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상인 Nov 14. 2019

한밤 중에 매미 운다

열심히 살지 않을 용기가 없다


   <이 글은 무더운 여름이었던 2019년 8월 초에 작성되었고, 날씨가 추워지자 감성 망나니로 변한 주인의 손을 잡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뜨거운 낮에는 문을 닫아놨던 터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무거운 어둠이 되어서야 창문을 열 용기를 내어본다. 묵직하고 뜨끈한 바람이 풍선처럼 두둥실 안방을 채우고 쨍한 매미소리가 더운 바람의 손을 잡고 함께 문턱을 넘는다. 이렇게 야심한 밤에 매미가 운다. 너희는 그저 밤낮없이 울어보는구나. 지금 이 밤은 31도짜리 밤, 매미가 이 시간에 왜 이렇게 우나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봤다. 나 어릴 때 생각해 보면 매미 우는 소리는 땡볕에 걸어 다니다가 들었던 것 같은데 야심한 밤에 이리도 우는 것은 왜 그런 걸까? 남들은 일찍이도 궁금했었나 보다. 관련 글이 참 많다. 말매미니 참매미니 하면서 녀석들이 언제 울고 그치는지 분석해 놓은 글, 요즘 따라 밤에 우는 이유는 빛공해 때문이기도 열대야 때문이기도 하다고 알려준다. 매미가 참 안쓰럽다. 울음소리만 들어보면 몸집이 최소한 비둘기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지만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몸으로도 몽롱한 내 정신을 뾰롱하게 만든다. 매미는 먹은 걸 오롯이 우는데 다 써야 할 것 같다. 짧은 생명줄에 세상이 밤낮없이 환하고 날씨도 이토록 후끈하니 울어야 할 시간이 늘어나 얼마나 고달프겠는가. 매미야, 힘들지?


매미야, 힘내지 마.



  열심히 한다는 게 다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다 힘을 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열심히 하려고 애쓴 만큼 노력한 자신으로부터 다칠 수도 있다. 그런데 한편 어떤 이들은 다쳤어도 늘 열심히 한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열심히 하지 않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살아있으므로 있는 힘껏 해본다. 마치 오늘 밤의 매미처럼. 그리고 나처럼.






  매미는 대략 한 달 살고 생을 마감한다고 하더라. 더 크게 울면 짝짓기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더 자주 울면 저리 울다가 기력이 다해 빨리 죽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야심한 밤에 내가 매미 걱정을 다하고 있다. 왜 우리 세상이 이렇게나 밝아서 저를 못 살게 구는지 매미는 과연 화가 날까,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우는데 집중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 시각 나는, 그냥 매미가 운다는 이유만으로 감성이 터져버린 내가 너무 웃겨서 그만 한바탕 울고 싶어 졌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나의 개인적 추산 인구통계에 따르면 보통 임상 간호사들의 특징 중 하나가 완벽주의나 트리플 A형인 경우가 많이 있는데 나는 그들만의 리그 중에서도 '대충'을 혐오하는 특출 난 사이코였다. 하하 호호 웃다가도 일만 시작하면 날카로운 눈빛과 예민한 제스처로 주변 사람을 적잖이 피곤하게 했기 때문이다. 꼼꼼히 살피고 또 살피고 좁쌀 같은 오류를 찾아내어 화를 내고, 흥분하고, 바로잡고, 씩씩거렸다. 그럴 때 요동치는 인격변화 태세를 잠재우는 건 오로지 칭찬이다. 잘한다 잘한다. 우쭈쭈 우쭈쭈. 충분하다 충분하다. 이 밖에도 네가 최고야, 역시 너야, 믿음직스러워 등의 감언이설은 파르르 움직이며 예민하게 구는 나를 잠시 식혀줄 최고의 처방이었다.


열심인 것에 집착하는 나를 보면서 어느 날 불현듯 알게 되었다.

나는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서울 마포구 (2019)



  나의 열등감이 어디까지 파고들어 있는지 열어보기 두려웠다. 나는 많은 순간, 허다한 상황에서 그 열등감을 커버하기 위해 분주하고도 진부하게 노력해 왔고 그게 들킬까 봐 방어적으로 설명했었다. 어떤 계기로 나의 자존감을 들여다 보고 글로 적어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날 나는 불현듯 나의 본색을 마주하고서 놀라고야 말았다. 언제나 씩씩하고 긍정적인 내가, 어떤 일이든 일단 해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이런 내가 참 맘에 든다고 느끼며  살았다. 이렇게 너무나도 강하게 표현되는 자존감 뒤에 딱 달라붙어 그림자조차 들키지 않았던 나의 열등감. 꽁꽁 숨어 나 자신에게조차 모습을 감추고 마치 자존감과 하나처럼 움직였던 너.


어서 나와.
너를 찾아낼 정도로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우리 이야기 좀 해.



