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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i Forrest Lee Jan 05. 2019

신대륙 발견

1. 1. 2019.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새해를 맞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 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 날을 어제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31번을 겪은 일이지만 아직도 이 전환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1월 1일이면 나는 늘 어리둥절 해진다. 연속으로 이어진 시간의 흐름 위에 인위적으로 놓인 새해라는 경계선. 이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의 혼란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우리는 그리도 떠들썩하게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고 축하하고 술에 취해 잠드는 건 아닐까. 


어쨌거나 내가 은둔처에 숨어 있지 않는 한 새해맞이의 의식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제는 내 생에 최고로 이상한 12월 31일이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아 우리는 쉴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어야 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더운 연말을 맞아 땀을 많이도 흘렸다. 축제와 파티의 나라 브라질에서 드디어 수많은 거리 인파 속에 카운트다운을 해보나 싶었지만 결국은 호스텔에 남은 몇몇 사람들과 다소 조용하게 새해를 맞이했다. 서울에서 10년 넘게 사는 동안 한 번쯤 가볼만한 보신각 타종행사에도 한 번도 가보질 않았고 남들은 일부러 연말을 보내러 찾아간다는 뉴욕에 있던 해에도 캐나다의 조용한 이모네 집으로 피신을 갔었으니 어제의 새해맞이도 어쩌면 반쯤 예견된 결과였던 것 같다. 


4시간 전쯤에 처음으로 만나 친구가 된 이, 그리고 30분 전쯤 합석하게 되었지만 전혀 친구가 될 것 같지 않은 이와 함께 앉아 있던 자정의 테이블도 이상하고, 술 취한 20대 브라질리언들의 시답잖은 농담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는 것도 이상했지만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동네의 작은 불꽃놀이를 보면서 이름도 성도 고향도 모르는 이들과 포옹을 나누며 새해의 복을 빌어주는 것이 제일 이상했다. 꼬부랑 영어로 한껏 다정하고 요란하게 인사한 이후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서둘러 자리를 피한 내가 생각나서 우습다. 


지금은 휴일에도 일하는 이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카페에 앉아 있다.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알지 못하는 사이에 꽤 지쳐버렸는지 반쯤 강제로 쉴 수밖에 없었던 튀니지에서의 일주일에 이어 연말연시엔 모든 것이 문을 닫는 상파울루에 오는 바람에 연휴 내내 갈 곳이 없어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보내고 있다. 이 시간에 대해 상파울루에서 3일을 버렸다고 표현하는 바람에 풍의 웃음 섞인 핀잔을 들었다. 나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겠냐 반론했더니 자기는 아니란다. 상파울루의 어떤 대단한 보물을 못 보더라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좋은 것으로부터 충분한 영감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는 풍. 곰곰이 그를 따라 생각해 본 덕분에 오늘은 나도 지난 3일을 버린 게 아니라 벌었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의 조국과 육로로 이어지지 않은 먼 아메리카 대륙. 15시간의 비행 끝에 두 인간은 무사히 도착했으나 짐 하나는 환승에 실패한 채 카사블랑카 공항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한다. 한 밤 중에 도착한 호스텔은 알고 보니 빈민가 우범 지대에 있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주인이 우리를 기다리다 퇴근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소파에서 잘 뻔하기도 했다. 총성 비슷한 것을 들은 것 같아 무서워 떨던 밤이 지나고 그곳을 재빨리 빠져나와 새로운 호스텔에 안착했지만 그날 밤은 정체 모를 벌레에게 잔뜩 물어 뜯겨 두 다리가 거의 피부병 수준으로 부어올랐다. 빈민가 호스텔에서 주인 대신 문을 열어 준 착한 브라질 친구 안드레가 민망한 표정으로 이건 외국인을 환영하는 방식으로 적절하지 않다며 연신 사과한 것처럼 속상하려면 얼마든지 속상할 수 있는 일들의 연속해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쩐지 모든 게 별로 큰 문제 같지가 않고 기분이 좀처럼 나빠지지도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풍도 그래 보인다. 이런 내 모습이 나도 낯설다. 아프리카에 있을 땐 아무리 애써도 산뜻한 마음을 만 하루조차 넘기기가 힘들었는데 말이다. 햇빛과 뭉게구름과 야자수가 나에게 최면이라도 걸고 있는 걸까. 아무튼 몇 백 년 전 칙칙하고 좁아터진 유럽 땅을 떠나와 이 대륙을 발견했던 유럽인들의 흥분 같은 감정을 우리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여행의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점이 우연히도 새해와 그리고 새 대륙과 맞아떨어진 것은 운이 좋았다. 풍의 손을 괜히 꼬옥 한 번 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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