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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May 12. 2017

잠든 아기와 나 1

엄마, 감사합니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든 까만 밤에 안방과 연결된 베란다 창가에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하루 종일 추적이더니 밤까지 시원하게 내리는 반가운 서울의 비. 이제 막 또 한 번의 끼니를 챙겨 잡수시고 내 어깨에 얹혀 안겨 트림이 나오길 기다리는 아기와 함께 베란다 가까이로 가서 섰다. 창문을 열고 싶지만 아직은 세상살이 45일밖에 안된 어린 생명이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그러지 못하고 창문에 붙어 서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빗소리에 조용히 집중해본다.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빗소리를 들으면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 문은 닫혀있지만 비 냄새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비 냄새가 주는 안정감과 향수에 잠시지만 꿈을 꾸는 기분이 든다. 그 냄새를 생각하니 마음이 노골노골해진다. 하늘로 들어 올린 코끝으로 비 냄새에 취해있는 동안 아기가 드디어 트림을 했다. 이 작은 것이 뱉어내는 트림은 냄새도 고소하다. 혹시나 아기를 자기 자리에 눕히는 과정에서 다시 깰까 싶어 깊은 수면으로 파고들 때까지는 일단 안고 있어 보기로 한다. 내 팔은 후덜 거리고 손목은 전기가 찌릿하지만 그 핑계로 나는 빗소리나 더 듣지 뭐. 사람이란 존재는 참 궁상맞지 뭔가. 초보 육아에 허덕이며 수면이 부족한 이 순간에도 빗소리에서 낭만을 캐내어 어금니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이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임신을 해서 출산을 하고 아기와 함께 지내는 과정 동안 수백 번 수만 번 생각했다. 엄마도 날 이렇게 키웠겠지?

엄마, 감사합니다.

  어릴 때 간간이 '너 어렸을 때 말이야-'하면서 들려줬던 이야기들.. 귀 담아 들어놓을걸 그랬다. 그때는 나도 어렸기에 그런 이야기들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나도 이제 '엄마'라는 역할을 가슴에 달고나니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도 듣고 싶어 졌다. 엄마도 이렇게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사랑스러웠나요? 엄마도 이렇게나 깨어있는 깊은 밤이 이유도 없이 외로웠나요? 엄마도 이렇게 팔이 후덜 거리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나요? 엄마도 내가 깨물어버리고 싶을 만큼 귀여웠나요? 엄마도 이렇게 날 안고 있으면 세상 따뜻하고 포근했나요?


  이제야 알겠다. 가끔씩 엄마가 왜 날 터질 듯이 끌어안았는지. 숨이 막혀 갑갑해 죽겠고만 꼼짝도 못 하게 안고 있었더랬지. 이제야 공감이 된다. 엄마가 왜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는지, 왜 울고 있는 애를 달래진 못할 망정 사진을 찍어댔는지. 어릴 땐 나의 아기 때 사진 중 이유식을 얼굴과 온몸에 칠갑을 하고 있는 사진과 오만상을 찡그리고 울고 있는 사진, 울고 나서 퉁퉁부은 눈에 꼬질꼬질한 얼굴로 공갈 젖꼭지를 물고 있는 사진들이 참 못생겼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만큼 이쁜 사진도 또 없다. 매 순간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모습이 예뻤을 거야.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눈시울과 목구멍이 뜨끈해진다. 엄마도 당신의 엄마를 그리워하며 까만 밤 아기와의 시간을 보냈었겠지? 가슴이 두근두근. 엄마가 보고 싶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산모들이 했던 말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출산의 고통은 말도 안 되게 힘들다는데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 아이를 품에 안으면 고통을 다 잊어버린다는데 너무 과장된 표현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산을 하던 그 순간, 나는 생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이상한 고통을 맛보았다. 내가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은 찰나 아기가 나왔고 양수에 퉁퉁 불고 태지에 범벅이 된 채 으르렁 울면서 내 가슴 위에 얹어진 아기를 보자 거짓말처럼 내게도 방금까지의 그 비현실적이었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었다. 기뻤다. 뱃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꿈틀대던 녀석, 샤워하고 있으면 내 옆구리를 쭉 밀던 녀석, 산책을 하며 노래를 부르면 신나서 팔딱대던 녀석이 드디어 세상밖에 나왔다. 그 순간엔, 아.. 이제 비로소 끝났다 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건 정말이지 극한 고통 뒤에 잠시 판단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어마어마한 착각이었고, 모든 것이 이제야 시작된다는 것을 모유를 먹이러 수유실로 내려오라고 하는 신생아실의 연락을 받고 난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비록 아기는 나와 떨어져 신생아실에 있지만 아기에겐 내가 수시로 필요했고, 바깥세상에 나온 지 하루밖에 안된 생명이 내가 주는 모유로 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게 엄청난 책임감을 견인했다. 또다시 심장이 콩닥콩닥. 잘 하고 싶다.


