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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작가 Mar 15. 2017

가면 인생을 사는 나와 너의 이야기

가끔은 내 얼굴에 쓰인 가면 때문에 나는 친구도 잘 사귀고, 어른들에게 사랑도 받아. 

타고나길 조금은 예쁘게 타고난 것도 내 가면의 일부 일수 있어. 그리고 늘 상냥하게 웃는 미소도 내 가면의 일부이고.

내 가면의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 나도 다 본 적은 없어. 그냥 내 얼굴에 가면이 있다는 건 알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 가면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끔 바뀌기도 해.  

기억나는 내 얼굴의 가면 중 착한 반장 가면이 있었어. 선생님들께는 “네”라고 대답하면서, 공부 못하던 아이를 비아냥 거렸던 내 얼굴을 본 친구도 있지. 그래서 사실 내가 친구가 많다는 건 정확한 데이터는 아닐 수 있어. 내 정보는 내가 다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나의 본심을 들켰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가면 외에 좀 더 인간적인 가면을 나는 더 많이 가졌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에 대해, 그리고 너에 대해 나름의 객관적 분석은 필요해. 이 객관적 분석이 다시 더 필요한 날이 올지 모르니까 우리가 각자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야. 이전보다 우리는 우리를 더 잘 관찰하기도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어. 

복불복 인생이란 나 자신을 얼마나 아느냐, 모르느냐 에서부터 시작일 거야. 

이젠 선과 악으로만 사람을 나눌 수 없을 걸?

나조차도 때론 굉장히 선했다가 어느 날은 냉소적이었다가 어느 날은 열정적이거든.

그 모든 날의 내 얼굴은 다 나였어. 핑계될 만한 그 어느 것도 아니란 말이지.        


#1. 내 얼굴 위의 가면을 깨달은 날     

   

내가 7살 때였어.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와 골목이 많았지. 비가 오면 골목마다 하수가 흘러넘쳐 쾌쾌한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어. 비가 그친 다음 날이면 하수구에서 역류한 온갖 쓰레기들이 골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지. 그래도 그런 날  운이 좋으면 신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 간혹 새 신발을 신은 어른들이나 아이들은 골목의 중앙을 놓아두고, 가장자리에 한 줄로 서서 시멘트 길로만 다녔어. 비포장도로인데 어떻게 그렇게 시멘트 길로 다녔냐고? 왜냐하면 골목의 양 가장자리 길에는 하수구를 처리한 시멘트길이 있었는데, 그 좁은 길로 평형대에서 균형 잡듯 아슬아슬 그리 다녔다는 말이지. 그런데 늘 운이 좋은 건만은 아니야. 골목마다 역류한 하수와 전날 내렸던 비가 덜 빠진 곳도 있었거든. 그러면 마을 어른들이 하수 길의 하수도 구멍을 열어두었어. 운이 나쁘면 열어놓은 하수도 구멍에 빠질 수 있었다는 말이지. 그래서 완전히 열어두면 위험하니까 때론 직사각형 시멘트 하수도 구멍을 대각선으로 끼워 두었어. 그럼 하수도 구멍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멀리서도 보이거든.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더 운이 나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아?

시멘트 하수도 구멍의 가장자리가 마모되니까 어느 날부턴가 쇠로 가장자리를 테두리 쳐놓았더라고. 그러면 뾰족하고 날카로운 쇠가 우뚝 솟아 있어 많은 아이들이 다치기도 했어.     

그럼 내가 7살 때 태연이라는 아이의 얼굴 표정 본 걸 이야기해줄게. 물론 내 기억 속의 태연이 가면이니까. 그 가면 뒤에 진짜 표정은 태연이만 알겠지.        

‘ㄷ’ 자로 된 양옥집에 살 때였어. 당연히 나는 안채 주인집에 살았고, 양 옆으로 태연이네랑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중학생 아들을 둔 집이 있었어. 우리 엄마와 태연이 엄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 집 대청에 앉아 곤로에 정구지찌짐(부추전)을 자주 부쳐 먹었어. 나도 그 정구지찌짐 한 점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나를 피아노 학원이라는 곳에 보냈어. 그땐 80년대 중반이야.     

하늘도 비가 오다 오다 더 올 게 없으면 누렇게 변하는 거 아니? 마치 내가 꺼이꺼이 울다 지쳐가 소리로만 울 때처럼 하늘도 비가 오다 오다 지치면 누렇게 변하는 것처럼 보였어. 과학적 사실을 7살이 어떻게 알겠어. 아무튼 내게는 그런 하늘로 보였던 그 날이었어. 나는 빨간 우산을 쓰고 피아노 학원으로 가야 했어. 빨간 장화를 신고, 바이엘 책이 든 피아노 가방과, 피아노 학원에서 먹으라고 사준 바나나킥 과자 한 봉지를 피아노 가방에 넣은 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었지. 정구기찌짐 대신 바나나킥을 엄마가 주신 거야. 그래도 나는 우리 집 대문 나서기가 그렇게 싫었는데, 태연이가 따라 나오는 거야. 잘 갔다 오라고. 어린 마음에 의리 있는 태연이의 모습에 살짝 마음이 놓였어. 그런데 태연이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하수구 구멍이 대각선으로 열려있는 곳으로 뛰어가더니 점프를 하는 거야. 사실 태연이가 나보다 한 살 많았거든. 어릴 적 한 살은 매우 큰 차이야. 당연히 태연이가 나보다 키가 컸다는 거지.     

