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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Feb 28. 2018

도둑질과 나

씽씽을 타고 씽씽씽

   학교 보건실 남학생 안정실 안 오른편에 위치한 침대, 그곳에 주인 모를 오백 원짜리 동전이 흰 얼굴로 나와 마주한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누웠던 남학생  중 한 명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주인을 잃고 방황 중이었나 보다. 나는 침상을 정리하면서 그 오백 원을 바로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 학생이 찾아온다면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그 존재를 잊어버렸나 보다. 학교 보건실은 중증도만 낮을 뿐 생각보다 소문난 맛집처럼 늘 바쁘고 침상을 정리하는 내 손길은 언제나 재빠르기 때문에 그 홀로 된 오백 원을 돌봐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청소를 하던 내 눈에 다시 들어온 거다. 아참, 내가 여기에 뒀었지.


   며칠 사이에 수많은 아이들이 그 침대를 다녀갔다. 두통, 감기몸살, 어지러움 등 잠시의 휴식이 필요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 자체가 싫었던 방황하는 청소년의 꾀병 치레를 겪어 낸 침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째 놓여있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모두가 그런 것은 분명 아닐 테지만 크지 않은 금액이라도 저렇게 주인 잃은 오백 원의 방황을 목도했을 땐 유혹을 받을 법도 했을 텐데 잘 극복해낸 아이들이 참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무심하게 그 자리에 동전을 올려놓고 잊어버려서는 아이들에게 동전을 전시해버린 나 자신이 참 세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반성이 되었다. 복도에서 습득된 지폐의 경우 교내 방송으로 즉시 알리면 냉큼 주인이 찾아온다. 그러나 보건실 침대 위 세월이 흘러 늙은 오백 원의 주인을 찾아주기란 쉽지 않아 보여 그 동전은 나도 학생도 잘 보이는 처치실의 투약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예상 가능한 대로 결국 그 오백 원의 주인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놓여있는 그 동전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았고 여전히 먼지 쌓인 오백 원은 그 자리에 있다. 그 오백 원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복받쳐 오르는 감정은 나를 종종 힘들게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린 날의 순수한 양심은 언제까지나 어른들이 책임지고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중학교 1학년 초겨울쯤이었나 보다. 엄마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댁에 얹혀살 때였는데 가뜩이나 서럽고 외로운 마음에 하루하루 잠도 쉬이 들지 못해 마음을 달래느라 이어폰을 귀에 꼽고 매일 울면서 잠이 들던, 정말 야단도 아니던 나날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의 연락은 뜻밖이었고 내겐 위로였다. 예전에 살던 동네의 골목 친구가 버스 종점 거리인 외갓집까지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하는 거다.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며 꽤 어울려 놀았던 아이다. 우리 집에도 자주 드나들면서 밥도 같이 먹고, 아픈 우리 엄마의 다리도 같이 주무르면서 TV를 보기도 했고, 이 친구네 언니 방에서 인기 가요를 들으며 놀다가 걔네 언니한테 머리도 쥐어 박히고 그랬더랬다. 그러다 내가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며 전학을 가버리는 바람에 소식이 끊어졌는데 울 엄마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전해 듣고 물어 물어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었어도 추억이 있어 보고 싶은 아이였고, 지금의 내 이 슬픈 심정을 털어놓을 상대가 돼줄 것만 같아 기대도 되었다. 그러나 팔랑팔랑 한 여중생 두 명의 만남이 그리 진지 할리 만무하지, 쉬지도 않고 쏟아지는 수다와 함께 헛헛했던 마음은 어디 길바닥에 흘렸는지 보이질 않고 즐거움만 가득했더랬다. 친구는 안 본 사이에 좀 더 키가 커 있었고, 어찌 보면 학교에서 껄렁하다는 소리 좀 들을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아 낯설기도 했지만 여전한 건 녀석이 나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촐랑대며 시내를 돌아다니다 종합쇼핑몰로 들어가게 되었다. 딱히 무언가를 사기 위해 들어갔다기보다 워낙 여자 아이들은 구경을 좋아하니 말이다. 그러다 사달이 난 거다. 화장품 코너였던 2층, 그때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왜냐하면 그곳은 지울 수 없는 불편한 과거의 사건 현장이었으니까.




