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박사의실험실
새벽 무렵 눈을 떴다. 3시 40분. 알람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다시 눈이 반짝 뜨인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한 새벽인 것처럼 캄캄하지만, 시간은 벌써 6시.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 무렵 창가로 밝은 햇살이 흘러들었는데, 이제 정말 가을이 푹 익어 가는가 보다. 누운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져든다. 서늘한 새벽 공기에 가라앉은 마음을 비집고 속절없이 빨리 지나가는 시간과, 흘려보낸 인연들, 아직 채우지 못한 삶의 조건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든다.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부쩍 힘도 없다. 아무래도 나, 가을 타는 것 같아! 사실 주변에 제법 많다, 찬바람 부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는 이들의 하소연이. '가을 탄다'는 것은 실제 계절의 변화로 인한 우리 몸의 호르몬 변화이기에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자꾸만 밀려드는 우울감과 무기력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침체된 기분으로 다시 현재를 놓치는 실수를 반복한다. 올해 가을은 폭우와 태풍까지 자주 찾아오며 흐린 날이 많으니 자주 침울해지곤 한다.
날씨뿐이랴. 녹록지 않은 경제상황, 정치상황도 우리를 산란하게 만든다. 특히나 나이가 들수록 가을을 탈 때마다 흔들리는 폭이 더 커지는 것 같다. 푸릇푸릇한 청춘의 에너지가 지나가고 있는 자신의 시간을 한 해의 말미로 향하는 가을이란 계절에 투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하면 계절성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한다는 가을앓이, 자기 나름대로 이를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 몇 가지 '처방전'을 지니고 있는 것도 꽤 요긴할 거 같다. 조금 멀리 길을 나서보거나 내 마음을 채워줄 문화활동을 하며 반복되는 일상과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독서도 꽤 괜찮은 방법일 텐데, 나에게는 이럴 때마다 꺼내보는 '처방전' 같은 책이 몇 권 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유명한 파크 J 파머의 산문집 는 이 가을 꼭 한번 권하고픈 책이다. 근사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고백록에 가까운 이 책은 문득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진정 나다운 길은 무엇일까 반추하게 될 때 제법 '약효'가 있다. 파크 J 파머는 스물아홉에 대학 이사회의 일원이 돼달라는 제안을 받을 만큼 인정받지만 그가 자신의 소명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목사가 되려 했던 길도, 사회운동가의 길도, 대학교수로서의 길도, 공동체의 삶에서도 좌절과 회의에 빠지고 40대에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다.
이 지난한 삶의 여행을 거치며 그가 깨달은 지혜는, 인생을 낭비했다고, 남들만큼 야무지게 살지 못했다고 거칠게 스스로를 찔러대던 자학의 말들을 거두게 만든다. "인생의 문이 닫힐 때 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말라. 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 다. 닫힌 문을 두드리기를 멈추고 돌아서면 넓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린다."
결국 우리를 깊은 곳으로부터 변화시키는 것은 외부의 기준을 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닌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가능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가을은 책 판매량이나 도서관의 대출량이 줄어드는 시기이다.
청명한 하늘에 색색의 단풍까지 여기저기 피어오르니 나들이 가기에 바쁘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가을은 봄의 설렘과 여름의 흥분에 가려져 있던 인생을 향한 깊은 질문들을 마주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찬찬한 마음으로 책이 건네는 질문에 머무르며 나만의 답을 떠올리다 보면 다시 나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차오를 것이다. 서늘하게 가을을 타는 이 시간, 삶이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461349&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