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세상에 악인이 많은 이유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문제에서 벗어나 스웨덴의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버트란드 러셀에게 편지로 아이들의 학부모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악한지 하소연을 한 일이 있다.
러셀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학부모들은 대개 악하지' 라고 대답했다.
러셀정도의 지성이, 겨우 시골 학부모들을 악하다라고 단정지었을리가 없다. 그리고 어린 아이를 학교에 보낸 학부모들이, 악하면 얼마나 또 악했을 것인가?
내 생각에 이 일화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누구나 ‘악한 부류’로 불릴 수 있으며,
우리는 종종 한 부류로 묶을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로 불러서 악마화 하기 쉽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옥스포드에 왔을 때 지인들에게
‘신 이 도착했네’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지성에 압도되어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 정도의 지성도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러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러셀은 우리 모두 그런 감정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 마저도.
세상은 구석구석 악의와 갈등으로 가득 찬 것 처럼 보인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폭력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고칠 수 없는 못된 습성을 가진 남편을 욕하는 아내가 얼마나 많은가? ,
반면 부정하거나 사치스럽거나 교만한 아내들은 얼마나 또 많은가?
시부모란건 다 악한 것 같고, 요즘 며느리들은 약삭빠르고 사악하며,
나이먹은 꼰대들은 악하며, 나이어리고 싸가지 없는 놈들의 악은 아마도 그 본성에서 나왔으리라.
상사는 악하고 부하직원도 악하다.
남자는 악하며, 또 여자는 악하다.
늙은이는 악하며 어린것들도 사실은 악하다.
부자는 분명히 악한데, 가난한자들 역시 악하다.
그렇게 말할 확실한 근거는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 나설 용기가 부족해서, 이해할 수 없는 상처를 많이 받아서
이 세상이 악의에 차 있다는걸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수많은 악의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그런 얘들로 절망한 사람들에게 확신을 준다.
가장 사악한 자들은 이런 세상의 악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파적인 이익을 얻으려 하는 자들인데
우리는 그것을 갈라치기라 부른다.
여자를 욕해서 남자의 지지를 얻고,
늙은이를 욕해서 젊은이의 지지를 얻는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런 갈라치기를 하는 자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 하는자가 아니라는걸 쉽게 알 수 있다.
증오의 증폭을 통해 자신이 얻으려는 것을 구하려 할 뿐이다.
그런 자들은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원래, 타인의 지성에 호소하기 보다는 무지를 레버리지로 선동하는 것이 훨씬 쉬운 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의 무지를 레버리지로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맞서야 하는게 아마도 지식인의 책무일텐데,
이익이 주요한 판단 기준이 된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악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정확히는, 그런 악들의 해악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내 생각에는 그 악의 근원, 그리고 우리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악마화 하는 과정을 이해하는게 최선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세상에 만연한, 악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악을 발견하긴 쉽지만 반면에
우리가 저지르는 악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똑 같은 일을 당하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건 대체로 되돌릴 수 없다.
오늘 비에 져버린 벚꽃이 올해 다신 필 수 없듯이.
우리가 내년에 그걸 다시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듯이.
우리가 저지른 악은 대부분 비가역적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정말 멀쩡하고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는 건전한 인간이라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생의 한 국면에서 서로에게 배려와 자신의 의무를 잊을 때
우리의 사소한 편익을 위해 타인의 입장을 외면할 때
우리는 아주 쉽게 상대에 대한 가해자가 된다.
우리는 언제든 악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악은 마치 시원한 샘물 한잔에 탄 오물처럼
그 물 전체를 오물로 만들어버린다.
세상에 악이 가득차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악의 이런 속성 때문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를거라 생각한다.
들키지 않으면 악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심지어 드러난다 해도 우리는 항상 변명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건 자기 자신을 합리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법이다.
대단히 멀쩡해 보이고,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악의만으로도 간단하다.
이러니 악은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타인의 바램과 입장을 무시할 때
우리는 언제나 악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악은 때로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손쉽게 인간은
‘그렇게 사소한거 가지고 뭘 그래’ 라고 말하곤 한다.
악이 세상에 만연한 것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악의 만연은 피할 수 없다. 순수한 물이 존재하기 힘들듯이.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충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세상에 악이 만연한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악을 저지르는 일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그런 필연적인 악과 사람들의 무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