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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badger Jul 14. 2021

좋아하는 색의 발견

회사에서는 내 취향은 별로 중요사항이 아니었다. 직급에 따라 취향의 중요도가 정해졌고, 나는 주로 따라야하는 편이었다. 작은 사무실에 은근히 정해져있던 규율도 식사 메뉴도 억지로 상사의 입맛에 맞춰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취향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반대편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퇴사에 있어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결정에 많이 정상참작되었다.


하지만 퇴사를 하고 나서야 내 취향이 결코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상사들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했을 뿐이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된 결정적으로 알게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림을 그릴때였다. 손풀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내 그림에 색을 입힐때, 나는 어떤 색을 선택해야할지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그려오던 그림은 주로 따라그리는 그림이 많았고 내 취향이 반영된 그림은 많이 없었다는걸 그때서야 알게되었다. 따라그린 그림은 모두가 흉내낼 수 있는 ‘모작’일뿐 나의 일러스트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심각성을 느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상업적이긴 하지만 내 취향과 스타일이 확실할수록 인정받고 인기도 많아지는 직업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하려면 누구보다 나를 잘 알아야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느끼는 것들을 그림으로 잘 풀어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의 취향에 대해 아는 것은 ‘상사의 그 것 말고 다른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4월부터 나는 서울생활 적응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먼저 내가 좋아하는 색을 찾지 못하면 그림을 그릴 수 없었기때문에 색을 찾는데 집중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무슨 색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노랑, 초록, 파랑이라고 대답해도 되지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서 그렇게 대답하면 안되는 일이었다.

디지털로 표현 할 수 있는 16,777,216개의 색 코드 중에 정확히 몇가지를 집어내야 했다. 다행히 최근에 겨우 2가지를 찾을 수 있었는다. 바로  #ffbb00, #ebb2af 이다.

#ffbb00은 생생한 주황색 톤으로 정의되어있다. 신선한 노른자 같은 이 색은 그래도 좀 쉽게 찾은 편이다. 서울로 올라와 짐을 정리할때 내 물건 중에 유독 노르스름한 색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물건들은 약간씩 다른 노랑이었지만 톤은 유사했다. 내가 찾는 첫번째 색은 ‘노랑’이었다. 시원한 레몬노랑보다 더 진하고 금색보다는 맑은 노랑색. 딥 메리골드, 써니데이, 레이저 빔 톤이라고 불리는 진한 노랑이다. 이 색은 밝아서 내 그림을 밝게 만들어준다. 순수예술보다 약간 상업화 되어있는 일러스트 분야에서는 어두운 그림을 그리면 안되는데 #ffbb00은 채도와 명도가 모두 높은색으로 밝고 강렬한 색이라 마음에 들었다. 내 그림을 호텔로 치환하면 프론트 데스크의 ‘미소 띈 얼굴’ 같은 부분을 담당하는 색이다.


 #ebb2af는 창백한 빨강 톤으로 정의 된다.‘창백한’이라고 말이 붙어서 그렇지 밝은 핑크는 아니다. 오히려 약간 탁한 핑크색이라 은은하고 세련되보인다. 피부색 농도와 비슷해서 어떤 색을 붙여도 튀지 않고 잘 어울려서 내 그림의 유니폼 같은 부분을 담당한다. 사실 이 색이 나의 색으로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2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입시때 배웠던 규율때문이었고, 하나는 나의 이상한 고집때문이었다. 입시 수채화를 배우면 보통 흰색과 검정색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규율부터 배웠다. 그래서 보통 파스텔 톤을 표현 할 때는 원색에 물을 많이 타서 연하게 칠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흰색이 섞인 것은 색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 파스텔 톤의 대표주자인 핑크를 색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또, ‘여자애라 핑크색을 좋아하는구나’라는 말을 듣고싶지 않았던 나의 고집도 있었다. 나의 고정관념 속에 ‘여자색’은 핑크였고, 페미니즘이 뜨는 세상에 많은 색중에 하필 ‘여성성’과 관련있는 핑크를 좋아하는 것은 왠지 ‘나는 여자입니다.’라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로즈골드 휴대폰과 아이패드, 연분홍 노트와 카드지갑 등의 아이러니로 무너지고 있었고 마침내 책 ‘나쁜 페미니스트’ 속에 핑크색을 좋아한다는 저자의 고백과 진한 핑크색 책 커버를 통해 부셔졌다. 그러고는 봇물이라도 터진것처럼 그림에도 여기저기 핑크를 써대기 시작해서 핑크색 새벽, 핑크색 도시, 핑크색 배경을 만들어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보통 자기가 쓰는 색감을 뽑아내서 팔레트를 가득 채워두고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나만의 색감으로 그림이 완성된다. 하지만 아직 내 팔레트에는 이 두가지 색을 제외한 나머지 색들은 모두 임시로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식이다. 어서 빨리 16,777,216개의 색 중에 내 그림을 채워 나의 취향과 개성이 되어줄 색을 발견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가 좋아하는 색들로 망설임 없이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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