호호야, 망 좀 봐.


   어리둥절한 나는 왜냐고 묻지도 못하고 망을 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지만 꺼벙한 심장 탓에 말릴 용기가 없었고, 말리기는 커녕 공범자가 되어 버렸다. 순식간이었다. 친구는 당시 소녀들 사이에서 어른 화장 흉내를 낼 수 있어 인기가 많았던 ‘클린 앤 클리어’ 팩트를 얼른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내게 ‘이젠 네 차례야.’라는 눈빛을 보내며 내 앞으로 걸어와 막아섰다. 자기만 믿고 얼른 실행하라는 강한 의지의 저 눈빛. 두근두근, 콩닥콩닥, 울렁울렁. 나는 오장육부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떨고 있었다.


   속 시원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결국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 친구가 내게 ‘네 차례’ 임을 지시했을 때 나는 '나 그거 필요 없어' 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안돼, 싫어.. 나 하느님 믿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굴하지 않고 나를 몰아 세우고선 그럼 매니큐어 하나만 집어서 나가자 라고 말하던 친구의 긴박한 목소리에 나는 도망치듯이 녀석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왔던 것 같다. 지금 내 행동이 무척 비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이후의 데이트는 퍽이나 괴로웠다. 어린 나이라도 이런 짓 하지 말자고 친구에게 한마디 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말이다.


   집에 와서 가만 생각해보니 잠이 안 왔다. 아까의 내 비겁한 변명은 너무나도 연약해 빠졌었다. 아.. 정말 모양이 우습게 됐다. 내 체면은 어쩌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 씩씩한 남자아이들도 모두 제치고 골목대장을 도맡아 하던 여장부가 바로 나 아니었던가. 학교 뒷골목 불량배 언니야들이 소위 ‘뒤져서 나오면 십 원에 한 대’라고 협박하며 이 친구와 내가 붙잡혔던 그때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그 중학생 언니야들에게 ‘내 친구 몸에 손만 댔다간 너네는 오늘 나한테 다 밟힐 줄 알아라’ 하고 깡으로 맞서던 여장부가 바로 나였다. 남자아이들에게 그 소문이 약간 과장되어 퍼지면서 마치 불량배 세계를 평정하고 나타난 정의의 여신처럼 학교 앞 문구점을 지나가면 모두 알아서 길을 비켜주며 공식 골목대장으로 추대받던 그 우쭐한 인물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왜 용기 있게 말하지 못했냐 말이다.


   그렇다고 그날의 기억이 이날 이때까지도 석연치 않은 이유가, 마치 난 그렇게나 정의로운 아이였는데 친구를 미처 비행에서 건져내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서일까? 아니, 아니다. 계속 정수리 위로 스치는 얼굴 하나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동네방네 착한 딸로 인증된 나였지만 못된 손버릇을 놀린 탓에 그녀는 얼마나 쓰라린 상처를 매만져야 했던가. 분명 우리 어무이가 하늘에서 날 보고 계실 거란 생각에 두려웠다. 오야 둥둥 당당한 내 새끼로 맹그느라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 저러고 있는가 싶어서 당장에 회초리를 들고 다시 내려오시려나. 그래, 이건 하늘이 알고 내가 안다. 나도 어릴 때 이미 세 번의 도둑질 전과가 있었으며, 손가락을 걸고 한 맹세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범행은 유치원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유치원은 당시에 아이들의 알림장마다 작은 동전지갑을 매달아 주고 거기에 매일 각자 소정의 금액을 가져와 아침 등원 때 줄을 서서 은행놀이를 하며 저축을 했다. 저금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 선생님은 금액을 확인하여 통장에 적어주고, 다시 그 돈은 지갑에 넣어 선생님께 내면 집에 가기 전 알림장과 함께 빈 지갑을 돌려받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항상 백 원, 이백 원, 많은 날엔 오백 원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사정은 다 알았다. 다른 아이들은 천 원짜리도 가져오고 오천 원짜리도 가져오곤 했는데 나는 왜 맨날 맨날 짤랑대는 동전 소리만 나는 것인지 말이다. 아빠와 이혼하고 혼자 벌어 나를 키우던 엄마는 지금 생각해보니 어지간히 벌어서는 먹고살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집세도 내고 아이 밑으로 들어가는 돈에 생활비도 충당해야 하니 알게 모르게 어린 나에게 알뜰살뜰 내지는 아득바득한 모습을 자주 비추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날 앞에 줄을 섰던 여자아이가 저금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냈을 때, 선생님은 엄청난 칭찬을 해주었고 아이들은 축하하며 부러워했으며, 어린 나는 조용히 범행을 계획했다. 아주 어설펐지만 기승전결이 모두 기억나는 건, 아마도 어리다는 전제 하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한참 놀던 우리는 어느새 낮잠 시간이 되었고, 잠이 들어 있던 나를 선생님이 조용히 불러내 아무도 없는 1층으로 데려갔다.


