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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Jan 09. 2018

잠든 아기와 나 2

엄마의 사생활

   아기가 낮잠을 잔다. 낮잠을 유도하기 위한 나의 수고로움을 치하하며 거실에 벌러덩 누워 마트에서 비싸지만 좋은 재료라고 어필하던 상인의 말을 믿고 사온 4천원짜리 뻥튀기를 꺼내 와 소음이 생길까 싶어 입안에 넣고 살살 녹여 먹는다. 얼마 전까진 아기의 낮잠 시간엔 <빨강머리 앤>을 다시 읽었다. 어릴 때 애니메이션으로 봤던 장면들을 떠올리니 한 장 한 장이 술술 넘어갔다. 재밌었다.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책 읽는 즐거움이 있다. 낮잠은 단언컨대 어미에겐 축복이다. 보통은 1시간 반, 길게는 2시간 동안 지속되는 아기의 낮잠 타임. 지금이다! 내게 주어진 신나는 사생활.




책을 읽는다


   요즘엔 어떻게든 일과의 틈이 생기면 쪽 독서를 하려고 애쓴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누가 무언가를 못하게 하거나 어떤 것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 무언가 내지는 어떤 것이 간절히 하고 싶어 지는 그런 이상한 심보 말이다. 독서가 그랬다. 아기가 생기기 전 내게 주어졌던 휴식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독서보다 다른 일들로 채워졌었다. TV를 보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가거나 커피를 홀짝이며 수다를 떨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아기가 생기고 나서 여가시간이라는 것이 소멸된 이 시점에선 괜히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난데없는 박탈감을 느끼며 '앗! 정말 책도 한 권 읽지 못하는 이런 생활은 최악이야! 어떻게든 나는 독서를 하고야 말겠어!'하며 거의 뭐 시쳇말로 '악으로 깡으로' 정신으로 책을 읽고 있다. 가끔 활자를 눈으로 찍어내고 있는 것뿐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만큼 피곤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독서라는 행위를 하고 있다며 안도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자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빨강머리 앤 다음으로 손에 쥔 책은 <최고의 휴식>이다. 아직 초반부라 전체 내용은 모르겠으나 현대인의 뇌는 너무나도 피로하여 진정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라고 겨우 초반 조금 읽은 독자의 성급한 요약이다. 그 책을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담을 때만 해도 정말 내게 필요한 내용이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구매를 했는데 이게 뭐람, 가만 보면 나도 스스로를 독서 행위라는 숙제로 쉬지 못하게 하면서 진정한 휴식을 찾겠다고 또 그 책을 읽고 있다니.. 이 무슨 모순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아무튼 나는 여가가 없고 틈이 생기면 책을 읽으며 여가라고 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어질러진 아기의 장난감 정리, 울어대는 세탁기 알림, 또 울어대는 나의 배꼽시계를 진정시킨 후에 하는 진정한 ‘쪽 독서’이지만 말이다.


