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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Dec 29. 2015

그리고 남겨진 것들

<두 엄마 이야기 2>의 못 다한 마지막 이야기

내 마음을 알아주는 노래
넬(Nell) - 그리고 남겨진 것들 (재생- 제목 클릭)
에서 제목을 가지고 왔습니다.



  잊으라고 했다.


   그의 말은 단호했고 사뭇 진지했다. 롤러코스터가 되어 못 살게 구는 감정 기복과 불면증은 따끔따끔 하다못해 쓰라려서 바닥에 나뒹굴고 싶었으나 이를 해결해 줄 방법이 있다 치더라도 사실은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싫은 마음을 그에게 고백했다. 중독된 기분이에요. 이렇게 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단 말이에요. 열심히 적던 행동을 멈춘 그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서 나오셔야 합니다. 엄마일은 잊어야죠.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는 것 같겠지만.. 잊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문득 떠오르는 시기가 오기 때문에 지금은 이번 일을 잊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방해 드렸던 약들이 얼마 동안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본인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이제 그만 잊으셔야죠.


   그의 뒤에서 지식의 폭포수를 쏟아내며 호위무사처럼 버티고 서 있는 서적들이 내 오갈 곳 없는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저 책을 다 익혔다면 이 양반 분명 돌팔이는 아닐 거야. 이상하게 그의 말이 나에겐 면죄부 같았다. 쥐고 있던 롤러코스터의 핸들을 꺾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달려들려 했지만 엉뚱하게 입에선 뜨거운 바람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되는 걸까. 나는 그래도 되는 인간인가.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딸입니다.

   유골의 봉안(납골) 당 안치 계약기간 15년이 완료되어 가고 있었고, 재계약을 하여 연장을 할지 인수를 해갈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상의할 누군가는 없었다. 기일을 기억하는 이도 쌓여있는 먼지를 닦는 이도 나뿐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뜻밖에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가 계약 완료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고, 합동 산골을 하라는 말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며칠 뒤 무언가에 홀린 듯 봉안당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건넨 제안을 덥석 물었고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관리실 직원이 의심의 눈초리로 재차 확인을 한다.


합동 산골이 뭔지는 알고 계시죠? 저희가 모아서 정성껏 자연으로 회귀시켜드리기는 합니다만, 유가족께 어디에 묻었는지는 알려드리지 못 하구요. 더군다나 다른 분들의 유골과 함께 섞여서 나중에 유골을 다시 찾아가겠다고 하셔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도 합동으로 하시겠다는 말씀이시죠?


   똑 부러지는 설명에 ‘아니오’라는 대답을 해야 하는 것 같아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는데 건물 밖에 서서 날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임종 소식을 들었던 아버지가 아직까지 기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15년 후인 오늘의 내가 걱정되어서였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무모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바람에 멀쩡한 내 입으로 대답을 했다. ‘네’라고.


   유골을 반환받는 것의 절차는 아까의 그 반복된 확인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간단했고, 감금되었던 15년 세월이 문 밖으로 빠져나오는 시간 역시 무안하리만치 짧았다. 무엇을 기대했던 건지 간단하고 짧은 절차에 섭섭함이 올라왔다. 겨우 이렇게 밖에 라니. 봉안함 문은 나사를 먼저 풀어야만 열쇠로 열 수 있었다. 꼼꼼히도 닫아 놨다. 다른 추모원에 가보면 요즘엔 봉안함 문이 유리로 되어 안이 훤히 비치고 장식품이나 사진도 가져다 놓고 하던데 이곳은 온통 불투명한 흰색 상자들이 마치 목욕탕 신발 보관함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열쇠 구멍과 번호판을 갖춘 채 차곡차곡 쌓여있을 뿐이었다. 적막하다. 문 앞에 붙여놓은 사진 속 미소는 오늘로써 내 지갑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젊은 모습의 사진인데 누군가 찾아왔을 때 이 얼굴을 보며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려 주기를 희망하여 붙여 놓았다. 꿈에라도 만난다면 그녀 사진과 마주 서서 같이 웃어준 이가 나 말고 또 누가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봉안함 문 장식과 돌출된 번호판 위로 쌓여있는 먼지들이 아직 하지도 않은 질문에 친절한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15년 묵은 향나무 상자를 꺼낸다. 나무의 짙은 향이 시간을 머금고 퍼져 나와 기억을 각성시킨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나는 장면들이 지금 이 순간에 더해져 내 호흡 끝에 각인되었다. 뭔가 잘못된 기분, 확실히 불길하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상자 옆으로 후두두 떨어지는 엽서와 편지들이 적막을 깬다. 지난 시간 우리가 그녀와 함께 했노라고 턱을 내밀며 생색내는 엽서를 주워 드니 거기도 나무 냄새가 스며있다. 좁은 문 틈새로 억지로 밀어 넣다 보니 엽서들의 한쪽 끝은 빠짐없이 구겨져 있었다. 언뜻 봐도 깨알 같은 글씨로 온갖 얘길 많이도 적어 놨다. 수능이 끝나고도 들렀었는지 수험표도 넣어 놨다. 별걸 다. 그때의 나도 애는 애였다.