호호야, 가방 좀 보여줄 수 있겠니?



   그 사이에 까먹었나, 나는 아침에 3만 원을 도둑질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해맑게 가방을 내어 드렸다. 내 가방에서 구출된 푸른 지폐 세 장이 보이자 갑자기 번뜩 생각이 나 너무나도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내 기억엔 2층에서 일과를 보내다가 눈을 피해 1층 알림장을 모아둔 곳에 내려갔고, 날렵한 손길로 일을 처리한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후다닥 2층으로 뛰어 올라가며 완전 범죄를 확신했지만 말이다. OO이의 돈인 것을 이실직고했지만 그날은 어떤 선고도 없이 아무 일 없는 듯 나는 다시 일과에 투입되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지 싶은 마음이었지만, 집에서 만난 엄마는 이미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간 듯 고요했다. 따뜻한 아랫목에 나를 앉히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었다.





호호야, 그 돈 왜 가져갔었어?


엄마 주고 싶어서..


그랬구나. 남의 돈 가져가면 나쁜 사람이야. 아무리 갖고 싶어도 내 것이 아니면 가져오면 안 돼. 엄마도 안 줘도 돼. 알겠지?


응.



이 말 꼭 기억해. 약속해줄래?


응.




   이것이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손 들고 서 있어' 또는 '회초리 가져와' 내지는 '사랑의 몽둥이 구하러 나갔다 올게' 뭐 이런 반응이 아니라서 당황한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나의 두 눈을 보고 또박또박 말하던 엄마의 눈은 나를 향한 미안함이 서려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엄마가 슬프면 나는 몇 곱절 더 슬펐다. 어디라도 숨고 싶을 만큼 큰 형벌이었다. 내 범행의 여운은 꽤 오래갔다. 하필 소풍이었던 며칠 뒤 공원을 가던 길에 우리 반 선생님이 ‘오늘 마치고 호호는 엄마가 유치원으로 오시기로 했으니까 집에 바로 가지 말고 남아 있어라’ 하는 말이 다른 아이들에게 ‘호호가 도둑질을 하여 엄마가 유치원에 오기로 하였단다 얘들아!’로 들려 챵피해서 심장이 멎을 뻔했고, 매일 아침 금액 확인과 동시에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금고로 냉큼 다 집어넣는 선생님의 행동에도 ‘자자, 이렇게 해야 우리 호호가 도둑질을 못하겠지?’하는 것처럼 보여 숨을 곳을 찾느라 바빴다. 그러나 유치원 선생님들도, 엄마도 모두 그 이후 나의 범행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지만 한숨 소리와 함께 양쪽 관자놀이를 집고 고개를 푹 떨군 엄마의 옆모습을 보면서 여운이 길었던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유치원 졸업반이 된 우리들은 마지막 재롱잔치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어느날 원장 선생님은 갑자기 나를 포함한 세네 명에게 노래를 한 번씩 불러보게 하시더니 내게 이번 재롱잔치의 독창을 하라고 시키셨다.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그 세네 명 중 가장 잘 부른 사람이 확실하게 나는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다른 엄마들이 우리 엄마한테 호호의 독창 무대를 세운 비결이 뭐냐고 자꾸 물어왔더란다. 비결이라니, 나는 머리도 혼자 묶고 가방도 혼자 챙겨 다녔는데 그런 정성을 쏟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소문만 무성하게 나의 독창은 울 엄마의 치맛바람 비법으로 인한 엄청난 혜택이 되어 있었다. 자라면서 나는 느끼게 되었다. 왜 내게 독창을 시키셨는지 말이다. 굳이 내게 독창을 맹연습시키며 매일 피아노 반주를 맞추어 주신 원장 선생님은 대망의 재롱잔치를 하던 날 사람들에게 이런 멘트로 나의 독창 무대를 소개해 주셨다. 우리 유치원을 3년 동안 다니고 드디어 국민학생이 되는 씩씩하고 착한 호호의 앞날이 오늘의 노래처럼 반짝일 수 있도록 모두 크게 박수로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복을 곱게 입은 나는 머리에 달아놓은 아카시아꽃 모양 장식을 딸랑 거리며 원장 선생님이 선곡해준 노래로 열창을 했더랬다. 그 노래를 어찌 잊을쏘냐 말이다.