‘뭐야, 나 배웅해주는 줄 알았더니 나보다 키 크다고 자랑하는 거야? 근데 왜 이렇게 저 하수도 구멍을 잘 넘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내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나 봐. 태연이가 살살 도발을 하더라고. 그래서 순진했던 7살의 나는 넘어갔지.

상상해 봐. 내가 말했잖아. 어릴 적 한 살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니깐. 태연이를 따라 나도 하수도 구멍이 대각선으로 세워져 끼워진 그 구멍을 뛰어넘어봤지.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당연히 내 손에는 바이엘 책과 우산이 들린 채...

핑계가 아니라 비가 왔고, 내 소중한 책을 태연이에게 맡길 수는 없었어. 그래도 나는 뛰었지. 어떻게 됐냐고? 진짜 궁금해? 하수도 구멍에 그대로 처박혔지. 뭐... 처박히기만 하면 다행이었지. 더 큰 불행은 내 오른쪽 다리 무릎 안쪽이 세워진 하수도 구멍의 모서리에 푹 박혀버렸어. 상상이 돼? 비가 오던 날이었어. 7살 나는 태연이보다 짧은 다리로 뚜껑을 열어놓은 하수도 구멍을 뛰어넘었지. 내 안의 주인집 딸의 자신감이 내 신체적 능력까지의 자신감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우산은 손에서 놓쳤고, 소중히 여긴 바이엘 책도 진흙바닥에 떨어졌어. 그리고 내 얼굴은 하수도 구멍으로 처박혔고, 오른쪽 다리 무릎 안쪽은 하수도 구멍 쇠 테두리에 찔려서 피가 철철 났지. ‘피만 났으면 괜찮을 거야.’라고 다친 중에도 그리 생각하며 태연이의 놀라는 소리와 우는 내 소리를 듣고 나온 어른들 덕에 일어날 수 있었어. 그런데 내 다리를 먼저 본 여자 어른 중 누군가가 아프고 놀라서 소리 질렀던 나보다 더 “꺄~”하는 거야.

그 순간 나도 알 수 있었어.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그 순간 아픔이 없었지만, 내 오른 다리가 큰 일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엄마가 나를 말릴 새도 없이 내 눈이 내 다리로 향했어. 내가 살아오면서 그날의 그 순간만큼 끔찍했던 장면은 없었을 거야. 그 끔찍함의 대상이 내 몸이었으니까. 내 오른 다리 무릎 안쪽의 피부가 찢겨 새끼손가락만큼의 틈이 생겼어. 그리고 나는 그 틈으로 보고 말았지. 내 오른 다리의 뼈를 말이야. 산 채로 벗겨진 피부 속의 자신의 다리뼈를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알아? 그것도 7살 여자 아이에게 말이야. 그때부터는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희한한 건 우리 엄마 소리만 들렸다는 거지. 엄마가 “보지 마~. 가자.” 하시는 거야.    

내 다리에선 피가 흐르고, 피부가 벌려져 너덜너덜하고, 다리뼈가 보이는데, 그 길로 엄마 손을 잡고 나는 동네 내과로 갔어. 80년대 우리 집엔 차도 없었고, 엄마가 면허증이 없었거든. 그러면 어떻게 갔을까? 5살, 3살 어린 여동생을 엄마가 이웃에 맡겼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없어. 오로지 엄마와 나만 병원에 갔어. 그런데, 나를 업어 주지 않는 거야. 내가 피가 철철 흘러 울고 있는데도.... ‘엄마가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태초의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어. 엄마 손에 끌려 울면서 나는 걷고 또 걸었어. 집에서 간단한 소독조차 해주지 않고 말이지. 어쩌면 내가 우리 엄마랑 감정적 단절이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이 아니었을까 해. 그때 우리 엄만 27살. 나는 7살. 27살 철없는 엄마가 7살 딸아이의 엄청난 외상 앞에서 해줄 수 있었던 건 우는 나를 다독이거나 안아주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손을 잡아끌고는 병원에 데려가는 거였어. 위기관리면에서는 그 방법이 맞을지도 몰라. 사고 현장에서 어설픈 치료와 간호로 시간을 지체하는 것보다 바로 병원으로 가는 게 맞을 수도 있지. 그런데 나를 걷게 했다는 거지. 나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해. 그 찰나의 순간에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계획하는 능력도 생겨. 놀랍지? 잘 생각해봐.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너도 절박한 찰나의 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계획될걸?    

