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너 하는 것 보고 줄게.

by 예나빠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



미친 적 내가 질러버린 ***K는 현재 받고 있던 연봉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직급 협상이 결렬되어 꿀꿀한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Money' 였다. 여기는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이었고 내 마음은 보복성 보상심리로 가득 차 있었다.


툴툴이와 문자로 주고받던 대화창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내 손은 살짝 떨렸다. 그 손을 살포시 잡아주는 누군가의 다른 손,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내였다.


불안.gif 블러핑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할까?"


"아냐, 어차피 지금 연봉 그쪽에 안 알려 줬잖아. 그쪽은 몰라. 지금 받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자기들이 생각하는 마지노선이 있겠지. 이럴 땐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야"


미국 회사생활 한 번도 안 해본 아내가 나보다 대범했다. 한국에서 미국계 은행에 다녔던 아내는 '어쩌면 타고난 협상의 달인'인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윙-" 답장이 왔다.



"***K가 기본급(Base Salary)만 말하는 거야?"


설마. 그랬다면 진짜 미친놈 인증이다. 빨리 그 오해를 불식시켜야 했다.


"아니, 기본급 + 보너스 + 주식 총합을 말하는 거야. TC, TC (Total Compensation)"


"OK. 니 희망연봉 잘 알았어. 돌돌이 그리고 내 상사랑 상의하고 연락 줄게"


바로 협상전이 시작되는 줄 았았는데 조금은 의외였다. HR 담당 직원이 전권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나? 미국에서 처음 하는 이직, 연봉 협상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것은 어느 FAANG(Facebook, Apple, Amazone, Netflix, Google) 엔지니어가 인터넷에 공개한 '연봉 협상 시 풀로 땡기는 법' 따위의 글로 배운 지식이 전부였다.


반응을 보니 적어도 그에게 난 미친놈은 아니었다. 그걸 확인한 것만이라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더 부를 걸 그랬나?'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내가 부른 금액이 관철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A사로 돌진할 기세였다.




"안녕! 예나빠. 나는 I의 리크루터 '말순이'야. 앞으로 너와 같이 이후의 채용 과정을 진행하게 될 거야. 우선 이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을 축하해! 입사 희망 연봉을 알려 줄 수 있어? 지금 받고 있는 연봉은 얼마니?"


현직장인 I사에 입사할 때 나는 연봉 협상에 관해 완전 문외한이었다. 미국으로의 이직이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광분했다. 그리고 '연봉은 알아서 잘 주겠지'라는 안이한 생각마저 했다. 말순이에게 받은 메일에 나는 순진하게 내 모든 숫자를 알려줘 버렸다.


"원화로 XXX인데, 현재 환율 기준 달러로 환산하면 YYY야. 그런데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 생각해"


한국과 미국, 서울과 산호세 간의 물가 차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YYY에서 살포시 2를 곱한 금액을 희망연봉으로 제시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형님들의 경험담들이 말하고 있었다.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 연봉의 최소 2배는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I사는 이미 사내에 정해진 연봉 테이블이 있다며 나름대로의 숫자를 보내줬다. 내가 제시한 숫자를 밑돌았다. 이후 문의를 빙자한 소심한 이의제기로 조금의 상향 조정은 받았지만,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는 2배는 관철되지 못했다.


그땐 일단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 중요했기에 순순히 오퍼에 도장을 찍었다. '설마 2배까지 필요 있나'라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정착한 뒤 얼마 안 되어 인터넷 형님들이 말씀이 거룩한 진리였음을 깨달았다.


되돌아보면 나는 꽤 많은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일단 현재 연봉, 희망 연봉은 먼저 알려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얼마를 원해'라는 질문의 정답은 숫자가 아니라 '얼마까지 줄 수 있는데?'라는 역질문이었다. 그랬다. 나는 I사에게 먼저 숫자를 받아내야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입사자가 미국 현지 회사를 상대로 그 정도의 배짱과 협상력을 갖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노릇이다. 일단 '괜히 많이 불렀다가 혹시 회사가 채용 취소라도 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과 싸워야 한다. 게다가 미국 회사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정확한 미국 노동 시장에서의 자신의 몸값을 어림잡기도 어렵다. 이런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출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해야 한다.