내가 커서 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우리 집은 내 손으로 지을 거예요.
울도 담도 쌓지 않는 그림 같은 집
울도 담도 쌓지 않는 그림 같은 집
언제라도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내가 커서 엄마처럼 어른이 되면
우리 집은 내 손으로 꾸밀 거예요.
넓은 들에 꽃도 심고 고기도 길러
넓은 들에 꽃도 심고 고기도 길러
언제라도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크면서 이 재롱잔치 비디오를 거짓말 조금 보태어 백번은 돌려봤다. 원장 선생님의 소개 멘트와 선곡에 나는 늘 속으로 속삭이곤 했다. 잘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짜 잘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어서 나의 두 번째 전과를 밝히겠다. 두 번째 범행이 유치원 시절 그즈음에 또 일어나고야 만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왕래도 잦지 않은 아이였는지 그 친구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건 내가 그 집에서 화장품 립스틱 모형 장난감을 훔쳤다는 것 밖에 없다. 엄마의 손을 잡고 길을 가던 중 내 호주머니에서 그 모형이 눈치도 없이 갑자기 튀어 나왔고 당황한 나는 그걸 도로 호주머니에 넣는 과정에서 엄마의 눈에 딱 걸려든 것이다. 때는 겨울이었고 두꺼운 겨울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내손은 엄마손에 붙들려 움켜 쥔 물건을 뱉어내고야 만다. 이거 어디서 났어? 단도직입적으로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어물쩡 넘기지도 못하고 아무 말이나 뱉어댔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어색하고 티 나는 행동에 내 범행의 증거는 물증과 심증이 모두 확실해졌다. 갑자기 엄마는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경찰서로 가주세요.
우리 호호가 장난감을 훔쳤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저씨와 엄마의 호흡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경찰서를 가려고 뭣하러 택시를 탔냐 말이다. 아저씨는 시간을 끌기 위해 어딜 그렇게 운전해서 다니셨을까. 차 안에서 나는 울고 불고 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지만 엄마는 경찰서에 가서 벌을 받자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그때의 그 공포는 뭐라 설명해도 내 마음을 대변하진 못한다. 뜨거운 눈물만 하염없이 주룩주룩 흐르는데 살짝 열린 택시 창문 사이로 날카로운 바람이 내 따귀를 할퀴고 지나가며 형벌이 더욱 무거워지고만 있었다.


