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초당에 가면 꼭 들러봤으면 하는 장소가 있다. 허난설헌 생가인데 관광 목적으로 한 바퀴 돌아봐도 고요함 속의 새소리를 들으며 힐링하기 좋고, 이 인물과 시대상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되새기며 둘러봐도 좋은 장소이다.
허균과 허초희는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강남좌파 정도 되려나? 허난설헌 생가를 둘러보면 당시로써는 매우 잘 사는 양반 집안 자제들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허균의 홍길동전만 봐도 보수보다는 진보에 가까운 그의 사상을 확연히 알 수 있고, 허난설헌 또한 시대를 초월한 재능과 사회 비평 의식을 갖춘 진보 지식인이었다.
'난설헌'은 원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본명인 '허초희'는 없어지고 허난설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강릉에 오게 된 후 자주 접하게 되는 허난설헌 이야기. 초당이 집에서 차 타고 5분 거리이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막연히만 알고 있었던 허난설헌 인생사를 다시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허초희는 일찍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고 아름다운 용모까지 이른바 '우월한 유전자'를 모두 갖춘 여성이었다. 좋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사랑받으며 재능을 인정받고 가르침도 받았다. 불행의 시작은 여기부터였을까. 15세 무렵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그녀를 무시했고,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또한 그녀를 심하게 구박해 시집살이와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과 딸이 연이어 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허초희는 결국 27세의 나이에 원인모를 병으로 앓다가 사망한다.
원래 SNS에 시를 올리는 것은 남편 전문인데, 오늘 생가를 둘러보고 이 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공유해 본다.
<허초희 사망 후, 동생 허균이 그를 그리워하며 쓴 추모시>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