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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Sep 28. 2024

나는 살아있는 부드러운 중심에 있다

햇살이 포근해, 봄인가-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것을 걸치면 되는가- 하다가도 막상 나가면 바람이 차 옷섬을 조이게 하는 날씨다.  일찌감치 잠들어 맑은 몸으로 일어났다. 꼼꼼히 씻고 요가로 몸을 풀고나니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서 늦을세라 속도감 있는 호흡으로 어제 읽던 글을 마저 읽었다.


지금이라는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순간을 그림과 글로, 또 내 삶으로 감각하는 하루였다.


순간

순간 속에 있음.

공기 방울처럼 맺혀서 유기체처럼 살아있는 현재의 기운들.


다음은 미지의 것, 오직 순간을 호흡하고, 세계와 살로서 접촉하고, 걷듯이 유희하면서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점심에 본 갤러리 현대의 전시 <풍경>과 요즘 읽고 있는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 그리고 퇴근 후 H와의 만남에서 나는 현재의 다채롭고 신비한 감각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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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현대에서는 1960년대생 중견 작가 김민정, 도윤희, 정주영의 삼인전이 진행중이었다. 큰 기대없이 들어선 그 곳에서 이들이 캔버스와 물감으로 만들어낸 물질들에 황홀하게 젖어들었다.


김민정은 한지에 먹을 겹겹이 쌓아 서로 다른 농도의 면을 만들어내고 짙은 원색의 수채화 물감을 더해 추상과 구상 사이의 형태를 만든다. 이브 클라인 블루 같은 세련되고 차가운 파랑, 내면의 불타는 기운을 닮은 빨강, 짙고 따뜻한 주황이 종이 위에서 먹과 교차하고 서로 스며들며 내면 풍경을 만들어낸다.


Primavera1998, ink and watercolor on mulberry Hanji paper, 67.5 x 62.6 cm



전시장에 들어서면 처음 마주하는 <Primavera>에는 달팽이집처럼 꼬여있는  형태가 그려져 있는데, 중심을 향할수록 더욱 작게 쪼개진 조각들이 서로 겹쳐있다. 내면으로 수렴하거나 안에서부터 발산하는 형상이다. 어떤 순간의 정동적 역동, 혹은 한 존재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 눈 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먹의 형태를 따라서는 색 조각들이 꽂혀 있다. 이 공학적이고 귀족적인 파랑은 무엇일까, 어떤 감정의 순간일까? 이탈리아어로 '봄'을 뜻하는 제목처럼 겨울의 조각들을 녹이며 피어나는 봄의 기운인가, 어떤 고고하고 도도한 마음의 동요인가?   


Natura1996, ink and watercolor on mulberry Hanji paper, 101 x 136.5 cm



Untitled


<Natura>에서는 붉음과 검음으로 대비되는  두 서로 다른 모순적 힘 사이의 충돌과 교차가 연상되고, <Untitled>은 칸칸이 나누어진 시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낸 흔적과 발광하는 시간의 잔상을 한데 모은 것 같다. 한지에 스민 물감과 직관적이고 결정적인 붓질, 이 조형을 만들어낸 마음과 연결되었다고 느끼면서 층계를 이동할 때마다 새로이 펼쳐지는 김민정의 작업을 기대하며 전시를 보았다.



이 먹의 형태들 옆에는 자연을 닮은 반추상 풍경을 그린 도윤희의 유화 작업이 있었다. 대형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화면은 납작하고 광택있게 표현되어 있다. 한지에 스미는 먹과 달리 캔버스에 칠을 거듭하며 쌓이는 물감은 한 겹 입혀질수록 이전의 시간들을 비밀스럽게 감춘다.


Night Erases Day2007-2008, oil and pencil with varnish on linen, 141 x 636 cm (triptych)


이것은 파도인가, 산인가, 어느 저녁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인가? 아니면 내면 풍경, 혹은 그저 색과 형태들의 망막적 유희인가? 이 모두인 것 같았다. 이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을까? 한 풍경 앞에 선 우리는 이 모두를 동시에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상과 마음의 상, 객관과 주관은 구분할 수 없게 상호침투하며 '보기'를 형성하고, 이는 결국 선과 색과 빛이 이루어낸 질서에 다름 아니니까.  


마음은 자연을 닮았고, 우리는 때로 자연에 마음을 투사해서 은유적으로 풍경을 인식한다. <Night Erases Day> 가 파도 같으면서도 동시에 겉잡을 수 없이 일렁이는 인간의 심연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음의 해석을 거쳐 재현한 이 자연 풍경은 어쩌면 자연 자체보다도 더 내밀하고, 친밀하고, 슬프고, 아름답다. 풍경 속을 산 인간이 길어낸 풍경이다. 풍경에서 발견한 순간의 마음이다.



