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걸음>, 빈센트 반 고흐
"오빠, 뒤집었어!"
아내는 5개월 된 딸아이가 뒤집기에 성공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딸아이의 소식을 듣고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아내는 육아 휴직 중이라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딸이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딸아이의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했으리라. 자라나면서 할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둘씩 늘어나니 아이도 '인생은 한번 살만 하구나'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이가 무언가를 처음 경험한 순간인데, 아빠가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가정을 지킬 의무가 있는 가장이잖아. 그러니 심야까지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변명일 것이다. 우리 딸이 성장하는 순간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너무나 황금 같은 소중한 시간이니까. 작은 손가락, 발가락을 지니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오늘 이 순간만 유효하니까. 오죽하면 모든 부모들이 아이가 자라는 것이 아깝다고 할까.
그래서 아이의 '처음'을 함께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처음으로 뒤집던 아이의 모습, 처음으로 이유식을 맛본 아이의 표정, 처음으로 배밀이를 하고 기던 아이의 모습, 처음으로 허리를 세워 앉고, 무언가에 기대 일어서고, 마침내 처음으로 걸음마를 뗀 순간의 아이의 발걸음. 그 작은 순간 하나하나가 부모의 마음에 새겨지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벌써 놓쳐버린 아이의 첫 순간들이 꽤 많았다.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착한 우리 딸은 이런 아빠를 위해 언제나 친절하게 리플레이를 해주었다. 퇴근한 아빠 앞에서 낮동안 터득한 여러 가지 기술을 화려하게 다시 선보였다. 딸은 마치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거 봐 아빠. 나 설 수 있어!"
"아빠. 나 드디어 걸을 수 있어! 이것 봐줘!"
그러면 아빠는 연신 '오구오구 우리 딸!'이라고 박수치며 환호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걸음마를 떼던 아이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얼마나 가슴 뭉클하던 순간이었던지. 그때와 똑같은 감동을 주는 그림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첫걸음>이라는 그림이다. 누군가의 부모라면 단박에 감정이 이입되는 그림이 아닐까? 아빠는 아이를 향해 크게 두 팔을 벌리고 있고, 아이도 이런 아빠에게 자그마한 팔을 뻗고 있다. 아이는 걷는 것이 아직 서툴다. 이제 막 세상에 발걸음을 옮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한다. 언제든 다시 넘어질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런 아이를 뒤에서 꼭 잡아주고 있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을 건다. "자, 아빠에게 가보렴. 아까 엄마랑 함께 걷던 모습 아빠한테도 보여줘 봐" 아이의 첫걸음을 보게 된 엄마는 이 기쁜 소식을 아빠에게 알려주기 위해 아이를 안고 밭에서 일하는 아빠에게 달려간 것이다. 밭에서 열심히 땅을 경작하던 아빠는 가족이 나타나자 손에 들고 있던 삽을 내팽개친다. 그리고 환한 웃음으로 두 팔을 벌려 딸을 맞아준다. "오구오구 우리 딸!"이라면서. 늦봄의 햇살은 이 사랑스러운 가족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푸르른 나뭇잎과 풀잎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 듯 서로를 감싸고 있다.
고흐가 생 레미의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무렵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동생 테오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흐에게 테오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세상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래서 테오의 아이는 곧 자신의 아이였다. 부모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고흐는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가족의 따듯한 모습이 담은 원작을 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수소문해 밀레의 <첫걸음>을 찍은 흑백 사진을 구하고, 자신만의 색채를 덧입여 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냈다. 그렇게 동생 부부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조카에 대한 사랑을 완성한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한 번도 친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했던 고흐였지만 이렇게 가족애가 물씬 느껴지는 그림을 남긴 것을 보면, '그는 사람을 향한 따듯함을 늘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정신병과 싸움을 벌이며 괴이한 행동으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곤 했지만, 그의 마음에 남은 사랑의 불꽃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고흐는 우울과 절망감에 그림을 그려냈지만 정작 화폭에 남은 것은 기쁨과 희망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남아있다.
딸의 <첫걸음>을 아내가 촬영한 영상을 통해 보았다. 첫걸음은 그렇게 내가 놓쳐버린 딸아이의 '처음'중 하나이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딸에게 또 다른 '처음'들이 무수히 찾아올 것이다. 처음으로 말문을 열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유치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겠지. 그렇게 앞으로 찾아올 딸아이의 새로운 '처음'을 가능하면 함께 있어주고 싶다. 그리고 "어땠어?" 하고 말을 걸어 주고 싶다.
요즘 딸은 틈만 나면 '아빠! 아빠!'를 부르짖곤 한다 (아빠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리 불러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어찌나 그 목소리가 참 다정한지,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그렇게 아이는 아빠를 감동시키며 자라고 아빠도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앞으로 딸아이의 처음을 곁에서 지켜주고 싶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