오늘


SNS를 한다


   예전에는 SNS를 하지 않았다. 관계를 맺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더 재미있고 모바일 상에 나의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 시간 지나고 다시 봤을 때 아무 의미 없이 사소한 관심만 소비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요즘 SNS 특성상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 계정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 보니 사생활을 자꾸 긍정 귀신 내지는 행복 요정처럼 포장하게 되는 것도 불편했다. 말하자면 이유는 더 많지만서도 어쨌든 SNS는 하기 싫었다. 그러나 요즘엔 상황이 좀 달라졌다. 앞에서 언급한 구구절절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인스타그램(Instagram)과 페이스북(Facebook)을 드나들며 여기저기에 좋아요를 누르고 돌아다니는 중이다. 어쩌다 달라졌냐고 물어본다면 ‘어쩌다 보니...’ 라고밖엔 내놓을 대답이 없다. 어느 순간 내 손엔 휴대폰이 들려있고 나는 한 동안 엄지를 혹독하게 운동시킨다. 아마도 예전엔 관심도 없고 딱히 새롭지도 않던 소식들이 육아휴직을 하며 두문불출 집을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된 이제에 와서는 세상이 달리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주로 나의 전공이나 직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식들로 가득하다. 육아 휴직을 하고 있지만 내 직업 필드의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다 보면 새로운 정보를 배우기도 하고, 일할 땐 체감하지 못했던 속도로 빠르게 세상이 변하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도저희 육두문자를 날리지 않고서는 가만 지켜보지 못할 고발 기사에는 파르르 흥분하기도 하면서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기분을 내고 있다. 반면 인스타그램은 평일 대낮의 동네 목욕탕처럼 끼리끼리 좁은 온탕에 둘러앉아 끝도 없이 시끌시끌하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이 모두 그들 자녀 사진을 올리며 우리 아이는 이렇게 크고 있고, 오늘은 뭘 하며 놀아줬고, 요즘엔 이러한 행동을 하고, 아이가 몇 개월 몇 살인데 요맘때는 이런 고충이 있고.. 이런 속속들이 이야기를 올리고 있어 그런 글들을 읽기만 해도 한바탕 수다를 떤 기분이라 적적한 마음에 실오라기 같은 위로가 된다. 때로는 저 엄마처럼 저렇게 나는 아이에게 ‘잘’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우리 아기가 잘 못 크면 어쩌나 하며 불안함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혀 동요될 때도 있기는 하지만 난 또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 극복을 해내고, 아이가 요만할 때 겪는 고충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꽁꽁 쥐고 있던 고통의 덩어리는 순두부처럼 흐물흐물 해지며 일순간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흥청망청 좋아요를 누르고 다니며 공감을 표현하게 된다. 무엇보다 실시간 계속 업로드되는 게시물 덕에 동창들의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마치 하루의 일과를 보고받는 기분마저 느껴질 때쯤 빙긋이 웃으며 생각한다. 너네도 지금 대화가 필요한 거냐?


상큼


먹는다


   뻥튀기는 바삭바삭 소리를 내가면서 앞니로 뚝뚝 분질러가며 먹는 것이 제 맛인데 입안에서 녹여 먹으려니 감질나서 못 먹겠다. 그래도 입은 심심하다. 가만 생각하니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건 사과 반쪽과 고구마 반 알이다. 누가 보면 다이어트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살면서 절대 먹을 것을 줄이면서 살을 빼 본 적이 없다. 내 입은 누구보다 관대하고 포용력이 넓으며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있어 식탐 많다는 소릴 숨 쉬듯이 듣고 있기에 먹을 것을 줄이느니 활동량을 늘리는 쪽을 택하는 게 훨씬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겨우 사과 반 쪽과 고구마 반 알이라니 정말 조촐한 끼니였다. 아침 이유식 챙겨주면서 옆에서 같이 씹어먹던 사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 사과 반쪽은 내게 다오’ 신호를 보내는 아기에게 잘게 썰어 양도하였고, 점심 간식을 챙겨 주며 생존을 위해선 나도 옆에서 같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냉장고에서 꺼낸 찐 고구마는 반 정도 먹은 시점에 졸린 눈을 비비며 내 다리를 부둥켜안고 비몽사몽 비명을 질러대는 아기를 살살 달래 재우느라 내팽겨 쳐버린 이후 다시 먹으려니 이 놈의 고구마 도저히 지겨워 못 먹겠다 싶어 내다 버렸다. 오, 주여 제가 음식을 버리다니요! 저는 남은 음식은 모두 제 뱃속에 버리던 여자였는데 말입니다..


   이런 생활이 정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든 잘 좀 챙겨 먹으라고 친정과 시댁에서 갖은 밑반찬과 식량을 보내 주신다. 띵동~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하면서 나를 구원해주러 온 흰색의 거룩한 스티로폼 상자를 열면 정말 엎드려 절을 올릴 정도로 감사하고 송구하고 그렇지만 살뜰히 소분하고 정리해서 냉장고에 정리해 봐도 그것이 나의 식탁 위로 올려지기 까진 엄청난 게으름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니 구호식량 소진도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못 먹어서 신경질이 날 때도 있고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한가 생각해보면 당이 떨어져서 그렇구나 하며 괜히 자책하는 때도 있지만 그런데도 챙겨 먹기는 정말 눈물 나게 귀찮다. 이제 세 끼니의 이유식을 먹는 자랑스러운 10개월 인생에겐 군기 바짝 든 이 어미가 칼 같은 시간에 칼 같은 식단을 맞춰주고 있으면서 왜 본인 끼니는 이렇게나 귀찮은 걸까 때론 스스로가 답답하다. 그래서 어제도 간단하게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구마를 한 냄비 쪄서 냉장고에 넣어 둔(사실은 가두어 둔) 것인데 그걸 씹고 있으니 이틀 만에 지겨워 못 먹는 상황이 되었다. 아기 먹일 때 잠깐 냉장고 열어서 반찬 꺼내고 밥 퍼서 담고 김 꺼내서 딱 그렇게만이라도 먹어라. 엄마, 이상하게 그게 참 귀찮아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당장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으실 듯하다가도 그 모든 걸 꾹꾹 누르며 살살 달래 보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다 티나요 엄마. 풉.


