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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Dec 22. 2015

두 엄마 이야기 2

거울을 보면 그 속에 엄마가 있다.

   그땐 참 그랬지 하며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웃고 떠들다 몇 초간의 공백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지나간다. 다행히, 저 쪽에서 먼저 울었다. 고마워요. 울어줘서.     






꼬마야,
너 말고 다른 어른은 없니?


   길거리에서 혹은 집에서 쓰러져가는 엄마를 구급차에 태워 달려간 병원에선 항상 내게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의식이 있어 말할 기운이 남아 있으면 모든 결정은 환자 본인이 했고, 그 나마도 못하면 보호자를 찾아대지만 나타난 사람은 ‘날 찾았습니까?’하는 진지한 얼굴의 꼬맹이 뿐이었다. 그 꼬맹이는 자라서 어린이가 되고, 그 어린이는 자라서 청소년이 될 뿐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똑같은 병원으로 매번 출두를 하면 병원 사람들은 너도 나도 깊은 한숨으로 우리 모녀를 맞이하곤 했다. 꼬마 땐 몇 년에 한번 정도로 드물게, 커가면서는 매년,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1년에 두세 번 엄마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또 시작되는 거다. 짧게는 2주, 보통은 한 달가량 입원을 하게 되겠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검사 받고,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 다가와 피를 뽑아간다. 처음엔 주렁주렁 수액을 달고 있으면서 간간이 수혈도 하고, 여러 과 의사들이 방문하여 같은 질문을 반복 할 테지. 풍성하던 수액이 하나 둘 씩 줄어가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르는지 엄마 손에 얹어지는 알약의 수가 늘어나면서 종말에 가서는 한가득 되는 알약을 푸짐하게 한 꾸러미나 짊어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껌딱지였다. 엄마가 입원해 있으면 나도 병원에서 살고, 퇴원을 하면 나도 집으로 간다. 사실 엄마 따라 이동하는 옵션일 뿐인데 그 바람에 대외적인 나의 역할은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보호자용 보조침대에 엎드려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이야기도 하다가 졸리면 잠을 잔다. 그러다 가끔은 간호사 이모들한테 들켰다간 엄청 혼나는 일이지만 엄마 상태가 좀 호전되면  환자 침대에서 둘이 같이 끌어안고 자기도 했다. 아침 7시 환자 식사가 나오면 일부를 덜어 내 도시락에 담는다. 거기에 포장김을 추가로 넣어주면 오늘의 도시락은 완성된다. 병원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멀었다. 지하철을 타고 20분, 버스로 갈아타고 또 30분이 걸려 학교까지 간다. 가끔 버스를 놓쳐 그 다음 버스를 타고 가면 출퇴근 러시아워에 체포되어 버렸다. 이건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러시아워 버스 안에서 애타는 내 마음을 동시로 적어 글짓기 대회에 냈다가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재의 선택이 아주 생활 밀착형이라 참 웃기다. 어쨌든 러시아워에 체포된 날은 어김없이 지각이다. 내 사정을 아는 담임선생님은 어깨를 토닥이며 다음엔 5분만 일찍 나서라고 자리에 돌려보내면 지각 대장 자리를 놓고 나와 라이벌을 이루는 다른 아이들이 왜 쟤만 봐주냐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또 학년말 개근상, 정근상 수상자를 골라내느라 출석, 지각, 조퇴 횟수를 정리하여 알려주시면 매년 내 순서에서는 다채롭고 풍부한 횟수들 덕분에 아이들은 빵 터지며 웃었다. 담임선생님은 항상 당부했다. 일단 학교를 왔다가 그 다음에 조퇴를 하렴. 계산기를 두들기며 알뜰살뜰하게 가계부를 정리하는 주부 같은 모습으로 학년 진급을 위한 내 출석일수를 계산하여 구멍 나지 않도록 챙기기 바빴다. 감사합니다.

