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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gative to Positive Nov 03. 2017

퇴사후  #21 오랜만의 사고思考, 그리고 여운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

불현 듯 슬프다. 나는 요즘 괴물이 돼가는 중이다. 타이틀에 집착하는 이들을 비판했던 나인데 어쩐지 요즘 내 직업은 ‘자격증 콜렉터’인거 같다. 대한민국 땅에 적응해 살자고 미래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치자고 말이다. 조직생활 실패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날 괴롭힌다. 그 어떤 조직에 속하는 것 자체가 이젠 두렵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다. 오롯이 나이고 싶다. 자존감 레벨이 그리 높진 않아 ‘을’이 돼 당하는 건 남들보다 두배 세배 힘들다. 자유롭게 돈 벌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자격증을 따는 일이다.

어떤 필드가 됐건 관련 경험이 전혀 없는 30대 중반의 여성을 뽑는 경우는 거의 없다. 취업 시장엔 상큼발랄, 스펙가득 취준생이 넘쳐난다. 현실적으로 따져보자. 저임금에 노동력 착취가 목적이라면 모를까. 누가 날 뽑을까. 나 같아도 안 뽑는다. ‘나 이 일이 꼭 하고 싶었어. 그래서 자격증 땄어.’ 정도의 성의는 보여줘야 기회라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조금 헷갈린다. ‘살고자 자격증을 따는 건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사는 건지.’

내가 준비하는 자격증 중에 테솔도 있다.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기엔 버거운 지라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하자고 선택한 자격증 중 하나다.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돈벌이 수단이 시급했고 그래서 선택했다. ‘자아실현’을 위해서였다는  멋들어진 표현을 쓰고 싶지만 ‘돈벌이’가 될 수 있다면 무조건 트라이 중이다.

기대 하나 없이 시작한 이 수업에서 나는 매일 놀라고 배운다. 7명이  듣는 수업엔 대단한 사람들뿐이다. 이곳에서 내가 최연소로 보인다는 것도 놀랍다.

티쳐 says: “주말엔 뭐할 거야?”
나: “토요일에도 시험, 일요일에도 시험.”
학생들 say “wowwww.”
학생1: 무슨 자격증?
나: 여행 관련 자격증.
학생1: 왜?
나: 여행 좋아하니까.
학생2: 그럼 스튜어디스 하면 돼지. 영어도 하고 키도 큰데 뭐가 문제야? 신체적으로 튼튼하기만 하면 돼.
나: 농담도 원, 보다시피 처비하잖아.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다이어트야. 나이도 많고.
학생2: 무슨 소리야. 중동 항공사에선 40대, 50대도 근무해. 늘씬한 승무원? 한국 항공사나 그렇지, 외항사는 안 그래.
티쳐: 맞어, 미국국적기도 그래.
학생들: 그래 한번 도전해봐.
나: 하하하하하하하하;;;;


중동 베이스의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 인생 선배가 하는 말이다. 왠지 솔깃하다.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지만 뚱뚱한 내가 스튜어디스를 할 수 있단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적 없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해 일생을 뚱뚱하게 살아온 나다. 이놈의 대한민국에서 발붙이고 살려면 살이 죄악처럼 여겨진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받아들였다.  그로 인한 디스어드벤티지는 오로지 내 몫. 외식천국 한국에서 맘에도 없는 샐러드와 구황작물을 고통스럽게 먹는 이유다. 그렇다고 살이 잘 빠지는 것도 아니고ㅜㅜ.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오래 뚱뚱한 채로 살아온 나를 보면 무슨 자신감이었나 싶기도 하다.  

5시간 가량 되는 수업. 영어 토론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선생님이 말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는 인생 선배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표현하는 선배들이 신기할 뿐이다. 뭐 따지고 보면 자연스럽다.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거나 해외에서 거주했거나 외국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거나 지금도 해외에서 거주 중인 이들이 대부분이다.

수업이 끝났다. 스몰 토크가 이어진다.
학생2: 한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살고 싶은 생각 없어. 타이틀에만 집착하는 사회, 몇십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교육 시스템 등. 말하자면 끝도 없어.
나: 그치, 헬조선이지. 나도 한때는 이민을 생각했어. 그런데 어렵잖아. 발붙이고 살려면 어쩔 수 없어.
학생2: 그건 그래. 그런데 이 나라 문제 많은 건 사실이야. 그리고 누군가는 이 문제를 지적하고 고쳐 나가야해. 그렇지 않으면 평생 변하지 않을테니까.
나: 그래, 그렇네. 그런데 어차피 바뀌지도 않을 건데 뭐하러 그러나 싶어. 그냥 맞춰 살게 돼.

그렇구나. 나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고 있었고, 이곳을 벗어나려고만 했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억지로 모든 욕망을 누르고 굴레처럼 이곳에 다시 돌아와 오로지 먹고 사는 일만 생각하고 행동했다. 내가 사는 곳이 헬조선이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대한민국의 시스템에 나를 구겨 넣으며.

꽤 오랜 시간 생각 없이 달려왔다. 전에 몰랐던 켜켜이 쌓인 수만톤쯤의 불안감을 1g이라도 덜어내자고. 그리고 오늘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오랜만에 사고思考란 걸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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