   외동딸, 이혼가정, 병든 엄마, 가난, 재혼가정, 계모, 빚 부자 아빠, 지잡대 출신이라는 나의 성장 수식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나의 강한 무기였다. 왜냐하면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곧게 뻗어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나는 언제나 영리했고 씩씩했으며, 늘 스스로 했고 끈기 있었다. 모든 순간에 성실했고 그 덕에 우수했으며, 난관을 숨기지 않았고 반드시 돌파했다. 그러면 뭐 하겠나. 틈만 나면 앞선 성장 수식어들이 나의 강점을 가리고 존재감을 과시할까 봐 분주히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을. 나의 노력과 능력과 성과들보다 내 성장 수식어들이 더 나를 잘 표현하는 도구가 될까 봐 나는 몹시 신경 쓰인다. 내 몸에서 나오는 많은 생각과 감정들 중에 제일 민첩한 녀석은 열등감인 것 같다. 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미어캣처럼 서서 망을 보고 있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외동딸’이라는 세 글자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랑받고 자란, 애교가 많은, 장난감이나 간식 등에서 경쟁상대가 없음, 집안의 관심 집중 대상, 곱게 곱게 키운 등>의 이미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어찌 된 게 <받기만 하려는, 자기 것만 챙기는, 자기 말만 하려는, 의존적이고 어려운 건 안 하려고 하는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함께 따라다닌다. “외동딸이었어? 의외인데?”라는 표현은 마치 정해진 수순 밟듯이 자연스레 들어온 말이다. 내가 어리광을 피웠거나 애교가 많았던 인간이었다면 그건 반드시 외동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뿐일까, 나와 같은 ‘이혼가정’ + ‘재혼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을 바라볼 때 그 아이가 칭찬받을 일을 했다면 기본적인 수식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붙는다. 결국 내가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거나 바르게 그어진 선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게 되면 그건 바로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마치 당연한 일이거나 정해진 일처럼 여겨지는 경우를 살면서 종종 겪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실무도 잘 해내고 관련 공부도 열심히 하여 학습조직 모임에서 졸지도 않고 발표도 척척 해냈다. 너 좀 맘에 든다 분위기로 대규모 프로젝트에 파견도 다녀오고 나보다 경력 많고 스펙 좋은 사람들 모아놓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강의도 했다. 역시나 칭찬 일색이었다. 흡족했다. 그러나 중요한 인사이동에서 후순위로 밀리곤 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게 다 학벌 때문인가 늘 스스로 결론 내렸다. 지금은 경쟁 치열한 서울’턱별시’에서 중등교사로 공직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성실하고 열심인 나의 이 행동양식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공간에 몸이 담겨 있다. 역시나 사람들은 나를 참 좋게 평가한다. 흡족하다. 나의 사투리 말투에 하나둘씩 물어본다. “샘, 고향이 어디예요? 학교는 서울에서 다니셨어요?” 알고 있다. 아무 악의 없이 밥 먹다가 그냥 할 말 없으니 물어보는 질문이라는 거. 그러나 여기서도 학벌에 마음이 쭈그러드는 것은 스스로를 계속 수제비 반죽처럼 치대고 또 치대려는 고질병 같은 습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잘 숙성된 반죽처럼 언제든지 쫄깃하게 뜨거운 육수로 뛰어들 각오로 아무도 모르게 나를 부풀리고 또 부풀리면서 나는 더 쫄깃해지리라. 결국에 쫄깃해진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젠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뭐 하려고 반죽을 치댔던 거였지?




고성군 (2019)


  실은 잘 모르겠다. 세상과 관계없이 그냥 ‘나’이고 싶다가도 어쩌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나 한 명뿐인가 싶기도 했다. 갖가지 좋지 않은 선입견에서 탈피하고자 적잖이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마치 열심히 해야 하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만이 세상에서 내가 오롯이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같았다. 나는 잘해야만 인정받는 사람 같았다. 내가 잘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내가 외동딸, 이혼가정, 병든 엄마, 가난, 재혼가정, 계모, 빚 부자 아빠, 지잡대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까 봐 몹시나 신경 쓰고 살폈다는 걸.. 나도 이제는 알아버렸다. 이젠 내가 열등감이 많은 인간이란 걸 알아버렸으니 절반은 해결된 것 같았다. 좋았어. 그렇다면 극복해 보자. 내가 보듬어줄까? 내가 널 토닥여줄까? 무엇부터 시작하면 너의 그 열등감을 좀 하나씩 내려놓겠니?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면 괜찮겠어? 이제 그만 좀 파르르 거리고 우리 진정하자. 진정해라. 차분해져라. 느긋해져라....! 얍!


  못 하겠다. 너무 두렵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을 용기가 없다. 다 무너지면 어쩌나 그 걱정부터 앞선단 말이다. 아니 내가 비겁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나만 열심히 살고 있다고 착각한 건 아닐까? 내가 열심히 사는 게 진짜 열등감 때문일까?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정말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반죽을 그만 치댈 수가 없다. 이제 이만하면 됐다 싶다가도, 아니지. 아주 자연스럽게 이게 원래 나인 것처럼 보여야겠다 싶어서 냉큼 또 치대고 또 치대고. 한바탕 나를 못살게 굴고 나서 반듯하게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오! 그래? 그렇게 자란 사람치곤 훌륭한데?”


“지잡대였어? 그런 것치곤 꽤 똘똘하군!”







  밤 중에 매미가 우니까 잠 못 든 반죽 한 덩어리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결론도 못 내릴 생각의 끝자락에 달린 택(tag)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개봉 시 반품불가.


그래도 매미에게 한마디 해주자면.

매미야, 힘내지 마.

열심히 하는 이를 보면 화가 난다 말이야.

자꾸 열심히 치대는 누군가가 떠올라서.

매거진의 이전글 도둑질과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