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였다니 매우 놀랐어. 하지만 훌륭해(great)!"
동료 S가 내가 저장소에 올린 코드에 댓글을 남겼다. 내가 단 두 줄의 코드 수정으로 시스템 오동작을 잡아내자 S가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훌륭하다'라는 말을 들을 일은 아니었다. 아주 사소하고 간단한 문제였다. 애초에 내가 짠 코드에 숨어있는 버그였으니 당연히 내가 고쳐야 할 일이기도 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그레잇'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왠지 묘했다. 갑자기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말할 때나, 들을 때나 영어로는 이런 칭찬의 감탄사를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회의 시 동료에게 '훌륭해!', '멋져!', '환상적이야!', '간지 나!'와 같이 말했으면, 순간 갑분싸될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미국에서 원어민 동료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Great, Awesome, Fantastic, Cool과 같은 말을 아주 쉽게 주고받곤 한다. 주간 회의 시 팀원들이 돌아가며 업무 진행 사항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 아이디어를 생각해 메일로 공유할 때, 기술 세미나시 발표할 때, 듣고 있는 누군가는 거의 반사적으로 이런 감탄사를 연발한다. 하도 자주 들으니 이제는 별 의미 없는 관용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도 영미권의 문화적 특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장려되는 문화다. 감탄사가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적 특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보니, 짧고, 간단하고 직접적인 어휘가 잘 발달해 온 것이다.
미국에 온 지 벌써 8년 차에 접어들지만 이러한 낯 뜨거운(?) 감탄사는 여전히 내 입에서는 잘 튀어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한국식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데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나고 자라면서 내게 이식된 사상, 가치관, 문화, 사고방식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업무상 필요해 내 입에서 영어를 내뱉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한국어로 생각한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머릿속에 일종의 '필터'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왠지 주저한다. '이래도 되나' 싶어 생각을 머릿속 필터에서 한번 거르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검열인 셈인데, 그것이 '미덕'임을 강요받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곡하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이의 말에 대해서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의도가 무엇일까?' '본심일까?' '가식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필터에서 걸러지기 전의 생각과 진심을 추측하려는 것이다. 내가 내 패를 다 까지 않았으니, 당연히 상대방에게도 숨겨진 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걸러진 말들로 대화해도 어느샌가 서로가 서로의 의중을 파악한다. 상황, 암시, 눈빛, 제스처와 같은 비언어적 표현들로 의미를 포착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입을 모아 '눈치 없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미국에서 살다 보면 피곤해질 때가 많다. 동료, 매니저, 현지 친구로부터 조금은 직설적인 표현을 들으면 그 '말(Language)'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뭐야. 지금 나에게 불만 있는 거야?' '무슨 의도지?' '내가 뭐 잘못했나?' 심지어 '나 회사에서 곧 잘리는 거야?'라며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다.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상황, 암시, 눈빛, 제스처로 의도를 파악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애초에 상대방에게는 '말'로 전달한 내용 이외에 아무런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What do you mean?'이라고 물어볼 만도 하지만 이것도 또 잘 안된다. '물어도 되나?' 싶은 생각에 머릿속 필터에서 생각을 또 한 번 거르기 때문이다.
현재 회사로 이직한 지 몇 달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1:1 미팅에서 매니저가 "혹시 옆팀으로 옮기는 것 관심 있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같은 그룹에 새롭게 팀이 조직되어, 새롭게 사람을 채용하거나 주변 팀과 인력조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업무는 유사하지만 차세대 제품에 집중하는 약간은 미래지향적 연구를 하게 될 곳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리서치를 하던 터라 무척이나 관심이 갔다.
그런데 그놈의 한국인 종특이 또 한 번 발동했다. '매니저가 나에게 물어보는 의도가 뭐지?', '팀에 대한 애정을 시험하나?', '내가 얼씨구나 그렇다고 대답하면, 팀이나 자신에게 불만이 있었다고 생각할까?', '팀이나 매니저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5초간 오만가지 생각회로를 돌리며, 내 생각을 필터에 몇 번이고 통과시켰다.
"관심 있긴 한데... 현재 하는 일도 나쁘지 않고, 내가 우리 팀에서 빠지면 그만큼 업무 공백이 발생할 테고 팀이 힘들어지지 않겠어?"
매니저는 나에게서 팀을 배려하는 듯한 대답이 나오리라 예상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어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라고 했다. '아차' 싶었던 나는 궁색하게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런데 관심 있긴 하네..."
필터에 통과되기 전 생각은 '당장이라고 가고 싶다'였지만, 왠지 '그렇게 직접적으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라는 자기 검열을 한 것이다. 우습게도 그때까지 나는 내가 이렇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그가 내 본심을 알아차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 달 뒤 그룹 내 조직 개편이 단행되었을 때, 옆팀으로 가는 팀원 명단에는 내가 없었다. 매니저에게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단순히 '옆팀으로 옮기고 싶은 사람'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처럼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이 말에 함의를 담고 맥락을 통해 진의를 파악하는 고맥락(High-Context) 문화와, 미국과 같이 말 자체가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인 저맥락(Low-Context) 문화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국가별로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문화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원활한 소통'의 측면에서는 후자가 낫지 않나 싶다. 쓸데없는 오해, 함의 추론의 에너지 소모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계가 발달하고, 겸손이 미덕인 문화권에서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면 '정 맞는 모난 돌' 취급받기 딱 십상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개인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것이고, 결국 조직과.사회에도 건전함을 가져다 주지않을까? 직접적인 말보다 암시나 분위기로의 의미를 전달하면 의사소통도 불명확해진다. 특히 새로운 사람이나 외부인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이 방향으로 하세요'라는 의미로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잘 모르는 사람은 정말 자유롭게 결정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괜찮지 않거나 심지어 화가 나 있는 경우도 흔하다. 팀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자"라고 제안하지 않고 돌려 말하면,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느라 시간만 지체된다. 대인관계 유지에도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체면이 중시되어 솔직한 감정표현이 자제되기 때문에 싫어도 "예"라고 말하다 보니 필요 이상의 배려를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마음속으로 백만 번이고 머릿속 필터를 걷어 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정서적인 억압을 받다보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퇴근 후 샤워를 하면서나 침대에 누워 자려고 할 때, 낮에 동료, 친구,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지 못한 것이 불현듯 생각나 이불킥을 반복한다. 내 안에 '후회'라는 감정이 앙금으로 남아 야금야금 나를 잠식한다. 그리곤 꼭 하는 행동이 애먼 아내나 남편에게 하는 화풀이다. "그걸 말을 꼭 해야지 알아?"라며. 그렇다. 우리는 말을 해야 아는 존재들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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