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신논현역입니다. 내리실 곳은…
9호선 급행열차는 테헤란로로 접근하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한줄기 빛이다. 신논현-선정릉-봉은사-종합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강남의 정차역은 각각 역삼, 선릉, 삼성, 잠실로 연결되며 아주 잠깐의 환승으로 테헤란로와 잠실 업무지구에 도달할 수 있다. 겉으론 알 수 없지만 아침의 9호선 급행엔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아는 IT기업이나 스타트업의 직원들이 많다. 오전 9시는 10시 출근이나 자율출근이 가능한 직장인들이 서울의 서쪽, 혹은 그 너머에서 강남으로 향하는 시간대다.
지훈은 9호선 급행의 기점 바로 다음인 마곡나루역에 산다. 열차는 이미 그보다 더 멀리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김포나 인천에서 강남으로 향하는 사람들. 이 열차 한 칸만 해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토론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가득하다. 당연히 앉을자리는 없다. 하지만 가운데쯤 설 수 있는 차선의 선택지가 있다. 강남에 가까워질수록 열차 출입구 쪽부터 혼잡해지기 때문에 가운데는 그 영향을 가장 마지막에 받는다. 출입구 쪽은 방금 탄사람, 다음에 내릴 사람, 그다음에 내릴 사람, 다음다음다음에 내릴 사람까지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다.
열차는 계속해서 사람을 삼킨다. 9호선 급행은 2호선과 당산역, 5호선과 여의도역, 1호선과 노량진역에서 만난다. 그럴 때마다 열차는 사람을 퉤! 뱉고 우와아아ㅏ앙 삼킨다. 강남에 가까워지는 고속터미널역까지 사람들은 들어차기만 한다. 출입구 쪽이 포화상태가 되면 조금씩 가운데로 밀고 들어온다. 그때쯤 가운데에 선 사람들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조금씩 밀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옆사람의 스마트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폰을 흘깃하는 것이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타이트한 열차 환경은 눈을 돌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고속터미널역이다. 내게 허락된 시야는 그의 스마트폰과 열차 천장뿐. 우연히 눈에 들어온 화면 때문에라도 더 눈을 뗄 수 없었다.
굳은 표정의 그가 들고 있는 폰 화면에는 슬랙이 켜져 있었고, [마케팅실 회식 자리배치도]라는 제목과 함께 각 자리에 닉네임이 적힌 하얀 바탕의 표가 이미지로 전송되어 있었다. 메시지에는 장소와 시간 등이 공지된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듯 입술에 침을 한번 묻히고는 자리배치도 이미지를 클릭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던 자리배치도의 닉네임들이 선명해졌다. 두 손가락으로 이미지를 잡고 본인의 자리를 찾는 듯 확대, 확대, 축소, 축소, 확대, 축소. 그러고 같은 곳을 한 번 더 확대했다가 축소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가 갑자기 슬랙화면을 위로 스와이프하더니 백그라운드에 있던 다른 앱을 열었다. 앱시작 로딩화면이 등장하며 서비스의 이름을 크게 띄웠다. 원티드. 스타트업과 IT기업들의 채용공고가 주로 올라오는 서비스였다. 잠시 홈 화면을 보더니 망설임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어딘가로 진입했다. [저장한 채용공고]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곳곳에서 “어, 어.” 소리가 났다. 누군가 가운데 사람들이 문쪽보다 훨씬 평화롭게 있는 것에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훈은 최초로 민 사람을 째려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바짝 붙어있었다. 지훈은 출근 시간의 9호선 급행열차가 인류애를 상실하게 만드는 건 누군가로부터 떠밀려 강제로 원치 않는 이동을 해야 하는 순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니 그 스마트폰 화면이 보였다.
그는 몇 초 만에 한 채용공고를 본 뒤 다시 앱을 전환했다. 이번엔 붉은색 테마의 앱이 켜지기 시작했다. ‘블라인드’였다. 직장인들이 기업의 리뷰를 익명으로 남길 수 있는 커뮤니티 서비스다. 손놀림이 너무 빨라 어떤 회사를 검색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훈이 잠시 눈을 돌린 사이 그는 여러 회사의 리뷰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몇 분간의 열정적인 탐색 뒤에 그는 다시 슬랙으로 돌아갔다.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다 [마케팅실 회식 자리배치도] 메시지에 체크 이모지를 남겼다.
“신논현, 신논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그가 내렸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그가 타고 있던 2-2 열차 앞은 환승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이었다. 이 열차의 그 누구보다 빠른 환승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