   책임감의 절친은 부담감이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내 역할에 대한 자신감 저하로 조리원을 퇴원하기가 무척 두려웠었다. 초보 엄마인 주제에 완벽하고 싶어 마음이 아주 무겁기만 했다. 아기를 돌본다는 것, 아기를 키운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해 많이 듣고 접했고 더군다나 내 전공이 간호학이라 아동간호학 과목에서 아기에 대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었냐 하지만 그 수많은 이론 예습은 현실의 실전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거기다 아기는 말도 할 줄 몰라 온통 오로지 울음으로 표현을 하니 무얼 원하는지 추측하며 돌볼 때면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걱정이 많았다. 일단 저 어린것이 울면 열길 재쳐 두고 얼른 달려가 울음소리를 해석해 보지만 정답을 잘못 때려 맞춰서 심기를 건드리면 얼굴이 터질 듯이 울어댄다. 나는 잘해보려고 뭐든 해본 건데 이 어린것의 분노 가득한 무한 발차기는 멈출 줄을 모르고 달래 보려고 안으면 허리를 뒤로 꺾어  '이것 봐라. 내가 이렇게나 화가 났느니라.' 하며 등을 활처럼 휘어 보여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억울할 때도 있지만 어린것의 말 못 하는 억울함보다 더 할까 싶어 어미는 군소리 없이 넙죽 엎드려 떠받들어야만 했다. 녜, 녜, 배가 아프십니까요. 제가 배를 좀 문질러 드리겠습니다. 어이쿠, 배가 고프신데 제가 눈치도 없이 기저귀를 열어봤습니까요! 암요 암요, 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어린것님이 안아 달라하시면 안아드려야지요.


  걱정되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보다 중요한 건 믿음인 것 같다. 늘 그랬듯 이 말 저 말에 쉬이 휘둘리지 말고 '넘치는 사랑을 담아 정직하고도 꾸준하게 최선을 다한다면' 아기도 나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 하고 믿고 싶다. 그저 지금은 모든 힘겨움이 기꺼이 견뎌진다는 것이 신기하다. 몸은 낡고 녹슨 자전거가 된 기분에다 잠은 턱없이 부족하고 밥도 항상 급하게 먹어야 하며 취미생활은커녕 독서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순간들이지만 내 모든 시간을 어린것에게 다 양보해줄 의향이 생겨난다는 것이 정말로 신기하다. 내 소망을 잠시 미뤄둘 줄 알게 되는 것, 나보다 아이에게 시간을 들여 아이가 편안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좀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것,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어 눈물이 핑 돌지만 이내 마음이 다시 추슬러진다는 것, 키워주신 부모님을 수차례 떠올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부족한 나를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서 길러봐야 철이 들고 부모 마음을 안다고 그랬나 보다. 이렇게 보니 아기를 키우는 건 인격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제 겨우 아기를 키운 지 45일밖에 안되는데도 이렇게나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달라지는 걸 보니 저 작은 생명체가 나를 철들게 만들려나 보다.


