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디자이너가 상경한 이유
'경력직 디자이너는 이직이 잘 된다'는 말은 적어도 지방에서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구직사이트에서 경남지역 공고를 보면 ‘사무 보조해주실 참신한 웹디자이너 모십니다’ 같이 디자인이 인질로 잡혀있는 듯한 공고가 대부분이었고, 연봉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좀 마음에 드는 일자리들은 모두 서울, 경기 쪽에 몰려있고, 경남에서는 괜찮은 일자리를 찾는 것부터 '일'이 되는 느낌이었다.
바로 전 직장이었던 호텔도 아무런 수식어가 붙지 않은 ‘웹디자이너 채용’이라는 깔끔한 구인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호텔 sns 계정관리도 겸해주길 원해서 약간 실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택배나 사무보조 따위를 요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나쁘지 않은 연봉에 대기업 산하의 안정적인 회사였기 때문에 오히려 괜찮은 직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며칠 후에 기다리던 합격 문자를 받고 어려운 이직을 잘 해낸 것 같아서 좋아했다.
입사 후에는 나의 채용과정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면접관들 중에 나에게 가장 질문을 많이 하셨던 분이 새로 취임한 총지배인님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강력한 주장으로 내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총지배인님은 서울의 유명 호텔 출신이셨는데, 처음 그분이 이 곳 호텔에 왔을 때, 개관할 때 만들어놓은 고물 같은 홈페이지를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가장 먼저 홈페이지 개편과, 관리인 채용을 지시했다고 했다. 호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 예약기능도 없고, 10년 전 사진이 올라가 있는 홈페이지를 이 고상한 호텔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총지배인님은 자신의 지시로 호텔이 엄청나게 변할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가끔 복도에서 나를 마주치면 ‘바쁘지?’하고 물어보시고 실제로도 내가 매우 바쁜 줄 아셨다. 하지만 그분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는 한가했다. 내가 받은 업무의 양은 매우 적었는데, 심지어 입사 첫 주는 나보다 먼저 디자이너로 있던 분이 억지로 나누어주던 인수인계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sns를 어떻게 업무에 이용해야 하는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에게 어떤 업무를 맡겨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10년 동안 홍보 없이 호텔 운영을 잘 해왔는데 왜 쓸데없이 홈페이지를 바꾸고 sns를 관리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와 가장 비슷한 일을 하고 있던 디자이너는 내가 입사했을 당시 30대 중반으로 나보다 5살이 많았다. 그녀는 내가 입사하기 전에 전체 디자인 업무를 혼자서 담당하다가 홈페이지 관련한 부분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인수인계를 하며 슬쩍 본 그녀의 시안들은 묘하게 촌스럽고 트렌드에 맞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작업방식에 대해서는 ‘총지배인님 계시던 호텔 시안이랑 비슷하게 하면 돼요’하고 알려주는 게 다였다.
내가 만들어내는 시안은 그녀가 만든 것들과는 다르게 반짝반짝했다. 이직 전에 홈페이지를 많이 다루는 회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실력에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었다. 실제로 호텔 사람들도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시안이 예뻐졌다며 좋아해서 초반에는 의욕적으로 일했다. 사람들이 일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트렌드도 꾸준히 혼자 공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업무방식에 지쳐갔다. 내가 제안하는 일들은 다른 부서에 추가 업무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게다가 직접적인 실적으로 돌아오는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일은 대부분 하지 말자고 했고, 나는 아이디어를 내기보다 인터넷을 서핑하는 것을 더 재미있고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불안했지만 불편한 것은 없었다. 가끔 총지배인님께서 호텔 전체를 향해, 서울에 비해 다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일하는 것 같다는 타박을 들을 때만 빼면 편하고 좋았다. 호텔 고객들은 주로 한국으로 출장 오는 외국인들이 대부분이어서 내가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이 없었다. 몇 년 동안 내가 한 디자인은 제자리걸음이었고 입사 초기에 만들던 시안의 느낌들이 사라져 갔다.
내가 회사에서 연차를 쌓아나가는 만큼 디자인 트렌드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다. 입사할 때, 나에게 처음 업무를 나누어 주던 디자이너의 당시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가까워져서야 진짜 위기감을 느꼈다. 입사 때만 해도 저 사람과 나는 다른 거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 동안 바뀌지 않은 내 디자인과 3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를 체감하고 나서야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4년 만에 다시 들어가 본 구직사이트에는 웹디자이너 구인광고는 사라지고, UX, UI 디자이너를 찾는 구인 글들로 채워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UX, UI 디자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자격요건에 나와있는 프로그램들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UX, UI 디자인은 무엇일까?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인터넷 창에 검색을 하자 서울과 부산에 있는 학원정보들이 주르륵 떴다. 가까운 부산이라도 내가 있던 곳에서는 차로 1시간 넘게 걸리는 데다가, 퇴근 이후의 수업을 들으려고 해도 수업 시작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배우러 갈 수 없었다. 촌스러운 디자인 시안은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니었다.
계속 회사에 남는 것이 나의 운명인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일을 넘겨줬던 그녀는 진급 기수가 지나도록 승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진 것도 있었지만 그녀는 실력도 썩 좋지 않았던 데다가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호텔에서 방을 직접 팔거나 음식을 하지 않는 나이 많은 디자이너의 호텔 내 입지는 명확했다. 어느 순간 그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호텔도, 웹디자인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업계는 아니었다. 하나는 너무나 변화가 없고 하나는 너무 빨리 변했다. 30대 후반까지 진급 없이 버틸 자신도, 디자인 트렌드를 따라갈 자신도 없었다. 특히 웹디자인이라는 말이 구직사이트에서 찾기 어려울 지경으로 시장이 바뀌는 속도가 무서웠다. 내가 있는 호텔 말고 세상 모든 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이가 들어도 디자인보다는 덜 변덕스럽고 내가 더 잘하는 분야를 찾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몇 달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끙끙되며 괴로워하다가 더 늦기 전에 퇴사를 하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러스트에도 트렌드는 분명 있지만 내가 하는 일 중에는 그래도 가장 잘하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이 분야는 조금 더 ‘내 스타일’을 고집해도 괜찮은 분야였다.
경남에 있는 것도 포기했다. 경남에는 또 일러스트를 배울만한 곳이 없었다. 일러스트 학원은 부산에도 없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일러스트, 3차 산업에 관련된 대부분의 것을 배우기 위해선 서울로 가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서야 지방에서의 삶에 한계를 느끼고 많이 서러워졌다. 퇴사와 동시에 지방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
서울은 매력적인 도시지만 평생을 살고 싶은 곳은 아니다. 내가 평생 살고 싶은 곳은 내게 익숙한 경남이었다. 그래도 먹거리가 없는 곳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경남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가끔 내가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상 다시 경남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직도 좀 서글프다. 지방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청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경한 우리가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각자가 원하는 지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에는 모두가 ‘서울에서 살아남기’에 성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