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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Sep 24. 2021

핀란드에서 행복한 지 묻는다면

핀란드 오울루에서 읽은 그림책

<Where Happiness Begins> (Eva Eland, 2020)



표지에는 행사장 풍선 인형처럼 생긴 '행복이'와 한 아이가 손을 잡고 있다. 아이가 '행복이'의 손을 잡아 어딘가로 끄는 모양새다. "같이 갈까?"(아이), "그럴까?"(행복이). '행복이'는 아이를 따라 가본다.


이 책의 첫 문장은 말한다. "Are you looking for happiness?"(행복을 찾고 있나요?) 그 옆의 그림으로는 아이가 높은 찬장에 올려진 'Happiness'라는 항아리에 손을 뻗는 모습이 나온다. Happiness 주변으로는 이런 단어들이 적힌 그릇과 병들도 보인다. 


사랑, 목표, 공유, 친구와 가족, 사소한 것들, 유쾌한 농담, 햇살, 초콜릿, 포옹, 무언가를 만드는 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 갓 구운 파이의 향기. 이름이 적히지 않은 그릇이나 병도 있다. 거기엔 어떤 단어를 적어 넣으면 멋질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행복이'의 이름은 '행복'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작가는 '행복이'가 가진 많은 이름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따스함'일 거라 생각한 듯하다. 선물 같이 찾아오는 '행복이', '나'와 같이 아이스크림을 소소하게 즐기는 친구 '행복이', 동화 같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행복이'는 모두 따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 우리 행복하자.'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가 전하고 싶은 말은 거기서 몇 걸음쯤 더 걸어 간 곳에 있었다. 조금 더 살펴보자.


어딘가에 숨어 버려서 도무지 찾을 수 없는 '행복이'도 있다. 반면 누군가에게 '행복이'는 어딜 가도 곁에 있는 존재이다. "행복을 찾고 있나요?" 이 질문에 어쩌면 후자의 누군가는 의아할 것이다. 마치 옷을 이미 입고 있는 사람에게 "옷을 찾고 있나요?"라고 물으면 "무슨 뜻이지?" 할 것처럼.


그럼 '행복이'는 사람을 가리는 걸까?


작가는 말한다. '행복이'를 알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행복이'라 적힌 물건들을 사서 모으고 어쩌다 찾은 '행복이'가 혹여 달아날까 애면글면 하고. 이 모든 애씀이 무색하게 '행복이'는 자기만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행복이'는 사람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노라고. 때로 노래를 부르고 때로 사색을 하는 '행복이'의 여정에 누군가 등장해 '행복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행복이'는 그와 나란히 걷는다. 그뿐인 것이다.


'행복이'와 같이 걷고 싶었던 아이는 두터운 옷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 라이트를 든 채 어두운 숲길에 발을 딛는다. 내가 감히 '행복이'와 걸을 수 있을까, 먼 미래를 향한 걱정스러운 마음. '행복이'를 만나기도 전에 길을 잃는 것은 아닐까, 가까운 미래를 향한 두려운 마음. 모두 안고서 말이다.


내가 그랬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오는 길에. 이곳에 와서 매일 숲으로 걷던 그 길에.


숲의 끝에서 겉옷을 한 줌 벗고 가방도 잠시 내려놓은 아이는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마침내 '행복이'를 마주한다. 'Happiness will be there, waiting.' '행복이'와 아이는 지긋이 눈을 감고 두 팔을 포개어 서로를 안아준다.


"오랜 날부터 널 기다리고 있었어. 무사히 건너와줘서 고마워." '행복이'가 이렇게 말한다면, 울지않을 도리가 있을까. 무사히, 무사히.


'행복이'와 아이가 서로를 감싼 그 자리가 이 동화의 끝이 아니다. '행복이'는 늘, 어떤 상황에서도 내 곁에 있으니 잘 둘러보라는 메시지 아니고, '행복이'를 찾아나서서 마침내 만났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하는 메시지도 아니고.


'행복이'는 아이보다 서너걸음쯤 앞선 채 아이에게 눈짓한다. 따라오라고. '행복이'를 따라 다시 걸으며 아이는 수많은 얼굴과 색과 몸짓을 마주한다. 가족, 친구, 내가 사랑하는 모든 유무형의 것들. 아이는 종종 '행복이'가 이끌지 않은 길을 혼자 가보기도 한다. 그곳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비록 그 과정이 순탄지 않더라도 결국 '행복이'는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 누구에게나 모습을 드러내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행복이'를 만난 그 순간의 감격에서 잠시, 때로는 끝끝내 머문다. 그 다음 걸음을 디뎌 보면 그 다음의 의미가, 그 다음의 '삶'이 있다는 걸 모르거나 모른 척 한 채로.


한 걸음 디뎌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한 걸음 디뎌 본 세상에는 물론, 여전히, 사랑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나의 '영구적 행복'을 약속할 수 없음도 안다. 내가 알 수 없는 감정, 알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자책하게 하고 후회하게 한다. 원망하게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행복이'를 만난 그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길을 나서 보라고 말한다. 작가도, 나도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때부터는 행복이 날 따라올 거니까.


용기 낸 한 걸음, 그 걸음자락에서 만난 사랑, 사랑만큼 값진 나의 성장. 나의 여정을 '행복이'는 가만히 지켜보며 자신의 언어로 다시 한번 말할 테니까. 


"오랜 날부터 널 기다리고 있었어. 무사히 건너와줘서 고마워."





무사히, 무사히 건너 이곳에 왔다. '행복이'를 만났다. 도착 후 막바지 여름날에, '행복이'와 이곳에서 걸은 숲길들이 짙은 초록과 눈부신 햇살을 데리고 매일밤 나의 등을 쓸어준다. 


이제 두 달이 되어 가는 지금, '행복이'를 만나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외롭고 불쑥 눈물이 나는 어떤 순간에 '행복이'의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고맙다는 그 목소리를.


내가 열어 젖힌 '그 다음의 삶'을 다름 아닌 내가 살아내기 위해.


행복은 '상태'가 아닐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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