사람 맹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로 다시 태어난 지 겨우 45일이 된 나는, 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나에게는 한 인간으로서 소소한 것에서부터 거창한 것 까지 이뤄내고 싶은 바람과 목표들이 많이 있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해보고 싶은 것이 내 욕심이었더랬다. 그 마음을 접는 것, 내게는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신생아나 다름없는 내 처지를 생각하자면 초보 육아에서 본전이라도 찾고 싶다면 실수를 피하는 것, 기본이라도 하는 것에 집중해야만 한다. 거참, 이렇게나 내가 비장하다. 웃긴 게, 왜 소변 발사는 꼭 기저귀 갈 때마다 쏘는 것일까. 하는 요상한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낸들 꿈에야 알았겠냐 말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게도 새로운 세상이고 신랑이 귀가하기 전까지는 온종일 아기와 둘이서 씨름 내지는 실험—가령, 울음소리별로 뭘 해주니까 그치더라 같은 것—을 하게 되는데, 적잖은 스트레스를 살살 눌러가다 보면 결국엔 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나 거창했던 자아실현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한 것들이 어떤 때는 수면과 끼니 앞에서 그것들을 뛰어넘을만한 의지가 샘솟지 않아 쉽사리 무너지더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나와 내 새끼의 밥숟갈을 내려놓을 만큼 중요한 일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과업을 달성하리라. 엄마로서 폭풍 성장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방법이 찾아지겠지. 일단은 지금 내 어깨에 얹혀 트림을 하고 솜사탕 같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이 아기가 부디 깨지 않고 몇 시간이라도 푹 잠들기를 소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먹고 자는 생존의 기로에서 육아를 외친다. 하하.








  잠든 아기를 자리에 내려놓으니 힘주어 받치고 있던 팔꿈치가 펴지면서 통증이 몰려온다. 아직 목을 가누지 못하니 세워 안고 있을 때 안락함을 제공하기 위해 내 양팔의 관절이 무척 활약하는 중이다. 아마도 팔의 근력은 나날이 강해질 것 같다. 눕혀놓은 아기는 몇 차례에 걸친 용쓰기 트위스트를 추더니 비로소 깊은 잠에 빠졌는지 숙면일 때 나오는 만세 자세를 취했다. 귀엽다. 자고 있는 아기를 구경하고 있는 건 참 재미나다. 잠꼬대를 하는지 배냇짓을 하는지 히죽거리며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하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뜬끔없이 흐느끼기도 한다. 피융~ 피융~ 하면서 중력에 빨려가듯 잠으로 빠져드는 숨소리로 깜찍함을 발산하기도 한다. 어떨 땐 얕은 잠이 든 상태에서 자신의 방귀소리에 놀라 꽥꽥 울기도 하는데 얼른 안아서 토닥여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떼고 다시 잠이 든다. 그런 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참는 일은 정말이지 괴롭다. 내 웃음소리에 깰까 봐 재채기를 참는 심정으로 입을 틀어막아 본다. 요즘엔 아기를 재울 때 이런저런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임신했을 때 자주 흥얼거리던 언제나 푸른 네 빛의 '소나무'나 성당 미사 시간에서 '주님의 기도'에 멜로디를 붙여 만든 곡이라던가, 동쪽 서쪽 가리지 않고 반짝이는 '작은 별',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이 주로 선곡된다. 자장가 18번으로 당첨될 곡을 정하기 위해 아기가 어느 곡에 더 편안해하는지 이것 또한 실험 중이다. 비록 노래를 부르다 보면 아기보다 내가 먼저 졸고 있지만 말이다.


   나에게도 자장가가 있었다.

  엄마가 늘 불러주셨던 자장가는 '라 스파뇨라'라는 노래였다. 어릴 땐 그 노래가 어디 나라 말인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엄마가 배를 문질러 주면서 느린 템포로 조용히 읊조리듯 불러주는 그 소리에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깊은 바다속으로 묵직하게 가라앉듯, 중력이 몇 배는 커져서 날 강하게 끌어당기듯 편안한 밤을 맞이하게 해 주었던 그 자장가와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자라면서 나는 줄곧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정확한 가사는 모르지만 들리는 발음대로 따라 하는 것인데, 내 귀에는 '라스파뇨라 소노라 벨라~ 레지나 쏜델라모~ 듀티니 디코노스텔라~ 스텔라 디 비뽀스텐도~' 대략 뭐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Di spagna sono la bella
Regina son dell'amor
Tutti mi dicono stella
Stella di vivo splendor
스파뇨라 아름답구나 꽃같이 아름답다
천진한 그대의 마음 빛나는 눈동자여