첫 번째는 널 위해서다. 고향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났는데 앞으론 더 자주 못 가게 될 거야. 못 찾아가면 마음만 불편하고 짐이 되잖니. 두 번째는 망자를 위해서다. 오래 묵혀 둬봐야 위생적으로 불량해지고 이미 영혼이 떠난 육신을 오래 붙잡아 놓고 있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니. 세 번째는 웬만한 건 요즘 다 불법이라서 그래. 함부로 어디 뿌리지도 못하게 하고 산골을 했다고 한들 그 장소에 찾아가보지 못한다면 그 부담감은 또 어떻게 감당할 거니.


   거창하진 않아도 의미를 두고 싶었다. 나의 고민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어디에 보내줘야 의미가 있는가. 그녀는 어디를 원할까. 외가가 다 잠들어 있는 선산일까. 나고 자란 부산의 바다일까. 서론, 본론, 결론. 첫째, 둘째, 셋째. 아버지는 항상 이렇다. 가만히 듣다 보면 다 맞는 말이다. 너무도 이빨이 딱딱 맞는 바람에 수많은 한숨을 받아냈던 골똘함을 취소하고 그 논리를 따라가 설득된 내 마음이 무척이나 황당했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왔으며 앞으로 나에게 벌어질 폭풍의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유골 단지를 들고 추모원 건물에서 이어진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제단 같은 장소가 있고 마련된 큰 항아리에 내 항아리를 들고 쏟아 부으면 된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징그럽게 덤덤하던 마음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벌벌 떨려 하마터면 손에 든 단지를 놓칠 뻔하여 두 손으로 세게 붙잡고서 숨소리도 못 내고 조마조마 쏟아 붓는 순간 불현듯 알게 되었다. 방금 내가 쏟아 부은 건 다름이 아니라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따뜻한 손과 심장소리가 들리던 등, 나를 꽉 안아주던 앙상한 손목의 두 팔, 물걸레질에 미끄러져 내가 다치게 만들었던 두 다리, 내 양 볼을 문드러져라 깨물던 그녀의 입술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15년 만에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바싹 마른 가루가 되어 저 깊숙한 항아리로 떠내려간다. 15년 전 그 날 화장 후 분쇄하기 전 직원이 그녀의 수술한 다리에 박혀있던 철심 두 개를 확인하라며 가족을 부르던 장면이 지나간다. 난 그때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활활 타고 남은 뼈 사이로 타지 않고 남은 철심을 확인하라니. 무엇을, 어떻게. 가루들이 촤르륵 미끄러지는 소리에 마치 내 몸이 깊은 수렁으로 추락하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머리를 흔들며 침착하려 애써봤다.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잖아. 마지막으로 주변에 떨어진 가루들을 쓸어 담아 마저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고, 이로써 절차는 끝났다. 그리고 남겨진 내겐 이후의 많은 절차가 또다시 시작되어 버렸다.






   언제 잠겼었는지도 몰랐던 장면들이 수면 위로 다시 역류되어 내 목구멍을 틀어막았고, 소화시키지 못하고 버둥대면서도 들이 마신 숨을 내뱉는 데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눈을 크게 뜨고 더 크게 숨을 들이 마신 뒤에야 목구멍에 막힌 장면들이 배출되듯 내려갔다. 무의식의 그릇은 이렇게나 넉넉했구나. 잊고 지낸 그 기억아, 언제 거기 있었니. 그녀의 유골을 산골 한 뒤로 내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불면과 반갑지 않은 잡념은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로 이겨내기엔 너무나도 강력하여 시끄러운 속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TV를 보며 깔깔거리고 웃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울음바다로 디졸브 되곤 했고, 직장에선 같이 일하는 후배들의 실수나 허점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쥐 잡듯 지적하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비누에 이렇게 거품 묻혀 놓지 말라고 했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혀? 죄 없는 남자가 받아내고 있는 잔소리도 고울 수가 없었다. 내 모습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 잠깐이라도 시간을 준다면 정리하고 올 테니 어디로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칠 곳을 고민하다 결국엔 저승으로 숨어들 궁리에 까지 도달한 6개월, 그랬다. 나는 완전히 심취되어 있었던 거다. 이건 응급이구나. 열병에 해열제를 찾듯 달려간 병원에서 그에게 말했다. 살고 싶어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딱 한 번만 다시 만나고 싶어요.

할 얘기가 많고, 해명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저도 들어야 할 얘기가 많거든요. 저도 사실 엄마한테 따지고 싶은 게 있다구요. 근데 왜 꿈에도 안 나타나는지.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제 꼴을 한번 보세요. 이게 뭐냐구요.


