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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Nov 08. 2024

젊음이 무기라면

2021년 11월 10일 새벽 1시 18분 _


젊음이 무기인 때가 있었다. 허나 그때는 젊음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나의 무기인 줄로만 알았다. 젊음은 나에게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에. 어린 나이 때문에 다른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나이에, 그 경력에, 라는 수식을 떼면 초라하고 빈약한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했다. 때론 나이가 많은, 경력이 있는, 그 누군가를 쉬이 얕잡아 보기도 했다. 저 나이에, 저 경력에, 라는 색안경을 쓰고. 그들이 짊어진 무게와 그늘은 미처 알지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유독 큰 목소리로 전화하던 이가 있었다. 일자리를 알아보는 전화를 스스름없이 하던 그는, 무거워지면 옮기기 쉽지 않다는 말을 종종 했다. 가볍지 않다는 것을 넌지시 상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그의 뉘앙스는 그러나 매우 쓸쓸하게 들렸다. 연차를 강조하며 전화하던 그는, 점차 전화의 빈도가 줄었고, 언젠가부터는 처음 말한 연차에서 몇을 뺀 연차까지도 괜찮다며 말을 흐리기도 했다. 경력이 아니라 연차. 나이처럼 말하는 그 숫자는 어쩐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그저 구슬프게 들렸다. 이 나이 되도록 이란 말보다 이 연차 되도록 이란 말은 더 비참하게 가슴을 후볐다.


바이럴 필름을 만들려고 하는데요, 라는 요청은 말도 안 된다는 누군가의 글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좋은 필름과 바이럴 전략은 만들 수 있지만, 바이럴 필름은 만들 수 없다며. 바이럴은 바이럴 되어야 바이럴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바이럴 필름을 팔았다. 말하자면 미래를 판 것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팔리니까 팔았지. 수요는 많았다. 아쉬운 과거와 발등에 불 떨어진 현재보다는 불확실한 미래가 상사에게도 팔기 좋으니까. 달콤한 말. 스스로를 속이기도 좋으니까.


젊음에 취해 포텐셜을 잠재(확정) 가치로 착각한 나는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든지 필름을 만들고, 원한다면 그것을 바이럴 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던 사람들처럼. 내가 원할 때 불만 붙이면 뻥 터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다이너마이트.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손에 쥐고, 누군가 그것이 다이너마이트라고 한 적이 있어서, 나 스스로 그것이 다이너마이트라고 굳게 믿고. 몇 년을 달리다가 문득 그것이 다이너마이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안에서 끈적하게 녹아버린 그것은 설탕으로 만든 다이너마이트 모양의 사탕이었다.


젊음 버프가 사라지며, 포텐의 확률도 급감했다. 1등이 아니라도 3등은 될 줄 알았던 복권들은 하나씩 하나씩 꽝으로 밝혀졌다. 그 와중에 파릇파릇 어린 친구들이 복권을 주렁주렁 매달고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부럽다. 그 파릇파릇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하나도 긁지 않은 복권을 잔뜩 쥐고 있는 모습이. 동시에 저주한다. 머지않아 그것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도 알게 되겠지. 내 모습이 너의 미래다.


스타트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거참 솔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공한 소수 스타트업의 이미지를 후광으로 사용하는 저스트 스타트업도 있더라. 미래를 논하지 않던 과거의 열정 페이와 달리, 저스트 스타트업은 미래를 약속하는 열정 페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현재를 살뜰이 챙기는 투자자들도 있지만, 광부들은 그저 삽질을 한다. 이곳에서 새로운 광물이 나올 것이며 그것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말을 믿고.


열기구는 한정된 제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높이 활강한다. 어릴 적 그것이 참 신기했다. 풍선 같은 것이 비행기처럼 높이 날다니. 속도는 느리지만 그 여정은 훨씬 낭만적이지 않은가. 소수의 사람이지만, 공기를 뜨겁게 달구며, 둥실둥실 흘러간다. 기류에 자유롭진 않다. 로켓이라는 이름의 열기구도 있다. 이름 때문인지 화성에 가는 줄 알고 올라타는 사람들도 있다. 함부로 내릴 순 없다. 내려줄 때 내리면 된다. 대부분 로켓을 타진 못할 것이다. 열기구에 타 본 것으로 로켓 탑승권이 보장되진 않는다.


하늘이나 땅이나 방향은 중요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높이다. 높이의 차이가 길을 바꾼다. 대부분 지어진 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 땅과 달리 하늘은 사방이 뚫렸다. 고도의 폭까지 더해지면 땅과의 격차는 무한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길이 아니어도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기도 하다. 후딱 돌아가기도 어렵다. 성공만큼 실패도 빠르다. 리스크 역시 상당하다. 걷다가 넘어지면 심해도 뼈가 부러지겠지만, 하늘에서 추락하면 운이 좋아도 뼈가 아작난다.


땅에서 살아가는 나는 아무리 하늘을 가리켜도 그저 걸어야 하는 운명이다. 날지 못한다고 고개를 처박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날아다니는 이들을 평하는 것은 허무하다. 뛰어다니는 이들을 조소하는 것은 비겁하다. 그저 열심히 걷고 가끔 하늘도 보고 뛸 수 있을 땐 뛰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삼 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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