   아주 가끔은 껌딱지도 아팠다. 열이 나고 기운이 없어 엄마가 있는 병원의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으면 과로로 인한 탈수 증상이라며 의사가 옆에 앉은 환자복 차림의 엄마를 몹시 타박했었다. 애를 어떻게 했으면 탈수가 옵니까? 별건 없었다. 기본적으로 나란 어린이는 학교만 갔다하면 들판에 풀어놓은 개처럼 쉬지 않고 뛰어 노는 별난 아이였기에 에너지 소비도 많은데 거기다 엄마의 입원시즌에는 등하교 고행길과 마음고생이 추가로 토핑 되어 몸이 남아나질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 병원에서—대형 종합병원이었다—우리 모녀를 모르는 직원은 없었다. 하이에나 처럼 병원 구석구석을 수색하며 놀 거리를 찾아다니는 나 때문에도 그랬지만 매년 단골손님이 되어 때가 되면 전설 처럼 나타나는 엄마 때문에도 그랬다. 엄마의 주치의는 수년간 봐온 내 수우미양가 성적표까지 다 꿰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침대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다 옆에 서서 어찌나 훈수를 두는지. 학교 마치고 나름의 일정이 있어 딴 짓을 조금 하다 병원에 늦게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매점 아줌마, 원무과 아저씨, 간호사 이모야들이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한마디씩 건넸다. 그땐 사방이 잔소리꾼이다 싶어 아주 성가셨지만 커서 생각해보니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입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보기엔 저 집은 남편도 안보이고 엄마랑 아이가 항상 붙어있으면서 애가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걸 보니 돌봐줄 사람도 없나보다 했을 거다. 친구로 추정되는 몇몇의 병문안과 친척들로 추정되나 잠깐 들렀다 사라지는 몇몇을 제외하곤 왜 다른 어른은 오지 않는 건지 궁금해질 때쯤이면 항상 질문이 들어온다. 아이 아빠는 안 계시나봐요? 병간호 할 사람이 없나 보네요. 어이구 딸이 참 대견하네요. 어린 딸이 고생이 많네요. 그러다 엄마가 자리에 없을 땐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거리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하필이면 밝은 내 청력에 접수되곤 했다. 저 여자는 뭐하는 사람이래? 연고가 없나봐. 자식은 저 애 하나뿐인가? 쯔쯧.. 가엽은 애만 불쌍하지. 에휴.. 애가 무슨 죄래.

  그러고 보니 그러게 말이다.

  엄마 곁엔 나 말고 왜 아무도 없을까. 외갓집엔 식구도 참 많던데.





엄마는 이런 사람이었다.


   집집마다 노크 하며 나물 좀 사달라고 하는 볼 빨갛고 손끝이 시커멓게 물든 장사꾼 할머니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나물이 보드라바예.(나물이 부드러워요.) 저짝 가차운 산에서 캔 깨꼼한거라예.(저 쪽 가까운 산에서 캔 깨끗한 것 입니다.) 이렇게 적극 홍보를 하고 계시는 할머니를 집으로 들인다. 그리고 나물은 살 테니 같이 저녁이나 한 끼하고 가시라며 밥상을 차렸다. 지금 세상 같았으면 언감생신 낯선 사람을 어떻게 믿고!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이런 모습 말고도 가끔은 날 당황케 하기도 했다. 학부모 동반으로 유치원에서 엄마와 함께 소풍을 갔던 날, 장기자랑 시간 제비뽑기에 내가 걸린 적이 있었다. 나름 흥은 충만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날 잡아끌고 앞으로 튀어나간다. 그리고는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춘다. 엄마였다. 맙소사. 우리 둘이 집에서나 하던 것을 지금 여기서 하라고?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나도 음악에 혼을 실어 몸을 흔들어 댄다. 까짓것 뭐가 부끄럽니? 즐겁게 한바탕 놀면 그만이지.

   나를 난처하게 만든 일들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산에 올라가 높은 바위에 앉아 사진을 찍자고 내 엉덩이를 밀어 올려놓고 멋들어지게 사진 한방을 박았으니 이젠 내려줘야 하지만 엄마는 모른척하고 그냥 가버리곤 했다. 당했구나 싶어 서럽게 울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온 엄마의 손은 내 손이 아니라 카메라를 잡았고 우는 내 모습을 찍으며 행복해했다. 너는 슬픈데 나는 왜 이렇게 웃기냐. 또 있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시장놀이를 한다고 준비물로 장바구니를 챙겨오라고 하여 아이들 모두 천으로 된 가방이거나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 허나 내 손에 들린 건 수박 살 때 사용한 노끈에 플라스틱 바가지를 담아서 만든 형이상학적인 물체, 엄마의 작품이었다. 그 날 아침 그거 말고 나도 장바구니를 달라고 어찌나 떼를 썼던지 너무 울어서 두 눈은 기름판 위에 올려 진 호떡처럼 부풀어 있었다. 유치원 가서 한번 봐라. 네 장바구니가 제일 멋지다고 다들 한마디씩 할 걸? 한마디 듣기는 했다. 유치원 선생님 중 엄마의 대학—육아방식을 보면 나도 믿기 어렵지만 유아교육학과이다—선배인 원장선생님이 한마디를 해주셨다. 딱 네 엄마 스타일이네. 정말 멋진 장바구니야.