먹고 싶다


   이 모든게 저녁 식사 때문이다. 일단은 그렇게 결론을 내려 보았다. ‘저녁 식사’라는 거대하고도 거창한 과제가 내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아래로 나를 쳐다보고 있어 그와 대결에 임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나를 내버려두려고 한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떤 것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는 나의 남자는 늘 말한다. 집에 가서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퇴근하면서 맛있는 걸 사 갈게. 퇴근해서 그냥 좀 시켜 먹자. 저녁은 그냥 있는 반찬 꺼내서 정말 간단하게 먹자. 남자의 이 모든 스윗한 제안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괴로워했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왜냐고 또 물어보면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그런다. 달걀프라이 하나를 하더라도 어제와는 다른 식탁이기를.. 아들이 더 자라서 이유식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둘러앉아 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게 될 때 저가 먹고 싶어 하는 반찬 한 두 개 정도는 뚝딱 해낼 줄 아는 엄마이기를.. 맞벌이라 퇴근하면 둘 다 지치고 피곤하지만 우리가 손수 준비한 밥을 맛있게 먹으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기를.. 이런 나의 소망들이 실현되는 그 언젠가를 기대하려니 당장에 외식과 배달의 노예로 살아온 지난 세월의 흔적 때문에 내 손은 요리를 모르는 곰손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조금씩 변하려고 노력은 해야겠고 그나마 투자 대비 가장 많은 인원이 혜택을 보는 시간이 저녁 식사이니 나머지 끼니에 대한 노력은 버리기로 했다. 내 입만을 위해 차려먹고 치우고 다시 채우고 하는 과정을 잠시 생략해버리는 게 진심으로 나를 위해 벌이는 하나의 미련한 관용이다. 배고픔보다 귀찮음이 더 괴로운 요즘이므로 저녁을 대하는 거창한 나의 태도를 높이 사며 낮동안의 게으름을 허락하노라. 에헴.


생각



계획한다


   아기가 깨면 잠깐 마트를 다녀올까 생각 중이다.  냉동실에 얼려놓은 일주일치 아기 식량이 하루치밖에 남지 않아 오늘 밤부터는 다시 일주일치 이유식 만들어놓기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솔직히 장보기를 핑계 삼아 우리 둘의 화려한 외출 놀이가 하고 싶은 게 본심에 더 가깝다. 요 근래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다고 하여 창문 열기도 망설이며 집에만 얌전히 있었더니 요즘 부쩍 기온이 뚝 떨어졌다는데 우린 안 나가 봐서 추운 줄도 잘 모르겠고, 아기도 집 안에서만 놀기 답답할 테니 바깥 구경도 좀 시켜줘야 할 것 같다. 키즈카페도 문화센터도 다니지 않는 어미랑 지내는 우리 아기가 심심할까 봐 종종 눈치를 살피지만 이 세상 모든 게 신기할 어린것이 심심할 틈이나 있을까 매번 꾸역꾸역 합리화도 해본다. 오늘의 빅 이벤트로 대형마트 구경을 준비했으니 아기도 오늘만큼은 놀이 구색에 만족하겠지 내심 기대한다.


