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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Nov 09. 2015

낡은 내 수첩 속의 청춘 소환

지지리 궁상맞은 스무 살의 이야기

  책상을 정리하다가 서랍 깊숙한 곳에 고이고이 모셔 놓은 10년 전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매번 이사를 다닐 때마다 또는 속이 뒤집혀 청소라도 해야 살 것 같아 오래된 물건이나 쓰지 않는 물건들은 기필코 버리겠노라 선포하며 책상을 대대적으로 뒤집어엎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때마다 이 낡고 오래된 다이어리를 버리려고 치면 마음이 시큰거리고 목구멍에 포도알 하나가 탁!하고 걸린 듯 갑갑해져 실로 미안하여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시중에 판매하는 일정한 양식이 있는 다이어리가 아니었고 문구점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PD수첩’이라고 적힌 일반노트였는데 필요할 때 마다 달력을 그려 넣기도, 잡다한 내용들을 자유롭게 적어 노트로 쓰기도 하며 페이지마다 양식이 제각각이었던, 스무 살과 스물한 살 두 해에 걸쳐 사용한 다이어리였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것은 없었다. 대충 자를 대고 그어놓은 표들과 덕지덕지 붙여놓은 포스트잇, 급하게 받아 적은 듯 보이는 메모들을 보고 있자면 지금 내 앞에 그 때의 나를 데려다 앉혀놓은 기분이 든다.

  월별 스케줄 페이지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일정들이 한 달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페이지마다 ‘할일’이랍시고 적어놓은 메모와 무엇을 그리 놓치기 싫어서 받아 적었는지 급하게 받아 적은 듯 보이는 어느 누군가의, (그 당시) 나에겐 멋있고 힘이 된다고 여긴 조언과 격려의 메세지들이 곳곳에 느낌표 또는 별표를 달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메시지들이라 함은 이런 것들이다. 강의시간에 교수님들이 지나가며 하는 말씀들인 것 같은데 '결핍은 훌륭하다. 우리로 하여금 욕구를 만들어 내니까' 뭐 이런 식의 곱씹어 읽어보면 민망하여 입 밖으로 꺼내기도 창피하지만 그 때는 나를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게 지탱해준 멘트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이 수첩을 적고 있던 그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의 청춘을 한마디로 정리 해봐라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누군가는 미간이 찌푸려지겠지만 그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돈 밖에 모르는 청춘을 보낸 것이다. 이것은 내가 외면하고 싶은 콤플렉스이자 일종의 고백이다. 대학을 다닐 때도 모든 생활패턴과 기준이 돈이었고, 졸업식도 치루기 전에 부산에서 서울로 취업을 하여 직장 기숙사에 살면서 소정의 용돈 몇 푼만 남기고 매달 월급을 모두 고향으로 보내며 우리 가정에 뚫린 큰 구멍을 메우는 데 전력을 다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또한 생활이 돈 중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름 안정적인 직장이었던 공직생활을 호기롭게 그만두시고 새로운 사업을 펼쳤으나 동료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여 사기를 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우리에겐 너무 버거운 금액의 빚을 떠안게 되었다. 겨우 겨우 일어서 보겠다고 친척들에게 까지 추가로 빚을 내어 가게를 열었지만 과로와 스트레스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실려 갔을 땐 뇌지주막하 출혈이라는 진단명으로 뇌수술까지 받고 한동안 병원에 누워 계셔야만 했다. 엄마도 얼마안가 급하게 뛰어다니시다 오른쪽 발목에 골절이 생겨 병원생활을 하셨고 퇴원 후에도 가게 일을 온전히 해내지 못해 빚을 갚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생활비를 벌어내는 것도 버거운 시간들 속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집안을 가득 채우던 엄마의 울음소리, 한숨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자명종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3이 되어 수능대비 문제집을 사야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나의 소비는 엄마의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 같은 일이 되어 버렸고 엄마의 한숨과 울음은 때때로 분노로 이어져 결국엔 나에게로까지 화살이 날아들었으며 그 화살의 타겟은 공부고 꿈이고 다 때려치우고 어서 빨리 고등학교 졸업해서 공장에라도 취업을 하라는 엄포였다.