그때 내게 떠올렸던 과거는 7살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엄마가 나를 다정다감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는 거야. 물론 울 땐 안아주고, 기저귀 갈아줄 땐 안아 주셨겠지. 의무적 포옹 말고, 정서적 포옹이 기억나지 않았어. 현재는 위에서 말했잖아. 그리고 미래는 ‘30년 후 내가 엄마가 된다면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내 아이 달래주는 것부터 해야지.’라는 나만의 매뉴얼을 머릿속에 입력했어. 이런 생각이 단 몇 초 만에 정리되었다는 게 나는 너무 신기했어. 생각을 정리했을 땐 엄마 손에 끌려 병원으로 가고 있었고...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전신마취를 시킬 수 없대. 동네 작은 내과에서 어떻게 큰 수술이나 외상을 치료할 수 있었겠어. 방법은 생으로 나를 치료하는 거래.     

당연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고, 내가 위급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본능적으로 나는 더 큰 울음을 쥐어짰어. 그랬더니 나를 병원 침대 위로 올리더라고.     

그리고 밧줄? 붕대 같은 걸로 내 두 팔을 묶었어. 왼쪽 다리도 묶었는데, 오른 다리만 90도 각도로 세워두는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에게도 그렇고, 간호원들에게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 붙잡으라고 하시는 거야. 7살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이었어. 나를 묶어둔 그 침대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어른 4~5명이 나를 눌렀기 때문에 사실 소리 지르는 것도 벅찼어. 내가 너무 자지러지게 우니까 드디어 우리 엄마가 말하는 거야. “너 안 울고 잘 치료받으면 손가락 과자 사줄게.” 그래서 그 말에 7살 아이의 이성을 찾아보려고 했어. 그리고 상상했지. 호프집에 가면 나오는 기본 안주인 그 손가락 과자를 사준다는 엄마 말에 난 바로 순한 딸이 되기로 말이야. 소독을 했는지 어땠는지 기억이 하나도 없어. 내 생살을 꿰매고 있다는 느낌뿐이었어. 그렇게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땐 드디어 엄마 등에 업혔어.     

잠깐! 이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나는 엄마에게 업혔던 정서적 기억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있었네. 엄마의 등에 업힌 정서적 기억 말이지. 많이 울면 졸리다는 것을 너도 알지?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올 때 졸리지만, 엄마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엄마에게 상기시켜줬어. 그랬더니 엄마가 “어. 그래. 일단 자.”하더라고.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나는 엄마 등에 업혀 드디어 끔찍한 공포를 떨쳐내고 잠들었지.     

그날의 하루는 정말 길었던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와 깼을 때도 나는 그 손가락 과자를 사 줄 엄마를 기대했는데, 30년... 아니 지금까지도 엄마는 손가락 과자를 사주지 않았어. 

내가 이성적으로 그 날의 일을 생각해보자면, 우리 엄마는 병원비를 대느라 과자 사줄 돈이 없다고 믿고 싶었어. 그게 맞을지도 몰라. 그때는 신용카드라는 게 세상에 나오기 전이거든.    

내게 하수구 구멍을 넘어보라고 한 태연이는 그 ‘ㄷ’ 자 양옥집 대문을 나와 나를 배웅해줄 때는 어떤 얼굴 표정이었을까? 어른들은 그랬지.

“역시, 한 살이라도 많다 보니 언니 노릇 하네. 동생 가는 거 대문 밖에서 내다볼 줄도 알고.”

그런데 대문 밖은 나온 태연이의 얼굴은 언니 노릇 하려는 얼굴 표정이 아니었다는 거지. 

음, 뭐랄까? 태연이 마음은 태연이가 알겠지. 한 살 많아도 언니라고 안 부르는 나에 대해 태연이 나름 속상함이 있었겠지. 그리고 나를 도발할 때는 이런 결과까지 계산하지는 못했을 거야. 하지만, 어른들이 본 그 언니 노릇 하려는 얼굴은 아니었다는 건 분명해. 그렇다고 태연이를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점프하고, 뛰어야 하는 것 앞에서 움츠러들었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지. 운동신경 제로의 지금 나는 어쩜 내가 설계한 그 값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나는 운동 신경이 없으면서도 자전거와 인리인은 아주 잘 타거든. 어릴 적 아빠가 자전거 안장에 나를 앉히고 태우고 다녔던 기억 때문에 자전거는 무서운 운동이라는 기억이 입력되지 않았나 봐. 인라인도 마찬가지고.    

7살의 나와 8살의 태연이는 이미 당시에도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지고 갈아 썼다는 거지. 그동안에는 가면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내 다리가 다친 그날에서야 가면을 최초인지 한 거야.  