출처: 블로그 [김준호의 음악 이야기]
         http://naver.me/FBRtWhgl

   엄마가 내게 들려주셨던 그때의 그 감성으로 고요하고 속삭이듯 부르면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는 그 순간이 참 행복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은 문득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 보고자 어릴 때 들려주던 자장가를 찾아서 들어보기로 했다. 살면서 한번도 그 노래를 검색해서 들어보거나 해볼 생각은 못했었는데 처음으로 인터넷에 검색해서 알아낸 노래의 정체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실루엣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충격적이었다. 우리 엄마가 읊조리듯 고요하게 속삭여주던 그 노래의 실체는 사실상 아주 경쾌하고 우렁차게 부르는 이탈리아 칸초네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첫사랑의 환상이 깨지듯 내 기억은 이게 아닌데 괜히 찾아봤나 싶기도 했지만 가사를 보니 곡의 실체야 어떻든 어찌나 행복하던지 말이다. 왜 하필 발음도 요상한 다른 나라말인데 꼭 그 노래를 들려줬을까 생각하니 저렇게 고운 가사 속에 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노래를 듣고 있던 아기 시절의 나는 비록 가사는 모를 테지만 가사만큼이나 아름다운 엄마의 목소리와 눈빛을 감상하며 무지갯빛 꿈을 꾸었을 테지.


  이런 기억과 정서를 간직할 수 있다는 건 엄마가 몰래 내 삶 속에 찔러 숨겨놓은 선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먼 훗날 이것이 내게 이렇게나 좋은 기억으로 선물같이 남아 있을 줄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 한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리 아들에게 자장가를 정성 들여 불러줬다. 닭살 돋을 만큼 낯간지러운 고운 목소리로 분홍분홍 한 얼굴 표정을 하고 아기의 눈을 바라보며 한참을 불러본다. 나도 너에게 자장가가 되어줄게. 삶의 어느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그런 선물이 되어줄게. 너도 어른이 되어 살아가다 지치고 힘든 날이 찾아오면 엄마가 배를 만져주며 불러준 이 노래를 한 번쯤 떠올려 보렴. 그러면 어느새 마음은 몽실몽실 몸은 노골노골해지면서 잠시나마라도 엄마의 따뜻한 숨소리를 느낄 수 있을지 몰라.





아가야

  오늘 밤도 좋은 꿈 꾸렴. 꿈속에선 꽃밭에 나비를 따라가며 함께 아장아장 걸어보렴. 꽃밭에 놀러 온 코끼리 등에 올라타 구름을 만져보렴. 피곤할 땐 엄마 품에 안겨서 솜사탕 같은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보자. 잠자는 너의 모습이 너무 이쁘다.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나의 엄마를 떠올린다.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엄마를 생각한다. 아기가 잠든 이 평화로운 순간에 이 모든 생각들을 간직할 수 있어서 더없이 감사하다. 엄마가 된다는 건 아주 어렵지만 굉장히 소중한 일이다. 곁에 없는 엄마를 떠올리며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나밖에 모르던 내 생각도 행동도 가치관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 어린것은 모든 생활에서 기준이 되고, 우선순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한다. 아직은 서툴고 멍청하기까지 한 초보 육아이지만 아기는 날마다 토실토실해져 가고, 나는 오늘 하루 더 엄마로 성장해 가고 있다. 잠든 아기를 보며 다짐 또 다짐한다.


  우리의 아기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더 좋은 사람이 될게. 널 위해 좀 더 바르게 살아갈게. 우리 오래도록 행복하자.





***  글을 썼던 시기는 아기가 태어난  45일이 되던 4  어느 날이었습니다.  글을 발행하는 오늘은 80일이 넘어 이제  다가올 백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기는 여전히 토실토실 살쪄가고, 엎드리면 고개를 조금씩 들어보려 하고,  자장가에 웅얼웅얼 마치 따라 부르듯 쿠잉을 하며 반응을  만큼 많이 컸어요. 여전히 우리는 행복하고, 오늘도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글을 씁니다.



잠든 아기와 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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