  엄마, 아부지의 인생이라고 구구절절 사연이 없겠는가. 나름은 고학력의 집안이었고, '공부해서 남주나'를 입버릇처럼 내게 어필하시던 분들이 나에게 공부를 접고 빨리 취업을 하라고 엄포를 놓는 것은, 그냥 이것은 구걸이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존심과 체면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구걸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선생님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몸도 잘 쓰며 표현력이 좋아 진로를 창작활동을 하는 쪽으로 가보라는 둥, 예체능 분야에 탁월한 소질을 가졌다며 체대나 무용과를 가보라는 둥(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니 참 웃기기는 한데 사실입니다. 흠.) 문학, 음악, 체육, 무용 선생님들의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 속에서 나는 늘 꿈에 부풀려진 상태로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 중 한 가지만 붙잡아도 먹고는 살겠다 싶은 마음으로 뭐가 됐든 성적이 좋으면 훗날 유리한 점이 많을 꺼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던 야무진 여고생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다 접고 취업을 하라고 하니 그 것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몰라도 뭔가 인생의 절반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듯하여 절망과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취업이든 대학이든 그 어떤 선택을 했어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고 분명 잘 해냈을 것이라고.)

  나는 빌고 또 빌었다.
  내 꿈은 접을 테니까 그럼 대학이라도 가게 해줘. 취업 잘되는 학과를 전공할게. 무조건 붙을게. 자신 있어. 나 절대 대학 등록금이나 용돈 같은 거 달란 소리 안할게. 나는 그냥 없는 사람처럼 살면 되잖아. 알바해서 등록금 내고 남으면 생활비에도 보탤 거야. 그러니까 나 대학은 가게 해줘요. 무엇이 나를 그토록 절실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절박했고 완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지지리도 궁상맞은 나의 청춘이. 결국 스무 살이 된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꿈에라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간호학과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것도 천만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런대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지방 잡대’라도(모교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뭇사람들의 객관적 경향이 그러하다는 것이지.) 가능한 일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간호학과는 무슨 얼어죽을 간호학과였겠는가. 다른 과에 비해 훨씬 비쌌던 등록금과 비싼 책값을 내기 위해, 그리고 더불어 내가 살아가야 하는 교통비와 밥값, 집에 보태줘야 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는 잠을 줄이고, 여가를 없애고, 끼니를 줄였다. 내가 원래 하고 싶은 공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지만 막상 간호학과에 와서 공부를 해보니 적성에 맞아도 너무 맞는 것이 아닌가. 이 점은 생각해보니 이런 반전이 또 있을까 싶다. 적성에 맞추기 위해 내 마음을 하염없이 훈련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억지로 간호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 치고는 너무 적성에 맞아 살면서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자부하며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다이어리 월별 스케줄 칸에는 온통 종류별 아르바이트 스케줄과 학교 강의시간, 틈새 공부시간이 적혀 있는데 그 아르바이트 종류만 따져도 참 다양하고 희한한 것이 많았다. 과외, 주차장, 수산시장, 어묵공장, 예식장, 학교 근로장학생, 신문배달, 대형할인마트 상품 프로모션이 그것인데, 시간 투자 대비 시급이 비싸고 집에서 교통이 그리 멀지 않은 곳 위주로 선택하다 보니 조합이 오합지졸이 되었지만 그 당시 누구보다도 알바에 있어서는 수익이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일 새벽엔 신문배달, 낮에는 온종일 학교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고 학과 총대를 맡아 근로장학생 활동을 하고, 주말 새벽엔 수산시장, 주말 오후엔 주차장, 방학 때는 주차장과 공장을 오가며 일을 했다. 