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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Dec 29. 2021

당신이 있다, 그곳에

그곳에 있다, 당신이



2020년 11월 말, 일 년 전에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녀는 회사에서 많이 치이고 또 찢기고 너덜너덜 해진 후 오른 유학길에서 돌아왔을 때었다. 졸업 후 다시 한번 취직을 해야 했고, 코로나가 터진 2020년은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이 정말 어려웠다. 


이곳저곳 원서를 쓰고, 떨어지고, 쓰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던 중 면접에 합격했으니 실습을 하기 위해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그렇게 그녀는 집에서 한강 너머 보기만 했던 곳에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그 첫 출근일이 작년 겨울의 초입, 날이 참 춥던 월요일이었다고 한다. 



첫날 하루 종일 교육을 들으며 잔뜩 긴장해 있던 그녀에게 월요일을 마치는 마지막 일정은 실습 기간 동안 지도해줄 팀장님과 전담으로 도와줄 사수와 인사하는 것. 기다리던 방에서 하나둘 다른 지원자들이 인사를 드리기 위해 떠나고, 마지막 순서로 그녀도 팀장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방을 나섰다. 


팀장님은 면접 때 가장 깐깐하게 질문하셨던 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깐깐함과는 전혀 다르게 너무 밝은 미소와 목소리로 축하해주시며 인사를 나눴고, 떨어뜨릴 줄 알았던 분 팀에 배정된 놀라움도 잠시, 앞으로 한 달간 그녀를 맡아줄 사수를 부르셨을 때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그녀는 회사 생활을 하며 늘 아저씨 혹은 언니들하고만 일을 해왔다. 젊은 여자 선배들은 꽤 있었지만, 그 외에 대부분은 아저씨들이었지 젊은 남자 선배를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팀장님이 전화를 끊으신 후 몇 분 있다 들어온 사수는... 젊은 남자였다. 30대 초반은 넘어 보이는데, 아주 많아도 30대 중반? 결혼을 했다고 해도 믿겠지만 하지 않았다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은, 아저씨들하고만 있던 그녀에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똑똑 문을 두드리고 맞은편 의자에 앉은 선배는 단순히 젊은 남자 선배일 뿐만 아니라 순간 놀랄 만큼 훈남이었다. 회사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팀장님 방을 나와 보낸 한 시간, 휴게실이며 식당이며 매점이며 회사 곳곳을 둘러본 후 그날 퇴근길 선배는 그녀에게 "이 회사에서 소현 씨에게 가장 편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 해 소현은 결국 그 회사에 최종 합격을 했고, 해가 밝으며 입사를 했다. 그중 선배를 좀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은 몇 프로였을까... 많이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진 후 몇 년째 아무도 만나지 않던 소현은 회사에서 선배랑 우연히 마주치길 기대했고,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하고 지나쳐도 그날 하루는 마음이 온종일 푸근했다. 혹여 귀찮아하거나, 혹여 곤란한 소문이 나거나, 아니 사실은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비칠까 봐 가끔씩, 한 달에 한번, 많으면 두 번 정도만 점심을 먹자며 용기 내 물었다. 그때마다 흔쾌히 받아주던 선배는 막상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면 어딘가 조금 어두워 보이는 그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다정하지 않았다. 몇 달을 더 함께 지내며 깨닫게 된 그의 다정하지 않음은, 본래의 성격이 무뚝뚝한 탓도 있겠지만, 정말 좋아했던 여자와 헤어지고 이후 아무도 만나지 않은, 소현과 같은 마음의 병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소현이 그를 처음 만난 11월이 돌아왔다. 


수요일 저녁, 어두워지기 시작한 즈음 소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참 따뜻해 뒤를 돌아보니 그가 서 있었다고 한다. 내 이름이 이렇게 따뜻한 이름이었나? 그건 마치, 소현이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사람이 소현에게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묻던 말투. 또 소현을 바래다주는 길에 집 앞에 서서 작아지던 소현을 끝까지 바라보던 눈빛. "내일 점심 맞죠?" 묻는 그에게 그렇다고, 근데 나는 야근하는데 선배는 어딜 가시냐고, 내 일을 나눠서 하자고. "아니, 나는 그냥 배신할래"라며 선배는 웃었다. 일 년 만에 처음 본 그의 미소였다. 소현은 자리로 돌아와 그에게 내일 배신자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을 거라고 문자를 보낼까 하다, 끝내 그에게는 보내지 못하고 친구에게 "설레서, 자꾸만 설레서 큰일이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럼에도 소현이 그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한 이유는, 사수로서 도와준 은혜를 갚고자 주선하겠다는 소개팅을 핑계로 그의 이상형을 물었을 때 그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또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데 소현이 보는 본인은 밝지도, 긍정적이지도, 또 순수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니까.  


그늘이 느껴지는 사람. 헤어지고 잊지 못했던 사람에 있어서, 또 가고자 했던 길에 있어서 본인을 닮은 어둠이 있는 사람. 그래서 요즘, 당신의 눈동자를 깊이 쳐다볼 때 그 어둠이 보여서 잠시 그 그늘 속에 앉아 있기도 했다. 선배는 선배의 아픔을 꺼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따금씩 둘의 식사 중 본인의 아픔을 한 조각씩 꺼내보였고, 선배는 아마 그 기억들을 잊겠지만 내가 아는 소현은 그 기억들을 잊지 않을 것 같다. 둘이 함께했던 시간 속 그 순간의 대사, 그 찰나의 표정, 그 공기의 온도... 소현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소현의 기억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 시간들이 그대로 눈앞에 재생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선배와 또 소중한 사람들은 소현의 기억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는 그들의 순간들을 잊더라도 그녀의 기억은 선명할 수밖에, 또 그녀의 마음은 또렷할 수밖에. 소현의 기억 속에 당신이 있다. 당신이 있다, 그곳에. 


그녀의 기억 속에, 그녀의 마음속에

그곳에 있다, 당신이. 


#1. 당신이 있다, 그곳에. 그곳에 있다, 당신이. 



"그거 아세요? 회사 사람들은 선배 되게 차갑고 무뚝뚝한 줄 알아요."

"알아 나 인기 없는 거. 그래서 나랑 프로그램 같이 하려는 사람 별로 없잖아."

"인기 많아요. 차갑게 굴어서 다가가지 못한 거지. 

선배는 모르겠지만 좋아하기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들 많을걸요."

"(피식) 뭐야. 고맙다 위로가 되네."

#그해우리는 #김지웅 #정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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