  이후의 일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서른다섯 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날을 꼽으라고 하면 고민 없이 그 날을 선택할 것이다. 주인아주머니네 장독대에 올라가 점프하다가 장독도 무릎도 다 깨져 옥상을 난리 법석으로 만들었을 때도 엄마는 그런 표정을 하지 않았다. 미용실 놀이하느라 고모들이 사준 인형 머리카락을 가위로 다 잘라놓은 것만으로도 부족해 같은 유치원 미란이네 동생 머리카락까지 쥐 파먹은 양 다 컷을 쳐버린 날도 백번 사죄하고 돌아온 엄마의 표정이 이렇게 무섭진 않았다. 새로 사준 크레파스를 모조리 다 두 동강으로 부러뜨려 놓은 날에도, 목걸이로 만들어준 집 열쇠를 뒷산에 놀러 갔다가 냅다 던져버리고 온 날도, 엄마가 동전지갑에 잔뜩 사다 놓은 버스 토큰을 동네 언니, 오빠들을 줄 세워 다 나눠준 날도 이렇게까지 무섭진 않았는데.. 택시 안에서 앙다문 입술로 말을 아끼던 엄마의 표정은 다리가 달달 떨릴정도로 무서웠던 것이다. 그 날 가장 무서웠던 건 이제 내가 경찰서로 벌 받으러 가게 되면 엄마랑 헤어져야 하는가, 나는 엄마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랬던 것 같다. 그게 벌이지 더 큰 벌이 어디 있었겠는가. 나의 엄마가 나를 경찰서에 보내버릴 만큼 내가 아주 나쁜 짓을 했구나 바로 그런 느낌이었나 보다. 한참 후 초등학교 때였나, 엄마한테 왜 나를 경찰서로 데려갔었냐고 물어본 적 있었다. 아빠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면 당연히 경찰서든 감옥이든 데려가야지. 나는 아마 그 말을 들은 그날도 펑펑 울었을 것이다. 이러다 아빠한테 가버리라고 보내면 어쩌나.. 나는 그 와중에도 그게 걱정되어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늘 이런 식으로 내 잘못은 항상 엄마의 죄책감으로 연결되었다.









   열네 살의 그날, 호주머니에 든 화장품을 당당히 꺼내 냉큼 얼굴에 쓱 문질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친구. 그때는 생각했다. 완전범죄가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구나. 그러나 완전 범죄는 무슨, 완전치 못하게 내가 아직까지 그 날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세 번째 범행도 그랬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준 나의 완전 범죄, 그 덕분에 나는 살면서 때때로 뜨금한 마음을 기억해내어 다시 한 번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이제 밝히게 될 나의 세 번째 전과는 내 인생 마지막 도둑질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였다. 우리 옆집 여자애는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탔더란다. 예쁜 얼굴만큼이나 성격도 깍쟁이였다. 그네 옆집으로 이사 간 후 첫 만남부터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계집애가 나한테 몇 살이냐 물어보더니 자기가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상을 타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자고 부르는 거다. 첫날부터 맘에 안 들었다. 아무튼 그 집은 동네 슈퍼마켓을 하고 있었고 우리 집은 통닭집을 했었다. 이야기 도중 잠깐 옆길로 새자면 통닭집을 차렸다는 건 엄마가 살면서 벌린 일 중에 가장 무모한 일이었던 것 같다. 돈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거기에다 장사라곤 해본 적 없는 사람이 통닭을 튀겨 팔았다. 91년~92년 그즈음 통닭집은 인기가 많았다. 가끔은 배달 서비스도 했고 그 역할은 항상 내 몫이었다. 어느 빌라 몇 호로 가져다 드려라 하면 나는 튀긴 통닭이 담긴 봉지를 쥐불놀이하듯 휘~ 휘~ 돌리면서 가는 바람에 비닐 안에 흰 무 국물이 다 쏟겨 엉망이 된 적도 있었다. 가만 보면 치킨 매상보다 내가 먹는 게 더 많았다. 엄마~ 나 후라이드. 하루에 한 마리씩 꼬박꼬박 챙겨 먹고 손님들이 남기고 간 치킨도 내가 다 먹었다. 흰무를 쏟아 엉망이 되어 도로 돌아온 것도 내가 다 먹었으니 이 집 닭은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그래서 이후 결국 장사는 얼마 못가 접긴 했다. 그 와중에 옆집 그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 대상 깍쟁이는 내가 치킨을 먹을 때마다 꼬박꼬박 문 앞에서 우리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와, 이리 와서 우리 호호랑 같이 통닭 먹어. 거절 한 번 안 하고 와선 자리 잡고 앉아 열심히 잘도 발라 먹곤 했다. 나 먹을 것도 없는데 저가 막 먹어버리니 나는 좀 얄미운 게 아니었다. 한 날은 진정 나는 그 어떤 사심 없이 슈퍼 아주머니께 공손하게 인사를 했더니 아주머니가 바나나 우유를 하나 주시는 게 아닌가. 감사합니다. 나는 넙죽 받아서 빨대를 딱 꽂으려는데 그 예쁜 어린이가 막 놀리듯이 말을 했다. 쳇, 통닭보다 바나나 우유가 더 좋은 거거든?


