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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badger Dec 30. 2020

저 결혼 대신 서울 갈래요 2

30대 중반 반항기 2


저 결혼 대신 서울 갈래요 1 보러가기


폭탄 준비하기


자취를 시작한 후에는 나에게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스스로에 대해 미덥지 못하게 여기던 마음은 집에 관련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조금씩 사라졌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다는 데 대한 묘한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차오른 자신감 때문인지, 큰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상경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기숙사에 계속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혼자서는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상경은 깊은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 내가 짊어질 책임의 무게까지 모두 감수할 각오는 되어있었다. 그러나 부모님께 알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 문제에서 부모님을 완전히 제외해 둘 수는 없었다. 만약 부모님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가는 우리 사이는 거제에서 서울로 가는 거리만큼 멀어질 것은 뻔했다.


나는 이번에도 통보 형식을 택했다. 기숙사 문제를 한번 겪고 나서, 책임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부모님의 생각이 내 의견과 반대되더라도 나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동생도 내 편이었다. 서울에서 대학, 대학원 생활을 한 동생은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가야 한다’며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해보라며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든든한 아군까지 얻었으므로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는 동생이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오는 유일한 날, 설 마지막 날에 부모님께 상경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집 며느리인 엄마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설 마지막을 선택한 것이 실책이었다.) 설날이 오기 전에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종이에 부모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예상 질문을 적고, 다음에 답을 적었다.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내가 서울에 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적어 내려가는 질문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 답을 써 내려갔다. 그러다 한 가지 질문에 막혔다.


“결혼은?”


결혼에 대한 질문은 피해 갈 수 없으리라 짐작을 했다. 진로를 바꾸겠다는데 무슨 결혼 타령인지 싶었지만, 부모님 입장은 달랐다. 아빠는 내년에 퇴직을 할 나이가 되셨고, 엄마 친구분들은 벌써 할머니가 되어 손주 자랑이었다. 괜찮은 남자만 있다면 부모님은 내 손과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당장이라도 예식장을 고를 기세였다. 부모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을 나의 미래와 전망 같은 것들에 설득력을 더하려면 적어도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적당히 수긍이 될 만한 대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혼에 관한 문제는 설날이 다가올 때까지 답이 이렇게 바뀌었다, 저렇게 바뀌었다 했다.


폭탄 터뜨리기


결전의 날은 금방 다가왔다. 설 마지막 날 모든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고, 집에 우리 가족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 나 할 말이 있는데……”


설날 손님맞이를 성공적으로 끝낸 엄마의 입가에는 그때까지 미소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남은 미소를 모두 지우고 분노로 채워 넣었다.


“엄마, 나 회사 그만두고 서울로 가려고”


엄마는 한동안 이해를 하지 못하다가 목소리를 점차 높여갔다. 너무 많고 개인적인 내용이라 여기에 다 나열하진 못하지만, 그때 나를 가장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엄마의 높아진 목소리를 듣고 아빠도 달려왔다.


“왜 하필 지금이고?”


이런 일을 다시 한번 겪게 된다면, 나는 절대 열심히 대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내가 무엇을 준비해도 부모님을 설득시키지는 못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바보 같은 계획 때문에 명절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누가 울었냐고? 당연히 내가 울었다. 나는 부모님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몇 달을 준비했다. 동생과 말을 맞추기 위해 계속 전화를 해대는 바람에 동생이 지겨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 계획은 처참히 망가졌다. 부모님의 머릿속에는 내가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해서 서울로 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서울로 갈 수 있는 이유가 못 되었다. 그런데 34살 노처녀가 퇴사를 하고 서울로 가겠다고 했으니, 부모님 귀에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회사 생활의 어려움,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부족한 비전 등 내가 서울로 가야만 하는 그 어떤 이유에도 부모님은 설득되지 않았다. 결국 결혼에 관해서 준비한 나의 대답은 꺼내지도 못하고 끝이 났다. 부모님이 상경을 반대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화를 냄으로써 나를 제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상경에 대해서 부모님과 마주 앉아 물어보는 질문에 내가 차근차근 답을 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30살 넘는 딸에게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던 부모님은 대신 나를 말로 매질했다. 서울로 가서 누구라도 만나보겠노라고 결혼 얘기에 맞받아칠 준비도 되어 있었는데 …… 그때 나는 죄인으로써 눈물에 목이 막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결과


나는 부모님 댁을 나와서 거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한 말이 계속 생각났다. 왜 하필 지금일까, 나는 항상 왜 늦을까. 나는 무언가를 한 번에 해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중간고사는 못 쳤다.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도 그랬고, 운전면허도 그랬다. 그렇게 나는 내 적성도 한 번에 찾지 못하고 30대가 넘어서야 나와 맞지 않는 길 중간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다시 찾은 길을 따라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미 내린 결정을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얼떨결에 책임에 대한 확답을 했던 기숙사 때와는 다르게, 이미 마음속으로 서울로 떠날 짐 속에 책임도 넣어 두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부모님께 전화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추스르는 것부터가 급했다. 설날에 부모님께 들었던 말 때문에 설날 이후로 나는 밤마다 울고 있었다. 이럴 때는 혼자 지낼 수 있는 자취방이 좋지 않았다. 퇴근 후, 고요한 방에 혼자 있을 때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림 그릴 도구만 챙겨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바닥끝까지 떨어진 자존감과 부모님을 향한 실망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허가받지 못한 독립

“연락이 왜 이리 없니, 서울 가기 전에 자주 와야지”


부모님은 나의 상경 통보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이러다가 훌쩍 서울로 가버릴 것 같았는지 집으로 오라고 먼저 손 내밀어 주셨다. 사실 나도 그랬다. 자존감, 실망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거제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부모님 댁이 서울보다 더 가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서 한풀 꺾인 엄마의 목소리에 용기 내어 부모님 댁을 방문했고, 우리 가족은(동생을 제외한) 감정이 약간 식은 상태로 나의 상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대화를 통해 만족스러운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는 끝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의 대화를 통해 나와 부모님이 원하는 미래가 다르다는 것을 서로가 이해는 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나는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일말의 도움도 주고받지 않겠다.’는 말에 동의하고 타협했다. 부모님은 나를 지지할 수 없었고, 나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재정적인 지원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정신적인 지지는 내가 언제나 필요했고 원해 왔던 것이다. 억지스럽긴 해도 기숙사를 나와 자취방 계약서를 쓸 때, 두 분은 나를 도와주셨다. 하지만 이번엔 완전히 혼자가 되었고, 마음은 만신창이였다. 이 것이 완전한 독립일까? 분명 내 삶의 방향키를 이제 온전히 넘겨받은 것 같은데, 속 시원한 마음은 보다는 속상한 마음이 컸다. 이번 일로 나와 부모님은 서로에게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울에 별문제 없이 올라가는 것 밖에 없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 홀로 해야 할 일들만 한 가득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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