   

#2. 타인의 가면에 반응하는 내 가면        


11살 때 나는 나나 태연이만 가면을 쓰고 있지 않는 걸 더 똑똑히 알게 됐어. 타인의 가면에 따라 나도 다른 가면을 쓰는 걸 깨달았거든. 그러고 보면 신체적 사춘기가 미처 오기도 전에 나는 처세에 대해 배우게 된 것 같아. 어떤 가면을 본 시기냐 하면, 한 늙은 老(노) 교사의 욕망과 추잡함의 가면을 보았어. 그때에는 초등학교 건, 중학교 건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그래도 존경받던 시대였어. 11살 때니까 내가 4학년 때야. 4학년 5반 담임 선생님이 학년 주임이었어. 그리고 나도 4학년 5반이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조금만 있어도 공부를 잘할 수 있거든. 나도 그랬고. 그런데 4학년 때는 공부하기가 그렇게 싫은 거야. 뭐, 과목들이 갑자기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담임선생님이 싫었어. 4학년 초에 내가 이 담임 선생님께 뺨을 맞았거든. 왜 맞았는지 몰랐어. 그냥 맞았어. 4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그 3월은 유독 추웠어. 3월 중순 즈음 학부모 상담 기간이 되어 우리 엄마가 학교를 다녀갔지. 그날 이후로 나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어. 말로만 듣던 엄한 호랑이 선생님의 가면을 3월 초에 2주 정도 보았다면, 그 2주 후에는 나를 아주 사랑스럽게 봐주시는 거야. 인자한 교사의 가면을 보았지.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본능적으로 그 사랑스럽게 봐주는 눈빛을 즐겼어. 우리 엄마가 촌스런 그냥 아줌마가 아니었거든. 젊은 시절 우리 엄마는 눈에 확 띄는 미모의 아줌마였거든. 이목구비가 세련된 아줌마. 아마도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 엄마의 세련된 기에 눌렸을지 모르지. 그렇게 인자한 담임선생님의 가면이 어느 날부턴가  또 바뀌어져 있었어. 나랑, 혜수, 진현, 태은이를 차례로 수업시간에 불러 다른 교실로 심부름을 시켰어. 그 시절에는 수업 시간에 다른 반 교실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건 마치 왕에게 간택받은 느낌을 줬거든. 대부분 반에서 반장이나 부반장, 혹은 아주 똘똘한 아이들에게만 수업시간에 다른 교실에 다녀오라는 일을 시켰어. 고로 우리 4명은 4학년 5반에서 나름 똘똘하다고 담임이 인정한 거라고 볼 수 있어. 그리고 그런 심부름을 하고 나면 심부름을 잘했다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교실 뒤에 있는 선생님 책상으로 불러. 혜수, 진현, 태은이 그리고 나는 당시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키가 컸어. 그 말은 성장 발육 속도가 남달랐다는 거야. 키만 크면 뭘 해? 우린 다 같이 11살짜리 아이일 뿐이었기에 선생님이 우릴 불러 칭찬해주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거든. 칭찬도 날이 갈수록 과해 지는 거야. 여름이 다 가올 때쯤부터는 칭찬의 방법이 바뀌었어. 혜수의 귀를 만지시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의 입으로 혜수의 귀를 물고 빠시는 거지. 우리 세 명은 서서 그걸 보고 같이 웃었어. 왜 웃었냐고? 선생님이 칭찬해주시니까! 좋은 건지 알고 같이 웃었지. 선생님은 우리 4명 외에는 거의 쉬는 시간 다른 아이들을 부르시지 않았어. 나는 선생님이 한쪽 다리가 짧아서 다리를 절뚝거리시니까 자꾸 책상에 앉아서 우리를 부르시는구나 싶어서 더 열심히 쉬는 시간에 선생님 옆으로 오라면 오라는 대로 갔어. 그게 학생의 본분인 줄 알았어. 혜수의 귀를 만지시던 선생님은 진현이 허리를 당기시며 의자 옆으로 확 당기시는 거야. 그럼 혜수의 젖가슴이 선생님 입 위치에 닿거든. 그럼 혜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으셨어. 우리 중에 키가 가장 큰 아이는 태은이었지만, 가슴이 봉긋 나오기 시작한 아이는 혜수였거든. 그때도 나머지 우리 세 명은 웃었어. 그게 선생님의 칭찬 방법인 줄 알았으니까. 우리 중에 누구도 선생님의 사랑방식에 대해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한 이는 없었어. 그걸 말해야 하는 이유도 몰랐거든. 호랑이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게 얼마나 힘든데, 사랑 표현이 이전에 보지 못한 방식이라고 굳이 누군가에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태은이 차례였어. 태은이는 그때 이미 키가 150cm가 넘었어. 과장해서 말하면 아가씨 같았지. 단지 가슴 없는 미소년 느낌이 있었기에 앳된 얼굴 표정은 있었어. 선생님이 태은이에겐 어떤 칭찬을 해준 줄 알아? 초등학생들은 진짜 말 그대로 핫팬츠를 많이 입잖아. 우리 넷 다 마른 편에 속한 아이들이라 핫팬츠 반바지를 여름에 입으면 바지통이 남았어. 쉬는 시간마다 우릴 칭찬해주시던 선생님은, 태은이 반바지 통 속으로 손을 넣는 칭찬 행동을 보여주셨어. 다른 한 손으로는 태은이 허리와 엉덩이를 만지고 말이야. 그때도 우리는 웃으려고 했어. 그런데 그 순간부턴 뭔지 모르게 우리가 웃고 있지만 무섭기 시작한 거야. 왜냐하면 그 인간의 표정은 백발 대머리 노인의 욕망의 표정이었거든. 쌍꺼풀진 부리부리한 눈매에 앞 대머리 머리. 코는 스머프라는 영화에 나오는 갸갸멜 같은 매부리코, 입술은 순대 입술처럼 두툼했어. 백발의 갸갸멜 같았어. 그리고 내 차례였어. 11살 때 나는 너무 말라서 만화영화 고스트 바스트에 나오는 말라깽이 로봇을 닮았다고 남자아이들이 별명을 붙여줬거든. 한 명씩 칭찬받는다고 선생님 곁에 갔다가 물러나면 각자의 차례를 알고 선생님 곁으로 갔거든. 내 차례가 된 거야. 두 세발자국의 거리인 선생님께 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이건 더러움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확 들어왔어. 제일 마른 나는 바지통이 그만큼 넓었다는 거지. 성교육을 당시에는 11살이 받을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어. 그런데도 더러운 시간이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어. 선생님의 두꺼운 입술이 내 볼 여기저기에 닿는 거야. 침도 느껴졌어. 그 역겨움이란. 내 얼굴 표정은 겁에 질린 가면인 동시에 냉소적인 가면이었어. 왜냐고? 11살인 내가 선생님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되지 않을 걸 알기에 겁에 질렸던 거지. 그리고 냉소적인 가면으로 빨리 갈아 쓴 것은 먼 훗날 내가 어른이 되면 이렇게 세상에 다 말하리라는 걸 결심했기 때문이야. 그 인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는 몰라. 그런데 그 인간에게 당한 여학생들이 그 흥신초등학교에는 아주 많았다는 거지. 절뚝거리는 다리로 늘 자전거를 타고 학교 언덕을 오르던 인자한 그 선생님은 사실 육신의 욕망을 주체 못 하는 발정 난 수캐의 가면을 숨기고 있었어.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 그런지, 4학년 5반 시절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있더라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모아봤지만,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뇌라는 녀석이 굉장한 절대자 같았어. 기억의 절대자 ‘뇌’, 그리고 그 ‘뇌’를 만든 창조주! 흩어진 기억이 연결되어 정리 되질 않더라고. 뇌가 통제를 한 건지, 창조주가 망각을 통해 내 유년 시절을 보호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몰라.

