췌한 뉴스 기사를 그대로 발표할 경우, 그에게 어김없이 핀잔을 들었다. 임원에겐 결과 자체보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데이터는 그에게 쓰레기와 다름없었다.
'임원씩이나 되면 아랫사람이 보고하는 자료를 해석할 수 있는 자신만의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몇몇 팀장들은 임원의 핀잔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임원들은 사실 세세한 데이터에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 결과가 향후 자사 제품에 주는 영향', '경쟁사 동향에 따라 자사가 취해야 할 전략'과 같은 일차적인 의미로부터 생각을 시작한다. 그래서 실무자들은 가능한 그들의 생각의 수고를 덜어줘야 했는데, 그만큼 임원들은 내려야 할 중요한 결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보고서 서두에 경영진 핵심요약(executive summary) 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핵심만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임원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은 본질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덜어내는 '추상화(abstraction)'였다.
A사 두 VP와의 인터뷰는 즐거웠다. 잊고 있었던 한국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줬기 때문이다. 그때는 죽을 만큼 싫었던 것이 관리 업무였는데, 정작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이 VP들과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기술이 향후 시장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경쟁사와 차별을 위해 A사가 취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지를 피력했다. 그들은 자신의 맡은 조직을 소개했고 그들의 다양한 생각을 나눠 주었다. 인터뷰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까웠다.
그렇게 A사와의 모든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다. 두 조직에서 세 번의 인터뷰 라운드, 홀가분함을 느끼기엔 소모한 5개월이라는 기간이 너무 지난했다. 남은 감정이라곤 그저 덤덤함뿐이었다. 그동안의 기억들을 머리에서 비워버리고 늘 그렇듯 하던 일로 복귀했다.
며칠 뒤 돌돌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헤이. A사 포럼에서 널 인터뷰했던 두 VP를 만날 일이 있어 슬쩍 물어봤거든. 피드백이 좋아. 너 F직급으로 입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잘됬어. 근데 이건 너 혼자만 알고 있어. 내가 너한테 미리 알려준 건 안 비밀!"
"그래, 고마워"
굿뉴스였지만 마냥 들뜨지 않았다. 언제든 변수는 발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대감을 숨길수는 없었다. 생각했다.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게 되면, 새 회사에서 또다시 마음을 다잡아보자. 책임이 더 큰 자리니까'. 그렇게 걱정반 기대반으로 시간을 보내던 일주일 뒤 또다시 돌돌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금 통화 가능해?"
뭔가 잘 안 된 것을 직감했다.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되었다면, 지금은 자연스럽게 HR을 통해 연봉 협상 단계로 넘어갈 수순이기 때문이다. 별도의 개별 연락이 필요한 단계는 아니었다. 전화를 걸었다. 돌돌이의 목소리는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미안함이나 아쉬움과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이 섞인.
"들어봐. 최종적으로 인터뷰 커미티, HR 임원들과 함께 최종 승인을 내리기 위한 자리를 가졌는데, 임원 한 명이 반대 의사를 냈어"
"응?"
"너 A사 리서치에서 인터뷰할 때 면접관이었던 놀놀이 기억하지? 그 친구가 한 달 전에 I사에서 왔잖아. 놀놀이가 I사에서 너와 직급이 같았는데 우리한테 오면서 P로 왔어.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거야."
"아니, 그럼 처음부터 F직급 인터뷰를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인터뷰 진행은 다 하고 결과도 좋았다며? 마지막에 이렇게 걸러지는 게 이해가 안 되네?"
"아 그건 미안해. 내가 당시 판단하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거든. 사실 인터뷰 잘 끝나고 면접관 피드백도 좋았어. 그래서 실제로 HR에서는 F직급 패키지로 오퍼까지 작성 중이었거든. 그런데 회사 간 직급 상관관계를 생각 못한 거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회사 간 직급 관계에 준한다고 해도, 개개인의 역량차이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돌돌이가 나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인터뷰 결과가 좋았다는 말 자체도 돌돌이의 전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누군가 영향력 있는 인물, 내지는 자신보다 높은 직급으로 들어오는 P직급 누군가가 내 F직급 입사를 아니꼽게 봤을 수도 있다.
"그래도 덕분에 이번에 VP들과 안면을 텄으니, 입사 후 네가 실적을 내서 진급심사를 할 때 좀 더 수월할 거야. 그러니 이번 F직급 인터뷰가 무의미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래 알았어. 생각해 보고 곧 연락 줄게"
이미 A사 측에서는 결정이 난 것 같았다. 더 이상 직급으로 협상을 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원래대로 P직급으로 오퍼로 진행을 할지, 아니면 2) 거절하고 원래 회사로 돌아갈지.
물론 조금이라도 나은 A사의 P 직급 오퍼를 받은 뒤, 이를 지렛대 삼아 I사에 카운터 오퍼를 요구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는 I, A 양사에 모두 실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회사가 고마워할 리도 없다. 철저히 이기적이 되어도 좋다. 아니 어쩌면 그러는 편이 더 능력자 코스프레하기 좋을지 모른다.
터질 것처럼 커져버린 내 마음속 풍선은 며칠 만에 바람 빠진 타이어가 되었다. 그리고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가족을 데리고 예정된 캐나다 학회 출장을 떠났다. 학회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P직급 HR 직원이었던 툴툴이의 문자를 받았다. "Welcom Back"이라며 다시 만나 반갑다고 했다.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리곤 툴툴이는 갑자기 P직급 기준으로 내게 제시할 수 있는 연봉의 숫자를 보냈다. 아직 진행하겠다 확답을 준 것도 아닌데 혹여나 내가 실망감에 I사로 돌아갈까봐였는지 그는 매우 서둘렀다. 나는 그들에게 애매한 존재였는지 모른다. F로는 뭔가 부족하고, P로는 차고 넘치는.
숫자는 나쁘지 않았다. 분명히 현직장에서 받는 것보다는 많았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극적인 변화를 느낄만한 숫자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앞선 해프닝의 실망감이 아직 가시질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을 한 뒤 답장을 보냈다.
"A사에서 나를 좋게 생각해 주고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해 줘 감사하다. 그런데,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떠나 A사로 합류할 강력한 동기를 갖기엔 부족한 것 같다"
"그래? 얼마면 네가 기분 좋게 A사로 올 수 있을까?"
"***K"
문자로 주고받던 대화창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친 적 내가 질러버린 ***K는 현재 받고 있던 연봉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