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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Sep 13. 2020

요조가 말했다

6화. 오늘도 다시 출근할 용기

출근할 때마다 내가 탄 지하철은 당산철교를 건넌다. 내내 지하 철로를 달리다 마침내 한강 위로 훅! 빠져나오는 순간 창밖으로 보이는 눈부신 풍경에 거북목으로 스마트폰만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책방 무사의 주인이기도 한 요조가 한 팟캐스트에 나와서 자작시 한 편을 나른한 목소리로 낭송했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창문 안으로 쏴- 쏟아지는 햇살을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로 비유한 시였다. 그때부터 당산철교 위를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짝짝짝짝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받는 기분이 든다. 하던 일을 멈추고 저 멀리 보이는 여의도의 들쭉날쭉한 건물들과 고요한 한강을 바라본다. 퇴근길 야경은 또 얼마나 예쁜지. 그건 뭐랄까 도시에서만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사치 같다.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른 사람들도 매번 지하철 창밖 풍경에 설렘 가득한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하다, 그건 짝짝짝짝 햇빛의 박수 소리 때문일까.


늦은 여름쯤이었다. 그날은 운이 좋게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타자마자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졸다가 지하철이 당산역을 지나 한강을 건너면서 머리 위로 들이닥친 눈부신 햇살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던 외국인 여자와 눈이 마주쳐 가볍게 눈인사를 했는데 한눈에 봐도 쉰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여행객이었다. 자기 키만 한 커다란 배낭을 멘 채 민소매 티셔츠 위로 드러난 팔뚝에는 근육이 적당히 잡혀 있었고 노브라였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무엇이 비치든지 간에 다른 사람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당당함과 건강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환한 표정. 멋있다. 지금 반짝이고 있는 건 지하철 창에 비친 한강의 윤슬이 아니라 저 여자의 얼굴일 것이다.


저렇게 늙고 싶다. 팔과 다리에 붙어 있는 적당한 근육, 먼 길도 주저하지 않고 씩씩하게 걷기에 모자람 없이 넉넉한 에너지, 대중교통에서 눈을 마주친 낯선 사람에게 머뭇거리지 않고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는 부담스럽지 않은 사교성, 여행용 트렁크 대신 배낭을 챙기는 도전 정신으로 늙었어도 영원히 늙지 않는 할머니가 된다면 더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손뜨개질로 짠 꽃무늬 조끼에 교정지가 잔뜩 든 에코백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합정역을 씩씩하게 왔다 갔따 하는 할머니, 원고를 수정하느라 손가락 사이사이 언제 묻었는지 모를 빨간 펜 자국에 까르르 웃는 귀여운 할머니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무릎 관절도 안 좋고 노안으로 글자가 제대로 보일까 싶은 나이에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라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상하는 내가 몹시 짠했기 때문이다. 운이 나빠 적당한 나이에 죽지 못하고 할머니가 될 바에야 건물주 할머니가 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니. 박봉에도 쓸데없이 성실한 데다가 소확행이다 뭐다 하면서 저축은커녕 작고 소중한 월급을 탕진하는 이 나라 일꾼의 미래가 늙은 일꾼이라니. 이 얘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자기는 웃긴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농담에 능숙한 할머니도 왠지 섹시하고 멋있다며 우리는 신이 나서 생맥주 한 잔을 추가했다.


일상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본다. 보고 나면 내가 브리짓 존스가 된 기분에 심취한다. 살이 쪄 엄청나게 큰 팬티를 입어도,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실수와 실패를 계속하더라도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서울 게 없는 브리짓. 창피한 일이 벌어지고 또 벌어져도 한 번 더 시도해보는 용기로 똘똘 뭉친 그녀를 볼 때마다 내게도 가까운 미래에 금방, 곧, 머지않아, 인생의 명장면이 펼쳐지리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까 매 순간 사랑스러운 브리짓처럼, 2호선에서 만난 노브라 외국인 여행객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아무래도 행복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그리 거창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행복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늘 있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짝짝짝.

박수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요조가 출연한 오디오 방송 중 기억에 많이 남는 팟캐스트

http://www.podbbang.com/ch/8476?e=2177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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