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더 말랑말랑해진거야?
딱딱하고 단단하고 엄격한 고체는 아니고, 말캉하게 흔들리지만 자기 본연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젤라틴 같은 것도 아니고 액체처럼 흐르는 것도 아니다. 나의 말랑말랑함은 어떠한 것인가? 구름같은 것, 밀도의 차이로 경계지워지는 기체적 현상과 같은 것인가? 너를 둘러싸고 네 입김 하나하나에 흩어지고 다시 뭉쳐들다가 조심스레 언어의 구름들로 너를 감싼다. 고체인 너의 표면이 내 미풍에 발게지기라도 하면 둥글게 기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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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때로 돌처럼 단단해져서 차가운 눈빛으로 얼음 조각들을 내뱉는다. 나는 서너뼘 떨어져 그 단단하고 매몰찬 존재를 바라본다. 그러면 나 또한 엄격해져서 내게 가장 익숙한 무기인 언어와 논리를 나열하며 갑옷처럼 무장한다.
너는 성벽을 쌓고 무기를 정비하고 항상, 언제든 박차고 튕겨나갈 수 있게 테세를 갖춘다. 너는 너의 무기를 손질하는데 나는 자꾸, "이것은 전쟁일까?" "승리란 무엇이고 패배란 무엇일까?" "이 구조가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우선 성찰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소리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무기가 중요함을 안다. 사고의 자유와 현실에서의 힘, 그 둘 모두 필요하고 모두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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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여성적이라고 한다. 그 여성스러움은 단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방식, 단어를 선택하고 부드럽게 배열하는 습관, 목소리와 제스쳐, 내가 반복해 이야기하는 공동체, 돌봄, 상생 같은 가치들에서도 온다고. 나는 그 '여성적'인 것과 페미니즘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만들어낸 모더니즘적 가치, 진보, 이성, 경쟁, 과학과 기술의 발전, 남성성, 마초성에서 배제된 삶의 방식과 존재 양태들을 재조명하고 모더니즘이 만들어낸 역사와 정상성에 대한 내러티브를 의심하며 복수 서사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고자 하는게 넓은 의미에서의 페미니즘이고 나는 그러한 면에서 페미니스트라고. 남성 혐오자가 아니라 다양한 남성성의 현현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그 말은 너에게 어떻게 닿았는지. 이 말들이 어떤 면에서는 껍데기 뿐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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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그는 나의 눈먼 낙관주의를 꼬집었고, 나는 내가 눈이 먼 것일까, 자문한다. 한치 앞밖에 보이지 않는 길에서 눈이 멀지 않음이란 무엇일까, 나이브한 것과 긍정적인 것 사이의 경계는 현실에 대한 확실한 인지와 이에 따른 실천 유무의 차이인가? 그의 말은 내가 다시 의식적으로 내 삶을 사각의 틀로 구획하고 그 안을 꼼꼼하게 채워넣기를 촉구한다.
그에겐 나를 안아줄, 나에겐 그를 인정해줄 여유가 없는 것일까? 나는 우리의 각지고 딱딱한 표면이 뻑뻑하게 맞닿는 것을 느낀다. 더욱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떠한 사랑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 피부에 와닿는 그의 살결과 그 무게조차도 거칠고 낯설고 이질적인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어느 밤에.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잘 될 것이라고 따뜻하게 속삭여줄 목소리, 안아주고 쓰다듬어 줄 그런 감촉을 찾았던 것 같은데. 그것은 타인에게서 찾는 가치가 아닌 것일수도. 현실을 일깨워야 하나? 얼마나 갖추어져야 나는 당당하고 근심없이 사랑 속에 젖어들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