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의 회사 생활, 디톡스가 필요해
얼마 전, 3년 다니던 회사와 이별했다. 난 쿨하게 ‘퇴사’하고 책을 쓰거나 여행을 떠나는 멋진 분들과는 차원이 다른 찐따다. ‘아가리 퇴사러’로 살아 온지 너무 오래된 탓에, 친구들 마저도 나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치기 소년의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 막판에는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 막고 웃으며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가리 퇴사러의 누명을 벗고 ‘퇴사할 결심’이 섰다. 그것도 세 달에 걸쳐, 팀장님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졌다가. 시간을 갖자고 했다가. 겨울까지만 잘 지내보자고 재결합. 그리고 다시, 울었다가 웃었다가. 지난한 시간이었다.
‘퇴사’에 대한 나의 고민은 단순한 ‘고민’ 그 이상이었다. 아마 ‘퇴사학’이라는 학문이 생긴다면 내가 초대 교수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과 퇴사의 정의, 가치, 순기능, 역기능 등에 대해, 아주 근원적이고 복합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왔다.
난 안정과 자유를 동시에 원하는 불우한 팔자를 타고 나, 널뛰기 하듯 교차하는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려니 늘 잠이 모자랐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프리랜서라 생각했고, 회사에서는 열심히 고과를 챙겼다. 회사에서는 영혼 없이 보내려고 노력해봤지만 잘 안됐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영혼 없이 보내는 건 스스로에게 못할 짓이었다.내 동료들은 무슨 죄인가.
늘 생각해 온 ‘퇴사의 이유’는 하루라도 젋을 때 조직을 벗어나 보는 것이었다. 월급도 받기 싫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 그렇게 독립적으로 살아보기. 조수석이 아니라, 운전석에 앉아서 사고가 나더라도 내가 수습하고 싶다는 이상한 욕망.
인생은 결국 실험의 연속이라고 들었다. 생갑각류를 먹으니 두드러기가 나고 호흡이 힘든 날이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생갑각류를 안먹기 시작했다. 필라테스를 시작했더니, 고관절이 안아프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는 변화를 감지하고, 더 나은 조건을 만들며 인생을 완성해간다. 그렇다면, 조직 없이도 살아봐야지. 이 실험 결과는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꿀까. 5일차, 아직 별 거 없다.
어디로 이직하세요?
이직은 아니에요.
아, 그럼 이민가요?
이민도 아니에요.
인사팀과 면담을 하는데, 인사팀 동료가 나를 부쩍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직을 하고 그만둬야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어디 아프신건 아니죠?"라는 말만 반복한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갈 때 마다, 흰 도화지를 한 장 받는다. 이번 회사에서는 3년만에 도화지가 빼곡히 채워졌다. 다만, 이 회사와 함께 그려보고 싶은 그림은 모두 그린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새 도화지를 꺼냈다. 마케팅 전략, 브랜디드 콘텐츠, 광고, 카피라이팅. 9년이 그냥 흘러가진 않아 다행이다. 이러 저런 재주가 쌓였다. 그리고 9년 동안 퇴근 후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난리 부르스를 떨었더니, 작가가 됐다. 모든걸 다 융통하며 아름다운 '조직 디톡스' 기간을 보낼 수 있을까.
나의 디톡스 기간은 아름다울 것인가.
아니면 굶주리고 황망할 것인가.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2022.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