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상인 Jan 16. 2019

안경자의 변명

안경인과 안경자

  전국에 계신 안경 착용자들과 ‘안씨 성을 가진 경자’님들께는 외람된 말씀이지만..나는 줄곧 이렇게 불렸다.


이 안경자야!


 이런 단어가 세상에 널리 쓰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가족들로부터 이 호칭이 종종 애용되어 왔다. 안경자란? 1. 시력이 좋지 않아 어려서부터 안경을 쓰고 살아온 2. 눈이 잘 안 보인다는 사실을 늘 유념하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깔려 마치 만성 의심중독 증상이 있어 뵈는, 3. 그러면서도 남의 말보다 자신이 직접 실눈 뜨고 추정한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4. 위의 세 가지 사항을 모두 충족하면서 때때로 맘에 안 드는 구석을 보였을 때, 바로 그때 나는 "야! 이 안경자야!" 하고 불리게 된다. 그 모든 ‘맘에 안 드는 구석’의 원인이 안경을 쓸 만큼 시력이 낮은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시려는 우리 어무이가 등짝스매싱과 함께 불러주시는 별명이다. 소심하고 복잡하게 생각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나란 인간이 부디 둥그스름하고 무던하길 바라는 어무이의 마음이 담긴 표호라고나 할까.  소개는 이쯤 하고, 정리하자면 안경자는 안경을 착용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대집단 ‘안경인’에 소속된 한 부류이나 유사어 ‘안경잡이’와는 구분된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으며 앗, 이거 내 얘긴데 싶으면 바로 그것이 정답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퍼질러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대각선 아래에 닿은 시선에 무언가 거슬리는 형체가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저 허연 것이 섬유에서 떨어진 실밥인가 싶어 집으려고 손을 뻗으니 실밥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왜 움직이나 바닥에 코가 닿도록 몸을 숙여 봤더니 웬걸, 실밥이 아니라 실오라기 같은 다리를 움직여 살아가는 조그마한 거미였던 것이다. 바짝 붙은 내 콧바람에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가냘픈 존재였다. 그 시점에서 왜 그렇게까지 놀랐어야 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너무 놀라 정수리로 치솟는 비명을 시원하게 꽥 질렀더랬다.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남자가 후드득 뛰쳐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내가 놀란 것이 저 미천한 거미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 설명은 벽돌도 씹어먹을 기세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Hello, how are you?


안경자도 안경인 중 한 명이다.


  안경을 쓰기 시작한 9~10살 때부터 잠에서 깼을 때 엄마보다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안경이었다. 말하자면 나의 하루는 안경을 착용하고 나서야 시작되는 것이다. 티브이에서 가끔 배우들이 자고 일어나서 눈이 잘 안 보여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 더듬거리는 장면을 볼 때면 피식 웃음이 난다. 극적 연출이라 그런 것은 이해하나 진정한 안경인은 일어나서 안경을 찾기 위해 더듬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기상 후 즉각 화장실로 발걸음이 가는 것처럼 일어나서 본능처럼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경인들의 안경은 늘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켠다-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벌떡 앉는다-발치에 있는 화장대 위 우측 갑 티슈 옆에 있는 안경을 집는다-얼굴에 안경을 씌우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 말은 안경을 써야만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안경을 쓰기 전까진 무엇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안경이 없는 나는 빠르게 행동을 한다, 민첩하다, 정확하다, 예리하다와 같은 단어들과는 멀어지게 된다. 탈부착이 가능하다는 것뿐 이미 내 신체의 일부분인 셈이다.