Being - Swamp1996, oil and pencil with varnish on linen, 122 x 244 cm



도윤희의 작업 중 지하 1층에 전시되어 있던  <Being - Swamp>가 인상 깊었다.  어느 저녁 어스름, 하늘이 분홍빛 어둠으로 물들었을 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을 그린 풍경화 같으면서도, 그림에 다가가보면 그 마치 노이즈처럼, 공기 방울처럼, 서로 다른 모양의 둥근 형태들이 각각의 밀도로 화면을 채우고 있다. 어느 시적인 밤,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순간의 질감을 담아내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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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 그림들이 '순간'의 '살아 있는' '찰나의 느낌'을 표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리스펙토르를 읽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어들은 그녀로부터 왔다.  현재의 생명 그 자체를 담아내려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말을 해야겠다: 나는 이 '지금-순간-의 사차원을 포착하려 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이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지금-순간이 되었으며, 그것 또한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순간 속에 있다. 나는 이 '있음'을 붙잡고 싶다. 그 순간들은 내가 호흡하는 공기 속을 지나다닌다: 그것들은 폭죽이 되어 공중에서 아무런 소리 없이 폭발한다. 나는 시간의 원자들을 갖고 싶다. 그리고 현재를 붙잡는 일은 그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상 금지돼 있다. 현재는 스르르 사라져 버리며, 모든 순간이 그와 같다. 이 순간 나는 영원한 지금 속에 있다. "


혹은 아래와 같은 대목에서 그녀는 생의 신비를 탐색한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살아남아 있는 이 숲은 무척 신비롭다. 하지만 지금 나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비 속으로. 나는 그 신비의 핵 속에서 원생동물처럼 헤엄치는데, 왜냐하면 나 역시 신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세계 속에서 신비로움에 감화된 존재가 시간의 원자들을 붙잡고자 한다. 리스펙토르는 글로써, 오늘의 두 작가는 생각 너머에 존재하는 그림 그 자체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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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리스펙토르의 문장을 읽으며 H를 만나러 갔다. H와의 만남에 이 문장들이 어울린다고도 생각했고, 오늘은 그저 이러한 마음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H와의 시간, 어째서 그 순간에 대한 기억들은 일상의 여타 시간과는 다른지. 내가 말랑말랑해지기 떄문이다. 내 형태를 붙잡아 두는 키틴질의 껍질들이 유해지고 흐물흐물해지기 때문이다. 통상 나는 주어진 일들을 자동적으로 해내고 다소 습관적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 일과 속에서 단단하게 거듭나기도, 한켠 딱딱하고 비어 있게 되어가기도 하는데, H와 만나면 나는 서서히 다른 상태로 변모한다. 나는 속살이 된다.


나를 지키는 논리적인 언어는 빈번히 빗나간다. 말이 명중하지 않고 미끄러지는 것이, 그래서 공간을 채우는 어떤 음향이나 물질이 되는 것이 더 좋다. 더 좋은가? 처음에는 이 급작스러운 언어적 무능함이, 내 신체가 오작동하는 듯한 느낌이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이 무언가 다른 것의 열림, 혹은 상태 변화의 효과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다. 오히려 나의 언어가 너무나도 유식하고 유려하게 작동한 날, 예컨대 페미니즘과 정치와 미학에 대해 견고한 논리를 말로 구축했던 날, 돌이켰을 때 나는 그것이 언어적 무장이라고 느꼈다. 말이 거듭될수록 나의 살은 갑각류처럼 경화되었다. 내가 그의 앞에서 갑옷처럼 논리의 벽을 세웠으며 그 날 공기 중에는 사랑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랑의 말하기, 몸의 말하기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그것은 속삭임이거나 옹알거림이거나 어디에 도달하는지 모르는 진동들인가? 혹은 말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내용과 소리와 속도와 눈빛, 그 모든 공명이 형성하는 인상으로써,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소통되는 것인가?



"있다."

"나는 아직 있다."

"나는 가고 있다."


H와 있으면 나는 낯선 영역으로 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한가지 가능한 대답으로써, 말랑말랑해진다, 라고 자주 썼다. 부드러워진다, 둥글어진다. 얇은 막으로만 감싸인 생물처럼, 나는 현재 앞에 벗겨진다.


시간은 순간이 된다. 그는 그 순간의 그 자체, 나는 그 순간의 나 자체가 된다. 우리의 피부와 눈빛과 주름을 이루는 과거는 오로지 그 피부와 눈빛과 주름으로서만, 어떤 표면이자 물질로서의 깊이로만 현재에 존재한다. 순간의 눈빛과 몸짓을 읽어내는 것만이, 그 일렁임에 물처럼 흐르듯이 반응하며 모양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중요해지는 시간. 주변 세계는 물빛으로 몽롱하게 후퇴하고, 소프트 페달을 밟은 듯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의 목소리에는 둥근 공명이 서려있다. 다소 감기고 끔뻑이는 상태로 우리의 표정과 몸은 이완된다.  



고체에서 액체로, 유체로, 기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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