그리고 가끔가다 끼어있는 공휴일엔 일용직 업무를 수소문하여 일당을 받아 챙겼고, 다음번에도 꼭 불러달라고 연락처를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등록금 낼 돈을 채우려면 어떻게든 성적을 잘 받아서 장학금을 받는 수밖에 없어 늘 학교 도서관이 폐관을 하는 시간까지 공부를 했지만 학과수석을 하기란 쉽지 않았고 전액장학금을 받질 못해 부족한 금액을 아르바이트로 채우게 되므로 성적이 잘 나와서 장학금 등급이 높으면 내 수중에 남는 돈이 많아지는 것이니 나는 짬짬이 쉬지 않고 틈새 공부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늘 피곤하고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새벽에 신문배달이 끝나고 강의 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스쿨버스 첫차를 타야만 했다. 학교가 멀어서 스쿨버스 첫차를 놓치면 상시운행 지점까지 가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야하니 차비를 아끼기 위해 아침 7시 40분에 집근처에서 출발하는 스쿨버스를 타고 버스 안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돌린다. 집에 와서 도시락을 싼다. 스쿨버스 첫차를 타고 학교에 1등으로 도착한다. 레포트를 하거나 공부를 하고 시간이 되면 강의를 듣는다. 짬짬이 교내에서 부여된 근로를 수행한다. 마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한다. 도서관이 폐관하면 또 집근처까지 데려다 주는 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도착한다. 이런 식의 일상은 대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반복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병원을 돌아다니며 실습까지 해야 했고 연이은 레포트 폭탄 테러에 잠을 자는 것은 어느 순간 사치로 변해있었다. 그 와중에 너무 허무 했던 것은 시간을 좀 아껴보고자 과외를 하겠다고 덤벼들면 다른 학교 학생들의 학교스펙에 눌려 명함도 못 내밀고 ‘지잡대’는 쓸쓸히 돌아서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친구는 나에게 힘이 되라고 했던 말인지 어깨를 토닥이며 던져준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 어려서부터 너의 그 지구력 하나는 끝내줬잖아. 체력장을 만점 받는게 쉬운 일이냐? 이번에도 지구력 싸움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나는 왜 지치지도 않았을까.
나는 왜 항상 웃고 다녔을까.
나는 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내 앞에서 힘들겠다는 위로를 하면 날이 서서 반박을 하곤 했다. 젊어서 괜찮아. 원래 20대 땐 사서 고생하는 거야. 이 순간이 다시 오진 않을 테니까. 나는 한순간도 그냥 헛되게 보내진 않을 거야.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단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기’위해서 나는 지치지 않고, 울지 않았고,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살았던 걸까. 나는 왜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수첩을 마주할 때마다 불가항력에 이끌리듯 하염없이 그 때의 나를 바라보곤 한다. 이렇게 수첩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 한편으로 자기연민에 빠져 슬픔으로 슬픔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때의 나는 이러한 사람이었으니 지금 비록 게으름의 노예로 전락하여 스마트폰 알람 없이는 약속도 다 잊어버리고 사는 삶이지만 네 안에 이런 사람은 아직도 어딘가에는 있을 터이고 언제든지 다시 부를 수 있다고 독려하는 것 같기도 하다. 빼곡히 적힌 내용들만큼이나 가득 찼던 내 시간들이 대견하여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말로 다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이 한 번씩 내 생활에 어떤 방식으로든 바람을 불어 일으켜 주기도 하여 아직도 이 수첩을 버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버리기는 힘들 것이란 예감이 든다.

지금은 모든 빚이 청산되었다. 빚이 또 빚을 낳고, 그 빚이 또 빚을 만들어내곤 했지만 그 속도를 맞추기 위해 우리는 매번 신발끈을 고쳐 묶었고, 숨이 차서 토할 것 같은 뜀박질을 한 끝에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것은 우리 가족이었다. 마지막 빚이 정리되던 그 날 우리는 엄마, 아부지의 형제분들을 모셔놓고,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쫓아 내려가 소박하게나마 LA갈비 파티를 열었었다. 엄마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지만 나는 또 웃었다.


하염없는 지난 이야기는 매번 잊혀지지도 않고 이런식으로 내 마음을 달군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때의 내 청춘을 소환한다.


이리 와봐. 한번만 안아보자, 우리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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