  가끔은 나도 안경을 벗는다. 그러나 세수를 할 때, 잠을 잘 때, 안경을 닦을 때 정도나 될까 웬만해선 벗을 일이 없다. 무엇보다도 눈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안경을 벗은 내 얼굴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단 찌그러드는 미간은 기본이고, 난시까지 심해 실눈을 뜬 상태로 눈에 힘을 주다 보니 얼마 시간이 지난 뒤엔 어김없이 눈썹과 이마 위로 우리한 두통이 찾아온다. 그러다 거울이라도 보게 되면 맙소사! 얼굴이 왜 이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못생겨진 눈코입을 마주하게 된다. 콧등엔 오랫동안 머물렀던 안경 코받침 자국이 깊숙이 파여 맨질맨질하고, 눈을 크게 뜨고 거울 가까이 대고 얼굴을 보면 어쩔 땐 무섭기도 하다. 안경을 벗었다는 것은 못생겨짐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불편한 점은 안경을 벗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의 그 불확실성이 상당한 불안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현재 맞은편 저 사람의 눈코입을 구분하고는 있으나 사실 정말 상대방의 눈을 보고 있는지는 장담이 안되고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을 읽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안경을 벗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두렵고 불편함이 따르는 일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안경은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얼굴의 특징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당장에 ‘안경을 착용한’이라는 묘사부터 나갈 것이다. 그만큼 안경이라는 큰 틀 안에서 나의 이미지가 형성되기 때문에 안경을 고를 때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곤 한다. 안경인은 우리네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핸드백을 하나 구입하러 가는 마음으로 안경점에 간다. 여러 번 써보긴 하지만 진열된 안경테를 쓸 땐 시력이 안 맞으니 거울을 봐도 사실은 보이는 게 없다. 이게 참 불편한 게, 새 안경을 착용한 전체적인 내 모습과 분위기를 보려고 거울 앞에 멀찍이 서면 실루엣만 겨우 보이고, 잘 보기 위해 가까이 가면 동그란 거울 안에 눈코입 밖에 안 보인다. 안경을 바꿨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그다지 새롭지도 않다. 내가 봐도 그렇긴 하다. 가끔씩 예전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어째 내 모습은 항상 거기서 거기인 거다. 돌고 돌아 결국 또 뿔테의 품에 안긴다. 내 나이 올해 서른여섯에 안경 쓴 인생 27년, 그중 절반 이상이 뿔테이면 말 다했지. 이럴 거면 뭐 하러 바꿨을까 싶기도 하면서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알 수 있는 미세한 디자인의 차이를 구분하며 작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렇게 소소한 차이로도 기분전환이 되는 게 우리네 안경인의 삶이다.


   어쩔 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는 날도 있기는 하다. 나의 경우는 그것을 쓸 때마다 눈이 너무 불편하여 견디질 못하겠다. 눈에 속눈썹이 들어간 기분, 저 안쪽 어금니 구석에 시금치가 껴서 안 빠지는 기분, 운동화에 굵은 모래 한 알이 자꾸 신경 쓰이는 기분, 각막이 마치 사막 위에서 달걀 프라이가 되는 피곤함, 뭐 이런 걸로 설명이 되려나. 그래서 졸업앨범, 웨딩촬영, 결혼식 같은 생애 중요한 이벤트 외엔 잘 쓰고 있진 않다. 너는 안경 벗는 게 더 예뻐.(명백한 사실이다. 흠.) 이런 말로 나의 안경을 벗기려는 자들이 있다. 또는 요즘 라식, 라섹 등 수술을 많이 하던데 너도 해 봐. 내 시력을 업그레이드시켜주고파 지인들이 질리도록 하는 말이다. 그런 대화에선 항상 입조심, 말조심, 언행 조심하는 편이다. 내가 왜 콘택트렌즈를 사용하지 않으며, 왜 수술을 하지 않는지 일일이 설명하려 하다 보면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당사자가 아니면 이 고충을 모를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안경이 이제는 콧등에 확실한 지분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이제 와서 안경을 굳이 벗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 수술에 대한 선택은 좀 더 나이가 들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 앞서 읊어 낸 주절주절 고통들을 다 감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고통을 일일이 말해서 뭐 하겠는가. 목욕탕에도 안경을 쓰고 가야 하는 현실을. 구구절절 이야기 해봤자 입만 아프다. 겨울에 바깥에 있다가 실내로 들어갔을 때 안경에 내리는 김서림으로 일순간 돌돌이 안경 바보처럼 보이게 되는 그 굴욕을 말이다. 맘에 드는 선글라스를 세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인 가격으로 냉큼 사면 뭐 하는가, 도수에 맞는 안경알을 주문하여 갈아 끼우는 값이 더 비싼데. 여름에는 또 어떻고. 얼굴에 맞게 아무리 피팅을 잘해놔도 땀에 미끄러져 점점 콧등에서 흘려내리는 안경을 치켜올리느라 바쁜 손을 겪어보지 못한 자는 알기 어렵다. 아이고, 말해봤자 속만 상하지. 그만하련다.






안경자라서 미안합니다.