   아기가 노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작은 체구의 이 자유의지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도 체력이 좋은 걸까. 혼자 놀 때는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꺼내고 쏟고 무너뜨리고 여기 있던 물건을 저기로 옮겨 놓으며 구석구석을 꼼꼼히 조사해 놓는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때론 까치발을 들고 윗동네 상황은 어떤가 확인하고, 부엌에서 설거지 중인 나에게도 와서 옹알옹알 간섭을 잊지 않는다. 그래도 저 혼자 놀아주면 정말 성은이 망극하다. 같이 놀아줘야 할 타이밍엔 내 나이가 20대가 아닌 것이 너무 밉고, 내 몸이 강철이 아닌 것이 무척 서러울 정도로 부쩍 체력이 달린다. 그림책을 읽어줄 땐 매소드 연기로 과장된 액션을 첨가해야 하고, 그림책에 나오는 짐승에 따라 목소리도 달리 내줘야 하다 보니 목이 따가울 때도 있다. 하지만 책 읽어 주기도 양반에 속한다. 아기가 정말 좋아하는 잡기 놀이를 할 땐 내 무릎이 왜 이러는지 야단을 치고 싶을 만큼 관절이 아프다. 가만 보자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다시 확인해 봐야 하나.. 내 나이 서른다섯이 확실한가 잘 생각해봐야겠다 싶을 정도이다. 아기는 잡기 놀이를 무척 좋아한다. 아기와 잡기 놀이는 어린것의 운동능력을 감안하여 최대한 아슬아슬한 척 스피드를 맞추어 기어 다녀 주면서 잡고 잡히는 걸 교대로 하는데 나는 헉헉대는 숨소리를 숨기며 겨우 따라다니지만 아기는 꺅꺅거리며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기뻐한다. 그 와중에 웃긴 건 이상하게 좇고 쫓기는 긴박한 스릴 만점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도 덩달아 즐겁다는 것이다. 역시 인간은 유희하는 존재인가. 잡기 놀이만큼이나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것이 박수 치기의 시간. 아기가 자랑할만한 행동을 보였을 때—가령 걸음마를 선보인다던가 하는 것인데, 맙소사 이제 겨우 11개월 바라보는 우리 아기가 남들보다 약간 빠르지만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 무척 기쁘면서도 앞으로의 노고를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하지만—나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쳐주고 아이돌 팬클럽 못지않게 환호성을 지른다. 아기는 반복을 좋아하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박수와 함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정말 하얗게 불태우게 되는 아기와의 놀이 시간.. 좀 더 튼튼한 엄마가 되어야겠다.


걸음마


   오늘 마트에 가서 살 이유식 재료들을 메모장에 적어 본다. 산 재료가 남으면 그걸로 어른이들 끼니엔 무엇을 요리해서 올려야 하는지도 함께 고민한다. 대게는 남은 채소를 볶거나 국, 찌개의 재료로 사용하지만 요리를 망치려고 태어난 내 손이 좀 더 쓸만한 손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음식 만들기를 시도해 봐야 하나 늘 갈등하고 걱정한다. 할 줄 아는 거나 제대로 해보자, 이것 저것 해봐야 실력이 는다 이 두 가지 의견이 내 안에서 자주 다툰다. 아기 이유식도 안 먹여 본 채소를 먹여보고 싶은데 사실 나도 태어나서 한 번도 안 먹어본 채소를—예를 들면 빨갛게 색깔이 예쁜 비트라던가 하는 것을—어찌 손질하여 아기한테 먹여야 하나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아기 밥은 이유식이라서 정말 마음에 쏙 든다. 10개월을 넘긴 우리 아기는 현재 일명 ‘죽도 밥도 아닌 상태’의 밥을 먹는데 그런 상태의 요리라면야 나의 특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풉. 그래서 말인데, 와! 난 내 아기가 정말 좋다! 그 무슨 당연한 소릴하고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자식이라서 좋은걸 다 차치하고서 난 우리 아기를 정말 인간적으로다가 참 좋아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아기는 내가 해주는 이유식을 아주 쌀 한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기 때문이다. 다 먹고 나면 더 먹을 순 없느냐며 간절한 눈빛으로 추가 주문을 요구하는데, 살면서 내가 만든 음식을 이렇게 잘 먹어주는 사람은 우리 아기가 처음이다. 이러니 내가 우리 아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냐 말이다. 그렇게 잘 먹는 아기를 생각하면 이유식 식단을 짤 때도 얼마나 신이 나고 욕심이 나는지 프로페셔널 셰프 저리 가라다. 오늘 마트를 가게 된다면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재료를 선택해주마. 하하. 아기의 낮잠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 모든 계획의 순간들 마저도 아기가 더 어렸을 땐 꿈꾸지 못했던 것들이라 소중하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이런 순간이 나에게 올 줄이야.





그리고, 글을 쓴다.