아무튼 나는 엄한 호랑이 선생님 가면에서 인자한 선생님, 발정 난 수캐의 가면까지, 3월부터 6~7월까지 본 가면이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의 전부야. 2학기 때의 기억은 지금도 없어. 내 볼에 침을 묻혔다면 귀도 빨았을 거고, 엉덩이도 만지셨겠지? 그런데, 그 상황의 나는 없어. 그저 난 한 명씩 당하던 4명 중 1명이 맞는데, 뒤에서 당하던 친구들을 본 장면만 머릿속에 있거든. 선생님을 무서워하던 내 가면 한 개는 냉소적 가면과 늘 같이 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이런 나에게 선하다, 악하다 이분 지어 말할 수 없을 걸. 상화에 따라 처세가 필요했기에 그에 따른 내 가면을 바꿔 썼을 뿐이야.  

                 

 #3. 남이 내게 씌워준 가면! 그 가면에 갇히다.      

  

기억이 흩어진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은 지금도 모을 수 없다고 했지? 그러다 새 학년이 되었어. 이번에는 푸근한 아줌마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났지.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는데, 내가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저는 어른이 되면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원주민들에게 음악도 가르쳐주고, 글도 가르쳐주면 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어. 나도 왜 이렇게 나를 소개했는지 몰라. 그냥 입에서 내 뇌가 통제하기 전에 나와 버렸어. 아인슈타인 위인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 내가 어릴 땐 집집마다 위인전집이 다 있었거든.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소개 한 번 그럴듯하게 했을 뿐인데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무조건 나를 신뢰해주는 거야. 숫기 없어 앞에 잘 나서지도 못했던 나를 웅변대회도 나가게 해 주고, 각종 교내 대회에 우선으로 참가시켜주셨어. 내 재능을 마음을 펼쳐보고 찾아보라는 거였거든. 가끔 선생님이 무용담처럼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면 공감이 되고, 많이 울었어. 무슨 사연이 그리 많으신지, 슬픈 성장담이었거든.     