   불쌍했다. 그녀가 아니라 내가. 그리고 화가 났다.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왜 그렇게 살았냐고 묻고 싶었다. 나 말고도 슬퍼할 누군가는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리움과 슬픔과 그녀에 대한 기억을 함께 공유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고문인지 알고 있느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왜 우리는 세상에서 둘 뿐이었는지, 그래 놓고선 혼자 가버리고 나면 나는 뭐가 되는지. 지금 이렇게 처절한 내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내 손으로 사랑하는 그녀를 두 번이나 보냈다는 것, 단 하나뿐인 그녀의 사람으로 모든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이토록 질척이는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래, 내 탓이 아니라 그녀의 탓이다.






   분노, 그것은 살고 싶은 의지였다. 나를 향한 화살이 방향을 틀었을 때,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껏 살면서 그녀를 탓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오로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 자신 뿐이었고, 그렇게 훈련되어진 나의 화살은 한 없이 나를 찌르고 같은 자리를 또 찌르며 생채기를 냈지만 이것이 정상이라 여기며 무뎌진 감각을 묵인하곤 했다.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무력한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남은 한 가지는 그녀로 인한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전부라 여겨 고통에 심취되어 벗어나길 거부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상담 동안 막연한 슬픔, 죄책감, 서러움을 거쳐 분노로 전환되는 순간 알게 된 것은 결국엔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외쳤던 ‘미안해‘. 사실은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엄마가 떠나고 그녀가 없는 삶을 적응해 나가야 하는 나에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잘 살아가는 수밖에. 그러는 동안 이만큼 자랐고 15년이 흘렀으며 심상으로 그리던 엄마의 모습을 바싹 마른 하얀 가루로 다시 마주했을 때 슬픔과 함께 찾아온  분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숨겨보려 애써봤지만 결국엔 들켜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분노와 원망의 발견이 내 숨통을 트이게 한다면 그러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남겨진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잖아요. 분노의 늪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자리한 동굴로 그녀를 불러 앉혀놓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말을 거느라 눈두덩은 한동안 식을 줄을 모르고 매일 뜨거웠다. 그 날 항아리엔 엄마의 유골만 쏟고 돌아왔지만 동굴로 불러들인 엄마에겐 그날 미처 떨구지 못 했던 내게 남은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다 가져가.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나 때문이 아니라 엄마 때문이라고.


   듣고 싶은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것. 죄책감과 함께 손 잡고 서 있는 저 분노에 찬 녀석도 감기가 떨어지듯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라 믿을 것. 꽁꽁 숨긴 그 감정도 지금이 기회라 여기고 망설이지 말고 다 토해낼 것. 그가 그랬다. 거기서 나오셔야 합니다. 실체를 발견한 내 대답은 재채기처럼 숨길 수가 없었다. 네, 나가고 싶어요.


   비로소 그녀를 돌려보내는 모든 절차를 끝냈다. 나는 처방받은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항우울제와 위장보호제의 레시피를 성실하게 따라갔다. 잠 못 들던 밤의 할 일 없는 양떼들은 돌려보내고 혼자서도 두 다리를 뻗어 잠을 잤고 다음날 하루를 보내고 다시 잠을 자고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약봉지가 탈탈 털릴 때쯤 다시 오라고 하여 찾아간 병원에선 이전처럼 턱밑까지 차오르던 숱한 이야기들을 꺼내놓지 않아도 되었다. 시간이 걸릴 뿐 소화시키지 못해 숨이 차진 않았으니까. 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보세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열 떨어지고 나니까 별로 꺼내놓고 싶지가 않네요. 저는 ‘약발’을 잘 받나 봐요. 정말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어요.


편안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제가 보기엔 스스로도 충분히 잘 풀어나갈 만한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찾아오셨죠. 약을 서서히 줄여서 이제는 끊어보려고 해요. 그러나 언제든지 본인이 느끼기에 힘든 게 느껴진다면 주저 말고 다시 오세요.


   그와의 마지막 진료에서 받은 ‘필요 시 복용하세요’라고 적힌 수면제 열 알은 몇 달간 방치되어 있다가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내 지갑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 사진이 들어 있지만 여전히 꿈에서 조차도 나타나진 않는다. 등장을 닦달하지 않기로 한건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가 싶어서다. 아마도 분노 어쩌고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엄마가 실제로 봤더라면 어디서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느냐고 양 볼을 찢어질 듯이 잡아당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쓸쓸히 떠난 그녀를 가엽게 여기는 시간 대신 내가 믿는 종교의 교리대로 나도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어디선가 내 기도를 듣고 든든해하겠지 싶어서. 이따금씩, 가령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를 글로 풀고 있다거나 할 때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셔야 하고 코끝이 아파 오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분노도 슬픔도 설움도 아니며 떠올릴 때마다 콕콕 찌르는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것, 남겨진 사람들의 그리움이라는 것을.


잘 가요.



글쓴이의 개인적인 상황과 복합적인 감정에서 풀어낸 이야기이며, 결코 합동 산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글을 읽는 동안 거북함을 느낀 분이 계신다면 양해 구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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