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아이들은 독립이 빠르다. 한국으로는 고등학생 정도만 되도 이제 무엇을 하며 살지, 독립을 고려하는 것 같. 첫째도 이곳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벌써 독립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동차 면허를 딸 궁리를 하기도 하고, 독립해서 혼자 사는 삶에 대해서 나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사실 첫째는 오래전에 집을 떠나 본 일이 있다. 아직 우리가 부산에 살 때, 지금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준비고 뭐고 없을때의 이야기다.
토요일에 나는 홀로 야근 중이었다.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문서작업을 하고 있었다. 긴 주말이 될 것이었다. 카카오톡이 울렸다. 둘째였다. 이상한 일이다. 무뚝뚝한 둘째는 좀처럼 메세지를 보내지 않는다. 답을 잘 하지도 않는데, 정말 급한 용무일때는 바로 답을 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연락을 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런 둘째가 동영상을 보냈다.
첫째와 엄마가 목소리를 높여 다투고 있었다. “왜 엄마는 맨날 나한테 ~~” 많이 들었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내의 목소리도 높았다. 익숙한 일이다. 그때 첫째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이였고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노트북을 덮고 사무실 불을 껐다. 센텀에서 해운대까지 자전거로 달렸다. 우회로가 아니라 자동차 도로로 가면 빠르다. 바람이 너무 차서 곧 얼굴에 감각이 없어졌다. 부산은 비교적 따뜻한 곳이지만, 아직 날씨가 찬 2월 말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애엄마는 안방에 있었고, 거실에 있던 둘째가 상황을 설명했다. 이녀석은 약간 웃긴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형이 집을 나갔다고 했다. 슬리퍼만 신고.
나도 가끔 크게 화를 낼 때가 있지만, 사실 집에서 큰 소리가 날 일은 흔치는 않다. 굳이 의도하고 머리를 쓰는 것은 아닌데,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내 방식은 시시비비에 딱히 집중해서 옳고그름을 따지지는 않는 것이다. 시비를 따져서 말싸움에서 이긴다면 내가 얻을 것이 없다? 내가 옳다는 사실은 인정시키는 데서 오는 만족? 아이에 대해서?
감정의 진폭을 크게 만드는 성장기 뇌내 호르몬 불균형은 애들의 책임이 아니다.게다가 아이가 갖는 불만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랑을 동생들과 나눠야 한다는 사실일텐데, 그걸 누가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당시 집에서 큰소리를 내는 것은 주로 사춘기인 큰애 였는데, 가족, 특히 동생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랬다. 왜 나한테만 그러고 ~~ 뭐 어쩌고 반복해서 떠들어 대는게 화난 아이의 화법이었는데 나는 그걸 가만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 라임이 죽이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 ‘고’ “ 동생한텐 안그러’고’
그리고 옆에서 거드는 것이다.
“비트주세요. 첵! 첵!” 그러면 동생들은 옆에서 피식하고 열받아서 떠들던 첫째도 지가 생각해도 웃기는지 한참 떠들다가 풉 하고는 지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구는 것이다. 아이들이 당시 한참 고딩래퍼나 쇼미더머니 같은 랩에 빠져있었을 때다.
아내는 아직도 분이 안풀려 있었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것은 둘째였는데 이녀석은 슬쩍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다시 자전거를 끌고 나가며 큰애에게 전화를 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카톡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라면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 했다. 추운 날씨고, 해운대 꼬꼬마들이 이 오밤중에 갈만한 데는 평소에도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편의점 정도일 것이다. 나는 학교 앞 부터, 해운대 일대의 편의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무데도 없었고, 내가 설명한 인상착의의 아이가 방문한 적도 없다고 했다. 두시간 내에, 해운대 중동과 좌동 일대의 모든 편의점 알바들은 머리에 금발 브릿지를한,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한 몸매의 귀엽게 생긴 중학생 하나가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바닷가에 가서 고독을 씹고 있지 않을까 해서 해운대 해변과, 거기에 이어진 동백섬 공원전체를 자전거를 타고 샅샅이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다. 새벽 바닷가는 호되게 추웠고 무엇보다 사람이 없어 어두컴컴했다. 아이는 겁이 많아서 여기 오진 않았을 것이다. 겁이 많은건 사실 좋은 일이다.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날드에도 가 보았다.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이층에는 콜을 기다리는 배달부들이 쉬거나 벤치위에 누워 있었다. 아이는 거기도 없었다. 돈도 없고, 얇은 옷을 입은 슬리퍼 차림의 아이가 어디를 갔을까?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니 이제는 아내도 걱정을 한다. 동생들도 아직 깨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는 침대에 누워 심드렁 하게 이야기 했다.
“아니 날도 추운데 형은 이럴때 무슨 가출을 하고 그래?”
임마 너도 화나면 그럴 수 있는거야.
“무슨 소리야. 일단 열받는 일이 있으면 나면 딱 내 침대에 누워서 아이패드 키고, 포테이토 칩 하나 먹으면서 침착맨 같은거 하나 딱 보면,, 캬~~~ 내가 왜 집을 나가?”