  어쨌든 얄미운 계집애인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줄곧 또 같이 놀았다. 이상하게 애들은 그러면서도 같이 잘 노나 보다. 혼자 놀고 있는 나를 슈퍼 아주머니가 같이 놀라고 가게로 늘 부르셨다. 주로 걔네 슈퍼 안쪽에 있는 방에 들어가서 인형을 갖고 놀거나 가게 앞 전봇대에 고무줄을 묶어 예쁜 어린이님에게 내가 고무줄놀이를 전수하며 놀았다. 때론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제품을 먼지떨이로 털게 하셨고 잘했다고 칭찬하시면서 비디오방에 가서 보고 싶은 비디오를 빌려 오라고 천 원을 쥐어서 둘을 내보내셨다. 내가 ‘아기천사 두두’를 보자고 하면 걔는 내 말 싹 무시하고 ‘후레쉬 맨’을 빌린다. 우리 엄마가 준 돈이니까 내가 보고 싶은 거 볼 거야. 뭐 틀린 말도 아니다. 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뭔가 서러움과 신경질이 남아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험담을 늘어놨다. 엄마, 이제 걔 절대 통닭 주지 말자. 엄마는 무조건 내 편이었는데 어째 통닭은 계속 먹였더랬다. 아오 얄미워.



   옆길이 길었는데, 이 이야기의 본론인 세 번째 도둑질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대포장과 지루한 변명의 시간이 꼭 필요했다. 여름이었나 보다. 어엿한 초등학생인 내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방학이었다. 학교를 안 가니까 늦잠도 자고 참 좋았는데 심심한 건 어느 정도 견뎌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 대상님께서 웬일로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막 부른다. 언니 이리 와 봐. 뭔 일인가 가 봤더니 새로 산 씽씽을 자랑하려고 부른 것이다. 씽씽으로 치면 내가 왕년에 유치원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꽤 좀 타본 실력이 있었다. '여자아이'를 떠올릴 때의 그 일반적인 통념의 모습과 나는 거리가 멀었다. 무지하게 천방지축이었기에 동네 까불이들과는 영혼이 통할 정도로 잘 놀았다. 무리 중에 누가 제일 빠른지 바닥에 레이스 선을 그어놓고 경주도 하고, 바퀴에 요구르트 빈 껍데기를 밟아 끼우면 오토바이 소리도 나고 그랬다. 내 씽씽은 빗물에 녹이 슬고 망가져서 버린 지 오래된 터라 그간 씽씽을 못 탔었는데 걔네 씽씽을 보니 어찌나 반갑고 부럽던지 말이다. 어지간 해선 내 입에서 비굴한 소리는 잘 안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깍쟁이에게 말을 꺼냈었다. 내가 내리막길에서 발 떼고 쭉 내려오는 거 보여줄까? 빙빙 돌려 말을 잘 꺼냈다 싶었는데 얄미운 고것이 어째 그리 함축된 의미를 찰떡같이 알아듣나 몰라. 안돼, 태워줄 수 없어.


   진짜 얄미웠고, 씽씽이 너무 타고 싶었다. 엄마한테 씽씽을 사달라고 하기엔 힘들게 돈 버는 거 다 알기에 도무지 염치가 없었다. 운명처럼 모든 상황이 나를 인도하던 디데이였던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통닭집엔 손님도 없고 엄마는 컨디션이 별로였는지 가게 안쪽에 자리한 안방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TV만 보고 계셨다. 지금이다. 출필고 반필면(出必告反必面), 우리 집 가훈이라고 학교에 적어 갔던 한자인데 나는 차마 거사를 치르러 나간다는 목적은 고하지 못하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출필고(出必告)를 흘린 뒤 슬쩍 집 밖으로 나왔다. 비장하고 긴장된 기분으로 슈퍼 앞을 잠시 보니 역시나 예쁜 어린이님은 그토록 끼고 살던 씽씽도 가게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정말 기회가 없는 거다. 빛의 속도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이 빠르게 행동해야겠다 싶었다. 행동개시, 하나, 둘, 셋!