나는 7살 때부터 내가 내 가면을 찾아가는 중인 줄 알았어. 그런데, 12살의 나는 남이 내게 가면을 씌워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내게 어떤 가면을 씌워주셨냐 하면, 인성이 바르고, 공부 잘하고, 순종적인 아이의 가면을 씌워주셨어. 

내 가면을 내가 고르기도 하지만, 남이 내게 씌워도 줄 수 있는 상황이 여러 번 올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아직은 아이였고, 내가 인생에서 딱히 뭔가를 선택할 결정권이라는 것을 갖기 전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더 마스크 속에 갇히게 됐는지 몰라. 내가 말했지? 재수 없어하지 마. 내가 좀 예쁜 얼굴을 타고났다고 했잖아.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내 첫인상에 다들 호감을 표시해. 얼굴도 예쁘지, 자기소개도 또래보다 성숙하게 표현했지. 내가 담임선생님이라도 나 같은 학생이 예뻤을 거야. 예쁨 받는 것도 중독이 될 수 있어. 다른 말로 ‘인정의 욕구’라고 하지. 나는 그 담임 선생님의 인정을 계속 받고 싶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각종 교내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었어. 어미 새가 벌레를 씹어 새끼 새에게 주듯, 그 담임 선생님은 엄마의 가면으로 날 대해 줬어. 내가 본 어른의 가면 중 가장 닮고 싶은 가면을 가지셨어.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만나보지 못한 미래의 가면들을 선생님의 성장담 속에 풀어서 알려줬어. 그래서 내가 감정 이입이 되어 그 성장담을 들을 때마다 울었는지 몰라. 이게 주고받는 감정들인 거야. 선생님은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제자가 예쁘니 더 열심히 세상 가면을 알려준 거지. 훗날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아이들을 만났을 때 그 담임 선생님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더라고. 난 나처럼 다들 그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 친구들 입장에서는 교사의 혜택이 내게만 간 거더라고. 친구들이 그렇게 여긴다 할지라도 난 그 담임 선생님의 ‘인정’에 사육 당해 때론 남이 씌워준 그 가면으로 인해 내 인생이 아닌 가면 인생을 살게 된 계기라고 봐도 될 것 같아. 

반듯하고, 공부 잘하고, 뭐든지 싹싹하게 해내는 그 가면! 내가 갖고 있는 가면 중에 가장 좋아했던 가면 같아. 그 가면으로 보아주길 나의 학창 시절 모든 교사들에게 보였던 가면 같아. 처음으로 인정의 욕구에 길들여져, 남이 씌워준 그 가면에 불만 한 번 표하지 않고 오랫동안 썼던 것 같아. 내게는 엄마보다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에 의한 칭찬과 인정이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었거든.         


#4. 모방의 욕구로 생긴 가면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니 다양한 인생들이 보이더라고. ‘또래 집단의 영향’ 이건 정말 무시무시 해. 내 안에 있는 자아 뿌리가 진짜 튼튼하지 않으면, 내 얼굴 위의 가면으로 어떤 것이 어울리는지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게 되거든. 너무 대놓고 기웃거리면 친구들은 티 내며 싫어하고, 빨리 노선을 정하지 않으면 친구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거지. 이럴 때 관계의 센스가 필요해. 어른들만 관계의 기술, 대화의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야. 어쩌면 중, 고등학교 시절 6년은 매해 3월 초면 관계의 기술이 부족해 힘든 1년을 보내야 할지 모르거든. 공부만 잘 하면 되는 시기가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 어른들은 우리가 어느 가면을 써야 할지 ‘결정장애’적 행동을 보이면, 칠칠맞고 못난 놈이라고 해. 공부만 잘하면 친구도 붙고, 공부만 잘 하면 선생님께도 예쁨 받고, 공부만 잘하면 관계 정리가 싹 된다고 하시지. 정말 어른들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 우등생 가면과 함께 기회주의, 인정, 욕망의 가면을 다 숨기라는 게 정답 같지 않아? 어른들도 두서없이  기, 승, 전, 공부! 즉 우등생 가면이 최선이다 하지만, 얼마나 모순적이야. 더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줘야지. 이제 10대에 들어선 우리가 뭘 얼마나 안다고 직접 화법으로 가면의 정의를 내리지 않냐는 거지!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사색하고, 철학적인 고전 수업을 시켜준 것도 아니면서, 어른들 불리할 때는 꼭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 가식과 위선 속에 사는 어른들! 정말 역겨웠던 시기 같아.     

하지만, 우리는 그리고 나는 이 시기를 지나오긴 했어. 잘 지나왔다고 말은 못 하여. 그건 내 선택이고, 너의 선택이니까. 각자가 살아서 지나왔으면 됐지 뭐. 그 지나온 과정에 등급은 이제 매기지 말자고.     

