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의미 _ 육아일기 (D + 244일)

by 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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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한다. 물론 하던 일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 해봤자 상사의 말 한마디에 달라질 서류들이니 내일의 나에게 미룬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요즘은 열심히 일하기 싫다. 언제는 열심히 일하고 싶었겠냐만은 그래도 전엔 책임감을 가지고 내가 맡은 범위는 어떻게든 끝낸다는 마음가짐이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면 더 많은 업무를 주고 바빠질 뿐이다. 내 사인이 들어간 서류에 감사를 받는 건 덤이다. 약간은 회의감이 든다.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간다. 엊그제 입사한 것 같은데 어느새 8년 차이다. 어어~ 하다 보니 30대 중반이 되었고 인생의 노선을 급격히 틀 가능성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성실히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결국 남의 돈을 벌어주는 꼴이다.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면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마치 내가 미지근한 물속의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물이 끓어 냄비를 벗어나지 못할 텐데. 뭔가를 시도해 보고는 있지만 큰 리스크를 질 수 없어서 그런지 재테크가 전부인 것 같다.


막히는 퇴근길을 뚫고 집에 도착해 주차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이 열리자 아내와 코코가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날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는 코코의 모습에 여러 상념이 사라진다.

"아빠 보고 싶었어? 아빠도 코코 보고 싶었어~."

한껏 높은 톤으로 코코를 안고 말을 건다. 웃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아기가 없었다면 올해에도 뭔가 공허했을 것이다. 남는 시간을 관심 분야에 쏟는다고 해도 1년 안에 대단한 결과가 나오긴 힘드니 말이다. 하지만 3월에 태어난 코코는 키도 몸무게도 몰라보게 성장했고 기어 다니며 가끔 엄마 아빠라고 옹알이를 한다. 1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다. 내가 한건 씻기고 먹이고 재운 것 밖에 없는 데 점점 사람다워지는 모습이 신기하다. 육아에 쫓겨 자기 계발을 소홀히 했는 데도 뿌듯한 기분이 든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아니 서너 달만 지나도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기대가 된다.


이래서 아기를 키우나 싶다. 한 사람의 능력엔 한계가 있기에 무한히 성장하기는 어렵다. 30, 40대가 되면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이런 시기에 날 닮은 아기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 생동감이 느껴진다. 무채색이던 하루하루가 따뜻한 색깔로 덧씌워진다. 업무가 고되 스트레스를 받아도 사진첩을 열어 아이 사진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이런 게 행복이겠지. 가끔은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 데로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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