   나는 비 내리는 길가에서 예쁜 어린이의 씽씽에 후다닥 몸을 싣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 사라졌다.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체감 50m씩은 앞으로 쭉쭉 나가는 기분이었다. 성공! 그 순간만큼은 뒷일을 어찌 수습할까 하는 생각은 씨앗조차 없었다. 묵직한 비를 맞으며 한적한 길가와 골목을 신나게 달리고 또 달렸다. 바람을 가르는 기분을 만끽하며 동네를 몇 바퀴는 돌았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도 씽씽 지나가고 아파트 단지에도 올라가서 내리막길을 씽씽 내려왔다. 그러나 질주의 축제는 어느덧 저물고 마무리의 순간을 맞이해야만 했다. 잠시 나가겠다 했던 딸내미가 어서 반필면(反必面) 해야 할 타이밍이다. 비바람을 너무 두들겨 맞아 온몸이 엉망진창이고, 아까 하도 긴장을 했던 탓에 온 몸에 기운이 쫙 빠졌다. 겨우 내린 수습책은 일단 집에 숨겨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네들이 찾으면 스리슬쩍 가져다 놓거나 어디 갖다 버려야겠다 까지 생각도 한 것 같다. 씽씽을 들고 우리 집 뒷문으로 순식간에 입장했다. 됐어, 일단 여기까진 완벽해. 나는 우리 어무이께 무사 귀환을 전해 드리며 옷이 왜 이리 젖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옆집 슈퍼 아주머니가 우리 집으로 곧바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두둥.


호호야, 씽씽은 다 탔니?


   어우 난 그때 심장이 지하 끝까지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아주머니 특유의 그 상냥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기절을 할 뻔했는데, 거기에 우리 엄마의 맞장구가 더해지면서 나는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씽씽 제자리에 안 갖다 놨어? 다 탔으면 제자리에 갖다 줘야지 인마. 두 분 다 어찌 알았는가에 심각하게 놀랐지만 심드렁히 말하는 엄마의 저 말에 영악한 나의 판단은 두 분 다 별 다른 ‘오해’가 없어 보이니 어찌 됐건 완전범죄이겠구나 싶었다. 씽씽의 행방을 왜 제게 물으시죠 하는 눈빛으로 대응을 시작했지만 아주머니의 이어지는 말에 1차 수습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 난 호호가 우리 애 씽씽을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길래 좀 더 타려나 보다 했는데, 우리 딸내미가 씽씽 빨리 뺏어 오라고 난리 난리를 쳐서 다 탔는지 물어보러 온 거야. 호호호호호.


   이렇게 된 이상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임을 인정해야 했다. 멋쩍어 하긴 했으나 마치 깜빡하고 돌려주지 않은 양 신속하게 슈퍼 앞으로 씽씽을 주차시켰다.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우리 집 밖으로 페이드 아웃되면서 애써 태연한 척 노력 중인 나의 어색한 연기만 고요하게 남았다. 진정해야 하는데 TV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내 심장 소리와 유난히 시끄러운 시계 초침 소리가 나를 침착치 못하게 했다. 엄마는 어째서 다 알고 있는 것일까.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수도 없고 심장만 쿵쾅대고 있었다. 통닭 튀겨 줘? 나를 힐끗 바라보며 툭 내던져진 엄마의 한 마디를 주워 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어지는 울 엄니의 주문에 무척 괴로웠다. 옆집 가서 동생도 불러와, 같이 먹자고 불러서 씽씽 미안하다고 말해. 아... 사람이 살면서 발 한쪽 무게가 1톤가량까지 무거워지는 순간이 몇 번이나 될까. 그때의 꼼짝 않던 내 발이 딱 그랬다. 비 개인 오후는 무척 습하고 더웠지만 예쁜 어린이님은 냉큼 씽씽을 다시 들고 나와 골목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긴 파마머리를 늘어뜨리고 갈색 원피스를 휘날리며 내 손짓에 우리 가게로 달려왔다. 만약 아까 내가 저 씽씽을 어디 놀이터에 내던져 버리고 돌아왔다면 사건은 어찌 수습되었을까. 만약 내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면 나의 신상은 어찌 변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가 아까의 내 시커먼 속셈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속 시원히 물어볼 수가 없어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 했다. 미스터리다.


