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각
서른 즈음 그림을 시작했으니, 그림을 시작하고 나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한 성장은 없었다.
그래도 소소하게 그림 실력이 올라가는 것이 즐거웠고, 그림을 통해 배우는 점이 참 많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는 그림의 피로도가 존재한다.
RPG 게임 속 주인공이 처음 모험을 떠날 때, 낮은 레벨에서는 몇 번 검을 휘두르면, 스테미너가 부족해 더 이상 공격을 하기 힘들듯이, 나와 그림의 관계도 딱 그 정도의 피로도가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나 몸이 피곤하거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클 때면, 방안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낸다. 이때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면 좋으련만, 내 몸과 마음은 책상에 놓인 연습장과 아이패드를 애써 외면한다.
어느 날은 또 의욕과잉으로 "이번에는 진짜 멋진 작품을 만들어야지" 라며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로, 의자에 앉아 펜을 들고, 전문 작가라도 된 듯 미친 듯이 펜을 움직여 보지만, 보이는 건 졸라맨과 괴상한 스케치뿐이다. 스케치를 잘 넘어갔다 하더라도 채색과 그 이후의 단계는 좀처럼 쉽게 넘어가기 힘들다.
이럴 때면 갑자기 온갖 잡다한 다른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 "빨래는 잘 마르고 있을까?" , "다음 주 날씨는 어떨까?" 등의 일들이 말이다.
그렇게 그림 그리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그림들이 점점 쌓여가며, 또 다른 압박감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그림이 멀게만 느껴진다.
분명 좋아하는 그림이지만, 내게 그림은 마라톤과 같아서, 적절한 호흡과 체력 분배, 온전한 정신 상태 등 많은 것들이 잘 갖춰줘야만 곁을 내어주는 아직은 많이 어렵고 버거운 존재이다.
소설가 장강명 작가님은 종종 책은 언제 읽냐는 질문을 받는다는데, 그에게 이런 질문은 " 물을 언제 어디서 마시느냐?"라는 질문처럼 들린다고 한다.
내게도 그림이 이런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심심해서 그림을 그리고, 우울해서 그림을 그리고, 쉬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마치 삶이 그림처럼 느껴지는 그런 삶을 말이다.
"내 삶의 깊은 곳에 그림이 들어와 주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그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