   사실 어무이가 내게 안경자라 부르는 순간의 대부분은 참 사소한 것들이다. 어무이가 찬장에서 간장 종지 하나 꺼내 와. 하면 안경자는 부엌에 서서 한참 고른다. 종지 중에서도 더 작고 덜 작은 여러 크기의 종지 중 과연 어느 것이 현재 저 요리에 걸맞은 최적의 간장 종지일까 하는 고민 속에 발이 빠진 순간이라던가. 설거지가 끝난 그릇임에도 불구하고 머그잔 바닥에 있는 얼룩이 어무이가 알뜰살뜰 살림하느라 컵 하나 안 사고 오래 쓴 바람에 세월이 만들어낸 얼룩임을 알면서도 매번 사용할 때마다 얼룩이 지워지나 안 지워지나 손가락으로 확인하는 꼬락서니라던가. 저기 우리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 오고 있다. 하고 알려주시면 내 눈에는 버스 번호가 보이지 않는 탓에 버스가 가까이 오기 전까진 나서지 않는다던가 하는 꼬락서니들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때론 아무리 안경자라도 '해도 해도 너무하네' 소리를 들을 행동이 한 번씩 튀어나온다. 일일이 열거하면 심약한 사람은 황당하거나 화가 나거나 둘 중 하나로 내 글을 읽다가 혈압이 오를지 모르니 여기까지 하겠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변명이 무어냐면, 나는 안경을 쓴 안경인이기에 '안경자'가 된 것이 아니고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앞서 말한 안경인들의 삶의 풍경은 내게도 있고 안경을 쓴 다른 이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하필 안경자 소리를 듣는 이유는 내게도 나름은 이유가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의심이 많다고? 내가 자꾸 확인을 한다고? 그러게 말이다. 나도 내가 그러고 사는지 잘 몰랐는데 자라오다 보니 나는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것 같다. 아픈 어무이 덕분에 어릴 때부터 뭐든 혼자 스스로 터득한 게 많다 보니 내가 하는 모든 것에 확신이 서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꼬마 때부터 이미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어무이가 설거지하는 거 잘 봐놨다가 혼자 있을 때 설거지를 하고 나면 다음에 그릇을 쓸 때 꼭 눌어붙은 밥풀이 붙어있거나 고춧가루가 붙어있어서 다시 씻어야 했다. 빨래판으로 바닥에서 빨래를 주무를 때도 이리 하는 것이 맞는지 몰라 비누를 바른 뒤 무조건 치대고 봤다. 그러고 나면 뒤에 옷을 입을 때 옷이 왜 이렇게 뻣뻣했던지 잘 헹구어 내는 것이 그리 중요하다는 것도 혼자 터득했다. 어무이 대신 은행에 공과금을 내러 갈 때도 누가 어린애 호주머니에 돈 들어 있는 것을 눈치채고 털어갈까 봐 몸속 깊숙이 숨겨 온몸에 힘을 주고 걸었더랬다. 어무이가 병원에 실려가 입원했던 다음날 아침 일찍 집에 들러 옷도 못 갈아입고 세수도 못하고 혼자 책가방과 도시락만 급하게 싸서 등교한 날, 머리를 며칠 안 감았다고 뒤에 앉은 애가 엉킨 긴 머리를 놀려대는 판에 그 이후로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씩 머리를 감았다. 분명히 숙제를 했는데 병원에 두고 등교를 하였던 날 선생님께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거짓말을 한다고 혼쭐이 났더랬다. 숙제 안 한 애들 다 불려 나와 각자 변명을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녀석들이 하나같이 분명히 숙제를 했는데 다 집에 두고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안 했으면 그냥 솔직하게 안 했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왜 병원 핑계를 대냐고 손바닥을 맞았다. 억울했다. 이후로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약간의 강박이 있다. 나의 진정성을 어필하기 위해 얼마나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해대는지 말이다.


   이렇게나 안경자의 변명은 하염없이 대서사시로 흐르기만 한다.  솔직히 내게는 안경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다. 그 이야기는 때로는 웃기기도, 때로는 슬프기도 하다. 그래서 몇 가지를 털어놓고 싶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본인이 안경자라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음 글에서 서로 털어놓아 보기로 하자.




당신은 안경인 입니까? 안경자입니까?

저는 안경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밤 중에 매미 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