   며칠 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장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자전거 가게였다. 아저씨, 얘가 탈만한 안전한 자전거 좀 보여주세요. 자전거라니.. 탈 줄도 모르는데 일단 사 줄 것 같은 분위기라 기쁘기는 했다. 안장이 길고 폭신폭신한 어린이용 자전거를 추천받고 우리는 새 자전거를 끌고 집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앞으로 자전거를 탈 생각하니 리드미컬한 투스텝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나 자전거라니! 완전히 딱 내 스타일이었다. 엄마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시겠다고 했다. 자전거는 절대 비를 맞지 않게 하라는 특명도 하사 받았다. 학교 정문 앞길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오르막길에도 타러 가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암요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계획에 없던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선행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시작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 소비가 엄마를 조금 골치 아프게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별안간 선물을 받으니 어리둥절한 마음과 들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옆집 동생 씽씽을 허락 없이 그렇게 타면 걔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 네 자전거를 옆집 동생이 허락 없이 탄다고 생각해봐. 벌써 속상하지? 호호가 엄마랑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켰으면 좋겠어. 내 물건 아니면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로 했지?


   가만보니 자전거는 선물이 아니라 벌이었나 보다. 나는 뻘쭘한 마음을 수습하느라 한동안 시무룩했고 주눅 들어 있었다. 그리고 앞전에 씽씽 사건의 날 두 어른에게 ‘어찌 아셨습니까’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모든 마음도 쏙 들어갔다. 부끄러웠고, 그냥 난 숨고 싶었으며 차라리 혼이 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져버렸다. 애어른이라는 소리는 꼬꼬마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내가 불리한 상황에선 언제나 나는 철부지 어린아이로 행동했었다. 어린 나는 그토록 사악했다. 그러나 이번 순간 만큼은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싶었다. 가게 안에 서 있던 벤자민 화분의 작은 입사귀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엄마에게 할 말이 있다고 쭈뼛쭈뼛 입술은 뗀 뒤 진지하고 엄중한 마음으로 선서했다. 엄마,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거야. 그런 일로 엄마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나의 선서 끝에 튀긴 닭의 기름을 빼고 있던 엄마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시더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내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답사를 남기셨다.


호호야,

엄마를 생각하지 말고,

너의 자전거를 생각해.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말이야.



   여름날의 묵직한 비를 맞으며 씽씽을 타고 돌아온 한 여자 아이를 보면서 어른들은 질책보다 용서와 침묵을 선택했다. 씽씽을 훔쳐 타고 돌아와 뒷문에 숨겨놓고선 시치미를 딱 떼던 딸내미에게 회초리 대신 소중해 마지않을 자전거를 사주었다. 슈퍼 아주머니는 비 내리는 골목 사이로 씽씽을 낚아 채 달아나는 아이를 보면서 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읽어주었다. 내 씽씽 왜 타냐고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 예쁜 어린이를 진정시키며 아주머니는 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말만 하라고 하셨다. 그 이전에도 유치원 원장 선생님은 돈 삼만 원을 욕심내야 했던 꼬꼬마의 근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도 담도 쌓지 않은 그림 같은 집에서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응원해주셨고, 경찰서를 비켜 비켜 온 동네를 돌고 돌았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조용히 훈육을 지지하며 처음 보는 아이를 함께 돌보았던 것이다. 점점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가면서 불러내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부끄러운 그날의 일들은 잊지 못하고 재구성되며 더 진하게 간직되어 버렸다. 그 어른들이 내게 베푼 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어린 인간을 끌어안고 이해함으로써 바스러질뻔한 연약한 양심을 다시 토닥토닥 두들기며 오래도록 빛나는 옥구슬이 되라고 응원해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친구도 화장품을 훔쳤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우리 모두는 어떤 날의 어떤이들과의 뜨끔한 기억을 쉽게 잊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소중한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을 다른사람으로 인하여 잃지 않기 위해 움크리는 마음 뒤에 이전의 뜨끔한 기억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니기 때문이다.


   원장선생님, 택시기사님, 슈퍼아주머니,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보건실에 남겨진 오백 원을 보고 그렇게나 감사하고 뭉클했었나 봐요. 씽씽을 타고 씽씽씽 달리던 그 때의 기쁨보다 이러한 기억을 선물해주신 여러분들이 제 인생에 존재하셔서 정말 기쁩니다.


   이렇게 나의 세 번의 도둑질 전과가 온천하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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