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그리는 르누아르>, 알베르 앙드레
결혼 전 그림을 취미로 한 적이 있다. 집 한구석을 간이 아틀리에로 차리고 직접 유화나 수채화를 그리곤 했다. 그런데 미술이라는 것은 보기보다 노동 집약적인 활동이라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바로 다른 취미로 갈아탔다. 미혼 때는 이것저것 취미생활을 해보고 인생의 즐거움을 찾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던 일이었다. 육아를 하는 가장이 취미라니,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내겐 숨길수없는 드로잉 본능이 있어 가끔씩 그림을 그리곤 한다. 붓 대신 스타일러스 펜을 들지만 말이다. 요즘은 좋은 페인팅 앱들이 많아 이를 잘 활용하면 유화 한 장을 손쉽게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억눌러왔던 내 창작욕구가 다시 활활 타오른다. 내 작품 활동에 예술적 영감을 주는 비너스는 바로 우리 딸이다. 풍만한 볼, 유려한 곡선의 작은 팔다리, 해맑은 미소를 가진 딸은 최고의 모델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모델료는 무료다.
부모들은 이렇게 아이의 모습을 가능한 많은 그림으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남기곤 한다. 아이의 시간은 남겨 놓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순간을 언제든 꺼내 추억하기 위해서다. 가끔씩 딸 아이가 영아일 때 찍어놓은 영상을 볼 때면 '아니 우리 애가 저런 시절이 있었어?'라며 깜짝 놀라곤 한다. 아이와의 시간은 함께일 때는 알지 못하지만 가끔씩 돌아보면 무척이나 빠르게 흘러가버린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 였나보다. 자신의 가족을 틈만 나면 그리던 프랑스 화가가 있었다.
평생 한 여인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던 가정적인 남자, 바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 Auguste Renoir)이다.
가정적인 화가라니 왠지 생소하게 느껴진다. 본디 화가라면 모델이었던 여인들과 염문도 뿌리고, 결혼도 여러 번 해주는 그런 분들 아니던가. 그래서, 평범하게 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르누아르가 오히려 특별해 보인다.
르누아르가 더 특별해 보이는 그림이 있다.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가족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는 모습을 담은 그림, 르누아르의 가족에 대한 마음이 참 정겹게 다가오는 액자 속의 액자 같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또 다른 화가인 알베르 앙드레(Albert Andre)가 그렸다. 알베르는 르누아르보다 26살이나 어렸지만 그와 격의 없이 생각을 나누던 절친이었다. 그는 르누아르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초상화를 그려 주곤 했다.
이 그림을 2009년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르누아르전’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기에 전시 동선의 끝자락에 있었다. 그럼에도 르누아르의 그림들 못지않은 감동을 받았다. 가족을 향한 르누아르의 따듯한 시선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르누아르는 작업실 이젤 앞에 구부정히 앉아 가족들을 스케치하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아마도 보모였던 가브리엘일 것이다. 가브리엘 옆에 서있는 아이는 둘째 아들 클로드이며, 가브리엘이 안고 있는 갓난아이는 아직 돌이 안 지난 마지막 아들 쟝이다. 쟝이 자그마한 손을 아빠를 향해 뻗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 귀엽기 그지없다. 그 옆의 여인은 남편을 평생 사랑했던 아내 알린 샤리고다.
르누아르의 나이는 이때가 이미 예순이었고 류마티스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붓을 묶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과 가족을 향한 마음은 그가 붓을 든 열세 살 이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말이다. 이 그림에서는 가족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구부정한 르누아르의 뒷모습만 보이지만, 아마 얼굴엔 사랑스럽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을까. 아이와 아내를 바라 보면서 말이다.
르누아르의 초상화를 보면 얼핏 꼬장꼬장해 보이는 마른 얼굴과 흰 수염의 할아버지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따듯하고 다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쏟아지는 햇살을 그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빛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의 모든 그림에서는 따듯함이 느껴진다. 나무, 숲, 사람을 채색하고 그 위에 올린 빛에서 느껴지는 온기 말이다. 그가 의도했던 것처럼, 그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곳을 걷고 싶어 지고, 그가 그린 아이와 여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껴앉고 싶어진다. 특히 그가 그린 데생은 더 좋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린 그림이니까. 흰 종이에 스케치한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사랑이었고 행복이었다.
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들도 딸과 함께 자랄 것 같다는, 육아를 하며 느꼈던 내 감정들도 이렇게 글이 되어 딸과 함께 자랄 것 같다는 생각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부쩍 커가는 딸을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났을 때도 따듯하게 맞아주고 싶다. 르누아르가 가족에게 향했던 그 따듯한 사랑의 시선을 담아서 말이다. 그리고 한마디 해야겠다. 아빠랑 영원히 살 수는 없겠지만, 대신 너무 빨리 자라지는 말라고.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