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터 Aug 20. 2024

4. 태도를 선택할 자유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 박사를 이수하고 정신과 의사로 살아가던 빅터 프랭클은 2차 대전 시기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에 유태인 수용소에 수용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1) 유대인 수용소 안에서 가족을 잃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여러 번 마주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안전한 귀향을 꿈꾸던 동료들과 2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출소할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곳에서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던 것은 삶의 의지와 의미였다. 당연한 인간의 권리를 철저히 박탈당하고 모든 자유를 거부당하는 절망적 상황에 놓이더라도, 마지막에는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 태도가 수용소 안의 역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출발점이었음을 시사한다. 굶주림과 가혹한 노동, 가스실로 가는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던 사람들을 보면서도 환경에 저항하고 존엄성을 지키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를 박탈하지는 못했다. 삶의 의미는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는 삶의 가치이다. 누군가 100억을 주면 받겠는가? 100억을 받는 대신 당신에게 내일이 오지 않고 오늘 삶이 끝난다 해도 받겠는가? 받지 않겠다면 당신의 내일은 오늘의 100억보다 가치 있음이 분명하다.  

때로 삶은 차갑고 거친 자갈밭에 누워서 보내는 하룻밤과 같고, 한 번씩 일은 먹지 못하는 음식을 억지로 삼키듯 고역스럽다. 그런 삶을 대하는 태도는 온전히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내 앞에 일어나는 일들에 직면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 우리의 내일은 그렇게 더 큰 가치를 머금게 된다.  


일상의 삶을 건조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소통의 어려움이다. 사람들은 내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내가 말하는 것의 진심을 몰라준다. 과거에 했던 이야기가 왜곡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서로 같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견해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뜻밖의 간단한 대화 안에서 오해가 생길 때도 있다.  


「테이블 위에 사과가 있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알고 있다. 테이블 위에 사과 껍질만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사과 씨앗만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특히 사과가 아닌 구두만 덩그러니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일상적 언어생활에서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먹을 수 있는 사과인지, 먹어서는 안 될 장식용 사과인지, 아니면 모양이 사과인 장난감이 있는 것인지 한 문장만으로는 불명확하다. 설사 테이블 위에 과일 사과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해도 그 사과를 내가 먹어도 되는지, 남이 먹으려고 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만약 오후에 학교를 다녀오는 아이에게 이 말을 한다면 ‘사과를 먹어도 좋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아침에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하는 말이라면 ‘학교 준비물로 사과를 잊지 말고 챙겨라.’라는 뜻이 될수도 있다. 뜻밖에도 테이블 위에는 이름이 ‘사과’인 고양이 한 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테이블’이 큼지막한 한 마리 개의 이름이라면? 우리가 이 말의 뜻을 알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의미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단어와 문장으로 의사소통하고 있지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진 상황들에 처한다. 단지 단어가 분명하고 문장의 형식이 단순하다고 해서 분명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착각일지 모른다. 서로가 처한 상황과 머릿속의 배경 지식과 정서에 따라 대화 내용은 서로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면 원활한 소통이란 어떤 것인가? 원활한 소통이란 상대방이 말한 것을 내가 이해한 것이고, 반대로 내가 말한 것을 상대방이 이해한 것이다. 나아가, 상대방이 말한 것을 내가 이해하고 있음을 상대방 또한 알고 있고, 내가 말한 것을 상대방이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소통이다. 이러한 소통은 언어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 서로가 알고 있는 공유된 경험 등 비언어적 요소와 공감 능력을 동원해야 바르게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경우를 겪는다. 특히 마음을 담은 대화에서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하는 소통의 지혜가 필요하다. 


고려대 심리학부 명예교수 한성열 교수는 저서 ‘이제는 나로 살아야 한다’에서 소통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리대화(事理對話)와 심정대화(心情對話)를 설명한다.2) 사리대화는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이성적 대화다. 두 친구가 길을 걷다가 한 친구가 “지금 몇 시야?”라고 물을 때, “지금 1시 10분 다 되어 가. 5분 뒤면 도착할 거야”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사리대화이다. 반면 심정대화는 감정을 주고받기 위한 대화이다. “늦을까 봐 걱정되는구나? 지금 1시 10분인데, 도착하면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자!”라고 한다면 속마음을 담아 대화하는 심정대화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는 사리대화와 심정대화가 교차하며 사실과 속마음을 넘나들며 소통하게 된다. 마음의 목적에 맞추어 소통한다면, 더욱 신뢰할 수 있고 통하는 사람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1)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20.  


2) 한성열, 「이제는 나로 살아야 한다」, 21세기북스,

매거진의 이전글 3.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