그랬다. 연봉 협상의 국룰은 '먼저 숫자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A사 측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숫자를 보냈다. 저쪽이 패를 먼저 보여준 셈인데, 글로 배운 협상의 원칙과는 뭔가가 달랐다. 내가 모르는 흑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 의문으로 며칠을 보냈다.


다시 연락이 왔다. 많은 덧셈이 포함된, 뭔가 길게 작성된 문자였다. 성격 급한 나는 총금액이 적힌 마지막 줄로 바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부른 숫자를 살짝 넘었다. '이렇게 쉽게 된다고? 진짜 더 부를 걸 그랬나?'라는 객쩍은 생각을 하며 처음부터 찬찬히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총금액은 맞췄지만 완전 보장된 금액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본급과 보너스를 조금 올리고, 입사 시 받는 주식 RSU(Restricted Stock Units) 외에, 해마다 추가로 지급되는 주식인 리프레셔(Reflesher)를 포함시킨 것이다.


사실 이는 그들이 최초에 제시한 수식에서도 암묵적으로 포함된 항목이었다. 원래 리프레셔는 주게 되어 있는 것이고 이번에 숫자로 구체화한 것뿐이었다. 그들이 처음에 숫자로 구체화할 수 없던 이유는 바로 평가와 연동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보내준 리프레셔만큼의 주식이 그대로 지급되리라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하는 거 보고 줄게'라는 의미였다.


내가 부른 숫자를 어떻게든 맞추려 한 노력은 가상해 보였다. '고맙다, 생각해 보고 연락 주겠다'라며 나도 간 보기를 한번 시전했다. 그들이 했던 것처럼.




양의지. 내가 좋아하는 두산 베어스의 야구 선수다. '곰의 탈을 쓴 여우'라는 별명답게 그는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독보적인 포수로 군림했다. 그는 자유 계약 신분으로 풀리는 해 엄청난 금액을 받고 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 NC에서 3년의 계약기간 동안 팀의 멱살을 잡고 우승까지 시키는 등 돈값을 제대로 해냈다.


보장 금액만으로도 행복한 양의지.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계약을 마치고 2023년 올해 그는 다시 두산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이었다. 이때 그의 계약 조건은 보장금액 60% + 옵션 40%였다. 이례적으로 옵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워낙 고연봉자인 데다가 에이징 커브(Aging Curve)에 돌입한 그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구단으로서는 안전장치를 심어둬야 했다.


구단장과 악수를 하며 환하게 웃음 짓던 양의지는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진짜 열심히 해야 돼요. 옵션 다 받으려면"이라 했다.




"A사에서 진짜 열심히 해야 돼요. 리프레셔 다 받으려면"


회사는 입사자에게 이런 마음가짐을 갖길 원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열심히 일해주마. 단, 그건 회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A사에 적을 둔 동안 나는 내 커리어를 위해 회사를 최대한 이용할 거야. 그리고 어느 순간 "회사야, 네가 나한테 하는 거 보고 여기 더 남던지 떠나던지 할게"라고 말해주마. 쿨하게.


학회출장에서 돌아왔다. 그 뒤로 약간의 조정을 거쳐 오퍼에 최종 사인을 했다. '야, 쟤네들은 이 정도까지 준다는데. 어쩔 거야?"라고 들이밀 다른 오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고집부릴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보장이 안된다 해도 어쨌든 부른 금액대로 맞춰준 셈이기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후 HR과 A사 입사일을 조율하고, 백그라운드 체크를 위한 부수적인 서류 작업을 했다. 다 끝난 셈이었다. I사를 떠날 준비가. 남은 것은 현직장인 I사에 통보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최소한 2주 전에만 퇴사를 알려주면 된다(2 week notice). 하지만, 마무리를 제대로 싶어 마무리 기간으로 1개월을 잡았다.


A사 입사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I사 매니저 척척이와의 면담시간에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매우 하기 힘든 이야기를 해야만 해. 사실 내가 얼마 전에 다른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았거든, 그래서 I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담백하게 이야기했지만 듣기에 따라 왠지 비겁하게 들리는 표현이었다. 회사를 떠나려는 것은 본인 의지였으면서, 마치 다른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으니 말이다. 척척이는 내 생각보다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잘 잇지 못했다. 그동안 팀을 떠났던 많은 연구원들이 있었기에 충분히 익숙할 텐데.



하지만, 그 때는 나도 매니저도 알지 못했다. 내가 그의 팀을 떠나는 마지막 팀원이 될 줄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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