   엄마는 그랬다. 내 눈엔 착한 사람이었고, 순수한 사람, 재능이 많은 사람, 좀 괴짜스러움이 있지만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아픈 모습을 제외하고는 내게 보여준 모습들이 그러했고 학창시절이나 처녀시절의 사진들을 보면 검은 띠를 허리에 묶고 겨루기를 하는 사진, 합창단 앞에서 지휘를 하는 사진, 뭔가 트로피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촬영한 기념사진들이 그랬고, 달력 뒷면을 도화지 삼아 볼펜으로 심드렁하게 가득 그린 풍경화가 그랬고, 수첩에 적힌 서정적인 시들이 그랬다.

   그랬지만 외갓집 구성원으로서의 엄마는 내가 보는 엄마와는 달랐다. 외갓집이 있는 지역에 가면 동네 건달들이 누님이라고 허리를 바짝 숙여 인사하는 골목대장이었고, 재미없다고 대학을 자퇴하고 뛰쳐나온 명문대 집안의 망신이었으며, 남들 보기에 동네 창피한 애 딸린 이혼녀였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마셨다하면 소주 한 박스를 사다놓고 밤새도록 마시고도 모자란 술주정뱅이였고, 여자의 옷차림이 요란하기만 해도 눈치를 주는 그 시절에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포장마차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날라리였다. 그리고 서러움으로 똘똘 뭉쳐 악에 받친 한(恨) 많은 말썽꾸러기, 각자 배가 다른 7남매의 셋째 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부자였다고 한다. 공장도 운영하고 한 동네가 다 자기 집일만큼 재산도 많았으며 부인도 세 명이나 되었다. 첫 번째 부인은 딸을 한명 낳고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은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 하나가 바로 엄마다. 어느 날 공장에 불이 나 모두 대피했는데 외할머니는 공장 끝층에서 공부하다 갇혔을 큰 아들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홀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이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 모습을 본 엄마는 할머니를 드리려고 뒷산 꽃을 한 아름 꺾어 오던 길인 부잣집 13살의 사랑스럽고 갸날픈 딸이었다. 자기 엄마를 구하겠다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려 발버둥을 쳤지만 돌아온 것은 얼마 안가 외할아버지가 또 데려온 세 번째 부인이었다. 세 번째 부인은 딸 둘을 낳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팥쥐엄마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못된 ‘계모’였단다. 적어도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그렇다는 거다. 닭고기도 안방 이불장 안에서 몰래 딸 둘에게만 먹이고, 나머지 아들딸이 전교에서 1등을 하고 전 과목 100점을 받고, 줄줄이 명문대를 들어가도 칭찬 한 번 해주지 않았단다. 따뜻한 이불은 딸 둘에게만 덮이고 나머지 아들과 딸에게는 얇은 솜이불만 줬으며, 자기 딸에게는 얼굴이 닳도록 볼을 비비고 머리가 빠지도록 쓰다듬었지만 몸이 약해 자주 아팠던 엄마에겐 천방지축 돌아다니니 아픈 것 아니냐고 구박만 할 뿐 병간호는 고사하고 손 끝 하나 닿은 적이 없단다. 계모 밑에 자라는 서러움과 생모를 향한 그리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배로 커지면서 걷잡을 수 없게 엄마의 모든 것을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의지 할 곳이라곤 아버지 같이 여긴 큰 오빠 뿐이었는데 큰 외삼촌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또 한 번 외할머니와 큰 외숙모 사이에선 재산 분할로 전쟁이 일어났고, 집안의 큰 여자 두 명의 그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기 싫은 엄마는 재산 상속분을 내팽겨 치는 대가로 악역을 거머쥐게 되었다. 재산 싸움으로 시끌시끌한 틈새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리고 소리를 질러대는 엄마 덕분에 외갓집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내가 아주 어렸던 네다섯 살 때 기억나는 한 장면은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 한통을 받더니 야구 방망이를 하나 사들고 외숙모가 사는 호화스런 아파트로 달려가 온 집안을 깨부수며 쑥대밭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큰외숙모가 신흥 종교에 빠져 종교단체에서 임원자리를 차지하느라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남긴 재산으로 수십억원의 금액을 투자하여 건물을 지어줬다는 정보를 듣고서였다. 나도 무서워서 떨고 사촌 오빠들도 무서워서 떨며 화장실에 숨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집안의 대소사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며 행패를 부리던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외삼촌 두 명은 집안일은 뒷전이고 공부 밖에 모르는 서울대 냉혈한―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이 되어있어 인정머리가 없었단다. 고향을 떠나 각자의 삶으로 숨어들어 가정을 꾸리며 박사학위를 따고 저명한 교수가 된 사람,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승진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있었으나 엄마 곁에서 서러움을 보듬어 줄 가족은 아무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가족들은 엄마를 그렇게 불렀다. 망나니 라고. 품행도 엉망이고, 성질머리만 앞세워 행동하는 저질이라고. 그래도 남들처럼 멀쩡하게 결혼을 하는가 싶더니 심장에 부담이 되어 자식을 낳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데 바락바락 우겨 딸 하나를 낳았다. 자식을 키우면 저 망나니가 조용해질까 싶었는데 어느날 이혼을 해서 돌아오고, 맨날 천날 아프니 키울 자신이 없으면 아빠한테 보내라고 하면 딸을 꽁꽁 싸매고선 자기처럼 계모밑에서 설움을 당하게 하느니 죽는 날까지 자기가 데리고 있겠다고 끝끝내 양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나 숙모가 돈이라도 좀 보태주려 하면 보는데서 다 집어던져버리고 연락도 끊어버리니 못됐고 못났고 미련하고 창피스러운 셋째딸을 가족들은 더 이상 보고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의 곁에는 내가 있었다.