   아기가 낮잠을 자는 동안엔 소음을 최대한 줄이는 행동을 선택한다. 낮잠 도중에 예상보다 일찍 깬 아기의 짜증은 에스프레소 투샷에 고삼차를 곁들인 양 그 어떤 짜증보다 독하고, 충분히 휴식하지 못하고 다시 놀이를 시작한 아기의 그날 오후는 모든 행위를 함에 있어 아기의 눈치를 살살 살펴야 하는 엄마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노고를 가져다준다. 비위를 조금만이라도 못 맞추어 주면 칭얼과 호통으로 북어처럼 두들겨 맞는 어미를 어른답게 견디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결국엔 저녁이 되어 돌아온 남자에게 대륙간 탄도 히스테리 미사일 폭격을 날리게 되는 참사가 일어난다. 그런 혹독한 대가를 치르느니 알아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아기가 낮잠을 자는 동안에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소란을 떨며 빠르게 처리하기가 불가능하다.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마음의 건강을 위하는 정신으로 천년만년 사는 엉금엉금 거북이다 생각하고 먼 곳을 바라보며 욕심부리지 않고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살금 살금을 기본으로 하는 정숙하고도 절제된 몸놀림을 취하며 할 수 있는 일 중 최근에 가장 보람된 것이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것을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기를 돌보며 바들바들 초보 어미 역할을 해내는 동안 잠시라는 짬이 생겨도 마음 편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논문을 적겠다는 것도 아니고 육아 생활 보고서를 적겠다는 것도 아니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끄적끄적, 이 것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한 단락을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 보면 아기는 깨어나 어미를 부른다. 으애앵. 그래, 이 정도도 많이 왔다. 그러니 나를 부르면 냉큼 달려가리. 나 겨우 한 단락 적었지만 말이다 아가.. 으애앵.



꿈 같은 시간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창작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빈 메모지에 꽃 한 송이 그리며 낙서를 할지언정 내면을 들여다보고 꺼내고 표현하는 과정을 하지 않으면 삶의 채도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엄마도 날짜 지나 찢은 달력 뒷면에 하염없이 볼펜으로 허투루 그림을 그리셨나 보다. 어떤 날은 첩첩산중을 어떤 날은 꽃 한 송이를 그리고 어떤 날은 모자 쓴 여인을 그려 놨던 꾸깃한 달력을 기억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그림들이 어떤 날은 재밌기도 어떤 날은 무섭기도 그리고 어떤 날은 슬퍼 보이기도 했으니 모녀는 제법 잘 통했나 보다. 농밀한 감정들과 현란한 잡념들 중 하나라도 지긋이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대화를 건넬 수 있는 삶, 늙어 죽을 때까지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아기의 짧은 낮잠 시간이 규칙적인 일과의 한 부분이 된 이제에 와서 비로소 느꼈다. 나는 내 것을 꺼내며 창작이라 일컫는 이 순간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기가 아직은 한참은 어려서 지금까지는 휴대폰 잠시 손에 쥘 여유도 부족했던 터라 나의 소망은 너무나도 감상적인 것으로 괄시당했었으나, 이제는 아기에게도 깨고-먹고-놀고-자고-먹고-놀고-씻고-자고라는 일과가 생겼으니 다시 감상적이던 내 소망을 감성적으로 슬며시 꺼내어 봐도 되지 않나 기대해 보며 오늘도 끄적거려 본다.


   엄마의 사생활은 자식의 행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엄마인 것을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면 결국엔 그 끝에 내 엄마가 보고 싶다. 이렇게 자식의 내면 속에 평생을 지배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존재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잘 살아내야 하겠다.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내 자식에게도 보여주며 나도 나로 행복하게 살터이니 너도 멋진 너로 살아가렴. 나도 나의 시간을 창작하며 살아갈 테니 너도 너의 인생을 구석구석 꾸며보렴. 오늘도 짧은 나의 사생활 타임을 알차게 써먹으며 나의 존재를 확인해 볼까 한다. 오랜만에 글을 쓰니 손가락이 무척 피곤하다. 수고한 내 손을 위해 따뜻한 우엉차를 끓여야겠다. 지금은 우엉차 우리듯이 내 몸도 뜨끈한 물에 오래도록 푹 담기고 싶다. 아가야, 부디 깨지 말고 꿀 잠 자길 바래.





잠든 아기와 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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