내가 중학교 때는 아직 어렸다는 핑계를 대고 싶어. 나름 우등생의 가면을 썼어. 물론 내 우등생 가면 안에는 기회주의 가면, 인정의 가면들도 여전히 있었지만, 치졸하고, 처절한 경멸의 가면도 있었지. 갈수록 세련되지 못한 엄마와의 대화에서 엄마가 무서우면서도 나는 엄마를 경멸하기도 했어. 못됐니? 너도 그랬을 거잖아. 그리고 나와 다른 가수를 좋아하는 친구도 경멸했지. 뭐 이건 거의 전쟁의 여신 가면이라고 해야지 표현이 될 것 같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고, 듀스가 나오던 시절, 한편으로는 신승훈, 이승환, 윤종신 등 발라더들이 대립하던 시절이었거든. 나는 윤종신 오빠를 좋아했어. 그의 가사에서 내 미래에 대해 미리 상상하고 공부할 수 있었거든. ‘오래전 그날’이란 노래를 통해 나는 나름 첫사랑과 이뤄지지 못한 아련한 감정을 지닌 어른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거든. 

그래, 아이돌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았건, 우린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며 누구나 다 전쟁의 신, 전쟁의 여신 가면 하나쯤은 갖고 있었던 것 같아. 우리의 전장은 팬덤 속일 수도 있었고, 현실의 환경일 수 있었어. 그리고 이 전쟁의 가면은 사춘기라면 응당 한 번쯤은 써야 한다는 불문율 안에 있는 강제성 없는 율법이기도 했지. 서로의 전쟁 가면을 베껴가며 나는 그 시절을 보냈어.

그리고 내가 갖고 싶었던 가면 중 인기인의 가면이 있었어. 내 모방의 시기에 친구들의 이 가면 저 가면을 열심히 살펴보던 중 인생 살아갈 땐 인기인의 가면이 참 유용할 것 같았어. 간혹 공부도 잘하는데, 수업 시간에 분위기를 띄우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 부러웠어. 어릴 때부터 경직된 사고 속에 자란 내가 감히 가질 수 없는 가면 같았거든. 내가 따라 하고 싶었던 가면은 늘 유쾌하고, 웃긴 이야기를 잘하는 이야기꾼 친구의 ‘인기인의 가면’이었어. 그런 친구들은 학교 밖을 나가도 늘 인기가 있을 것 같았거든. 그들의 인기가 참 부러웠어. 윤종신은 가상의 아이돌이었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하는 그 친구는 현실의 아이돌이었던 거지. 모방의 시기에 내가 갖고 싶었던 가면은 ‘전쟁의 여신 가면’과 ‘인기인의 가면’이었어. 우등생 가면은 내가 갖고 싶었던 게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어른들이 보고 싶었던 가면이었고.        


#5. 드디어 어른의 가면을 쓰다.        


내가 나인지 모르고 지나왔던 10대 시절 친구들의 가면을 참 많이 빌려 써보고 내 것 인양 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빌려 쓴 가면 중 그 가면으로 만난 친구들은 우리 모두 가면 안에 있는 걸 알면서도 그 가면의 모습으로만 우리를 기억해놓았어. 기억이란 건 상대방과 합의하에 저장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일방적으로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는 것 같아. 그래서 출력되어 나올 땐 결과 값이 달라 다들 당황하게 만드는 게 ‘기억’이라는 거지. 미묘한 차이 같지만, 기억과 추억의 결과 값이 그래서 다른 거야. 추억은 공통의 소재가 입력되고, 공통의 결과가 나오는데, 기억은 일방적 개인의 값이거든. 기억은 제대로 입력되었지만, 결과가 다르다는 건 기억을 추억으로 공유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내 생각의 뿌리가 튼튼한지 점검해보게 되는 거고.     

힘들었던 수험생의 시절을 보낸 후 어른이 되었어. 어른이 되면 어떤 가면이 어울릴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사실 나도 없었어. 그냥 빨리 스무 살의 나를 보고 싶었지, 스무 살의 내가 쓸 가면을 생각 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천재 같아. 스무 살이 되면 누구나 다 말하던 스무 살 만의 가면이 있었어.    