큰 아이 방에 들어가보려 하니 꼬깃 꼬깃 접은 만원짜리가 큰방 입구에 놓여있었다. 어 이 만원은 뭐야? 하니 거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던 막내가 땅이 꺼지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돈한푼 없이 집나가는 형이 걱정됐는지 이 꼬마녀석은 만원을 집나가는 형 방 앞에 놓아둔 것이다. 우리집에서는 학년당 1000원씩 일주일 용돈을 줬다. 당시 막내는 3학년이니까 일주일에 3천원을 받았는데 그걸로 막내가 좋아하는 마이쮸도 사먹고 가끔은 친구들과 회오리 감자도 사먹었지만 조금씩 저축도 했다. 이 다정한 귀염둥이는 그렇게 알토란 같이 모은 10000원을 집나가는 형님에게 주려고 문앞에 놓은 것이다. 첫째는 막내가 자기방 근처에만 와도 소리를 질러대서 막내는 첫째형을 무서워했다.
아이 방에서 과연 아이가 어디갔을까? 생각하다가 아이의 노트북을 열어보았다.
이녀석은 자기방 전구나 노트북 전원을 끄지 않는데, 엄마 주된 잔소리 레파토리 중 하나다.
아이가 열어놓은 디스코드 창이 열려있다. 게임용 메신저인 디스코드로 아이는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음성으로 떠들곤 한다. 아직 로그인이 되어 있다. 혹시 폰으로 접속해서 친구들과 이야기 한건 아닌가 하고 채팅방을 둘러보고 있을때, 첫째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내 디스코드 들어가지마
지금 어디야?
-몰라 말하기 싫어
춥지 않냐?
-XX이한테 패딩 빌렸어.
돈은 좀 있냐?
-없어
아빠는 너 맥도날드 갔을거라 생각했는데 없데?
-갔었는데, 무서운 형들이 많아서 그냥 나왔어
편의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더니 없더군
-돈이 없는데 가서 뭐해
그럼 계속 돌아다닌거야?
- 응
그럼 이건 어때? 지금 아빠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데 거긴 따뜻하고 먹을것도 있다. 소파옆에 장 열어보면 아빠가끔 쓰는 담요 접혀있으니 그거 쓰면되 비번은 XXXXXX야
-그럴까?
거기까진 갈 수 있냐?
-응
도착하면 말해라 문 안열려도 전화하고. 히터 스위치는 문 바로 옆에 있다. 건조하니까 가습기 스위치 올려.
나는 대략 상황을 설명하고 애들을 재웠다.아침에 회사에 나가보니 회사 소파에서 자고 있다. 삼선 슬리퍼가 옆에 나동그라져 있다. 1리터 콜라가 반쯤 비워져 있다. 목이 말랐나보다.
어제 마무리 못한 일을 하고 있으니 첫째가 깨어났다. 뭘 먹고 싶냐고 했더니 돼지국밥을 먹고싶다고 한다. 센텀에는 제대로된 돼지국밥이 없고 수구레 국밥이 있다. 한블럭을 걸어가서 아이 밥을 먹이고 나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둘이 먹으며 들어왔다.
사무실에서는 내 컴퓨터로 게임을 실컷 했다. 최고급 사양으로 맞춘 내 사무실 컴퓨터는 안 돌아가는 게임이 없고 내 스팀 계정에는 게임이 300개 정도 된다. 무슨 피시방에라도 간듯이 내 헤드폰을 끼고 친구들과 떠들며 게임을 한 아이는 나와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가서는 방으로 쌩 하고 들어가버렸다. 아무도 딱히 물어보지 않는다.
다음날이 되니 늦잠을 잔 아이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묻는다. “뭐 먹을거 있어?”
상황은 종료되었고, 막내가 알토란 처럼 모은 만원은 첫째가 가졌다.
다행히 첫째의 가출 사건은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가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춘기 아이에게는 어떤 일이든 생길 수 있다. 어르신들의 ‘애가 옆에 있을때는 정말 잘 봐야해. 눈도 깜빡하면 안된다.’ 라는 말은 아가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은 위험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 우리 첫째와 꼭 닮았던 친구 기백이는 집앞의 수영장 배수구에 팔이 끼었고, 사람들이 발견했을때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기백이는 며칠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여물지 않은 작은 장기들을 기증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작년에, 이제 곧 성인이 되는 첫째가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했을때 기백이 부모님들은 첫째를 꼭 만나보고 싶어했다. 나는 그분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분들이 가졌을 슬픔의 깊이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다. 우리 첫째와 키도 같고 외모도 비슷했던, 동글동글하고 착했던 기백이는 아마 첫째처럼 운동을 좋아하게 됐으리라, 그리고 어느덧 아빠보다 더 커지고 어깨도 벌어지고 코밑에는 거뭇거뭇 수염도 났을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애도 생기고 분명히 기백이를 좋아할 여자애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해운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착한 기백이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면 좋겠다.
항상 유머와 여유가 넘치던 내 초등학교 동창은 아들이 학교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배로 떠났을때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 지 몰랐다. 세월호라는 그 배가 조난됐을때 다행히도 친구 아들은 구조됐지만 그 친구는 그 이후 웃음을 잃어버렸다.
어떤 위험과 슬픔은 우리가 대비를 하고 싶어도 해도 할 수가 없다. 지금껏 비교적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다면,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세상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암벽을 홀로 올라가는 것과 같고, 가족을 이끌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족들이 탄 작은 배를 끌고 대양을 나서는 것과 같다. 그 대양에 어떤 폭풍우와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안개가 우리의 시야를 가로 막을지 미리 알 방법이 없다. 조심할 뿐이다. 멀리서 위험을 알려주는 등대가 있으면 좋으련만, 내 소견으로 세상에 등대처럼 보이는 것들의 상당수는 허깨비와도 같다. 특히 자기가 세상의 등대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대부분 가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서로에게 작은 등대는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길을 잃고 헤맬때가 온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에서 금방 금방 벗어나는 것도 같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등대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