모험과 창의는 극소수에게 발견되는 가면이었고, 억압에서 풀려난 자유함의 가면, 어른인 척하는 서툰 가면, 이때부터 술만 마시면 개망나니가 되는 가면을 스스로 찾아 쓰는 이들도 있었어. 그리고 좌절, 허영, 이상 속에서 10대 때보다 조금 더 자랐다는 이유로 경제적 억압으로 인한 빈곤의 가면도 가지게 되고 말이야. 나도 내 또래가 쓰는 가면들을 썼던 것 같아. 스무 살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청년의 가면을 썼고, 스무 한 살에는 조금 세상이 보여 도전하는 청년의 가면을 썼고, 대학 졸업반이 되어서는 현실 앞에서 자꾸 좌절하려는 나를 보고는 기죽은 청년의 가면을 썼었지. 청년의 가면은 에둘러 표현한 거야. 앞서 말했던 자유, 도전, 좌절, 허영, 이상의 가면을 다양하게 써봤다는 거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면 나를 알 것 같았는데, 청년의 시기에 만나게 되는 가면도 온전히 나를 다 알 수는 없었어. 도대체 ‘나’라는 한 인간의 어른 가면은 언제쯤 가지게 될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 앞에 다시 막 닥뜨리게 되었어. 불안하고, 아픈 청년의 가면 외에 진짜 나의 가면은 도대체 뭘까? 서른이 되면 진짜 어른 가면을 가지게 될까? 불안하고 아픈 20대는 더 이상 풋풋한 시절이라 말할 수 없었어. 늘 궁핍함의 연속 가운데 치졸한 어른의 가면을 나도 모르게 썼던 것 같아. 그래서 이유 없는 분노와 분노의 대상을 10대 시절보다 더 잘 못 골랐지. 10대 때는 그래도 불의 앞에서는 용맹할 때가 있었거든. 반 친구가 억울하게 담임에게 혼나면 그 친구를 감싸주는 행동으로 단체기합 받는 걸로 불의 앞에서 정의로움을 표출했었어. 그런데 20대는 아니었어. 내가 단체 행동을 할 만한 ‘거리’들이 딱히 없었던 시절이었지. 그러다 보니 애꿎은 수많은 첫사랑들에게 청춘으로서의 내 분풀이도 풀어 보았어.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의 현재 그날 앞에서는 그날인지 몰라서 서툴고 상처 투성의 가면을 썼어. 그러니 나도 아프고 첫사랑도 아팠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진짜 <오래전 그날>의 오래전 그날이 되었을 때는 그날의 아픔이 내 탓이 아닌 첫사랑의 탓이라고 자기변명을 늘어놓았어. 추억이 될 수 있었던 걸 성숙하지 못한 나와 너는 기억으로 입력을 한 거지. 진짜 구질구질한 가면을 쓴 채로 말이야.    

드디어 알게 되었어. 내 지난 시간들에 대한 구질구질한 변명의 가면 앞에서 진짜 어른의 가면은 변명의 가면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쓰고 싶었던 성숙한 나이 때가 되면 갖게 될 가면! 바로 어른의 가면 중 일부는 지난 시간에 대한 변명의 가면이었어. 이 변명의 가면을 너도 봤지? 나 자신이 걸어왔던 길,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 사이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변명의 가면!

7살 때에 처음 인간의 가면에 대해 깨닫은 나로서는 내가 이 변명의 가면을 갖기 위해 그 간 그렇게 고민하고 찾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건 허무하다고 하는 거랑은 달라. 어른이라는 입장에서 그 변명의 가면은 내게만 적용된 게 아니었어. 엄마와,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아이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은 담임교사의 가면, 내게 착한 아이의 가면을 씌워준 또 다른 선생님의 권위적 가면!

난 정말 어른의 가면은 뭔가 대단한 것인 줄 알았어. 그래서 두려움에 떠는 어린 7살을 안아주지 않았고, 권력 앞에서 무능하게 반응하는 11살의 우리들을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줄 알았어. 내가 감히 가지지 못한 어른의 가면이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 갖게 된 가면이 용감한 가면도 아니고, 정직의 가면도 아니고, 지혜의 가면도 아닌 변명의 가면이었다니!

그럼 내가 이 가면을 가지는 순간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어른들의 변명이 내 것이 되는 거잖아. 그들에게 사과 한 번 받아 볼 핑계가 없어진 거지. 

나도 그 변명의 가면을 가지게 되었으니. 


하르트만은 자아 심리학에서 자아는 원초아이며 파생물이며, 심리적 갈등의 중재자라고 했어. 내가 지난 시간 내 안의 가면을 찾는 건 나의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시간이었다? 

갈등 다음에는? 

왜 내가 모든 갈등의 심리적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그 변명의 가면을 쓰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심리적 갈등의 해소 점을 보지 못해야 하는 거지. 

더 이상 자기소개에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너도 나도 우린 살아온 시간만큼 이미 너무 많은 가면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진짜 어른의 가면은 책임감의 가면이 아니라 변명의 가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변명의 가면보단 다른 가면을 더 쓸 수 있도록 나는 가면을 선별하는 분별력을 가져보려고.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수많은 가면들 중 내 모습이 아닌 게 없잖아. 이 순간 이 모든 것부터 변명의 테두리 안에 놓지 않아보려고. 

그러니 너도 나도 우리 손에 있는 모든 가면들 가운데 최적의 가면을 분별해서 써 봐. 가면 안의 나와 가면 밖의 나는 다 내 것이었고, 네 것이었어. 

네게 가면을 벗으라고 한 이들 모두 다 가면 한 개쯤은 다 있으니까, 가면은 가면대로 즐기고, 또 다른 가면을 찾아가 봐.

그렇다면 가면 인생을 살아가는 너와 나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을수 있을 거야.

이 이야기를 읽은 너도....나도 .... 이 순간만큼은 가면 뒤 고백이 아닌 진짜 고백이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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