   딸이자 보호자이고, 친구이자 재산이었다. 직장일을 마치고 지쳐서 돌아오면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아놓고 기다리는 딸이 있었고, 허구한날 말괄량이들이 한다는 말썽은 다 부리고 다니지만 잊지 않고 은행에 가서 공과금을 챙겨 내며 입원해 있는 아픈 엄마 대신 집안 살림을 챙기는 딸이 있었다. 입원이 잦아지면서 직장도 사직하고 작은 구멍가게를 열었는데 자판기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딸이 담당 했다. 쓸고 닦고 커피 분말을 보충하고 은행에 가서 잔돈을 교환해 채우면서 관리를 했다. 엄마와 함께 한 세월동안 일곱번의 이사, 세번의 전학을 다니는 동안 이삿짐을 싸고 푸는 기술 만큼 새 환경에 적응하는 기술도 빨라진 딸은 누구보다 든든한 재산 1호였다.


   나중엔 집보다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아 지면서 구멍가게는 고사하고 딸을 먹여살릴 형편이 못되어 허리띠를 졸라 매야만 했다. 동사무소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생계비를 타게 되고 학교에 싸들고갈 도시락도 어디선가 타다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교회 청년들이라며 우르르 몰려와서 김치와 쌀을 배달해 주고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전체 조례 시간에 방송으로 내 이름을 호명하며 방송실로 오라고 하여 얼마 전 출전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내가 상을 타는구나 싶어 신나서 달려 갔지만 (당시)문화체육부장관이 주는 모범청소년 대상이라며 상장과 상금티켓을 주었다. 영어말하기 대회 상이 아니라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이 상은 어쩐지 이름만 '모범' 청소년일 뿐 아픈 엄마와 살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는 것 같아 친구들 보기 창피했지만 어린 내가 이리 저리 따질 게 뭐가 있었겠는가. 이도 저도 다 좋았다. 멋쟁이 내 엄마가 살아 있기만 한다면.


   중학교 1학년, 엄마는 거의 매일 독한 약과 씨름하고 수혈을 받고 검사를 받으며 위독해져 갔다. 중학생이 되면 남자애들이랑 싸움도 그만하고, 공부도 좀 하고 교복 치마도 입어야 하니 예전보단 조금 더 숙녀다워 지기로 엄마와 약속을 했다. 병원을 오가면서도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나름은 고군분투를 한 덕에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학년 전체 350명 중 12등을 하였을 때 눈이 움푹 꺼져있고, 부쩍 컨디션이 악화되어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엄마의 입가에 복숭아같은 미소가 퍼져 나왔다. 병원 직원들,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 마주치는 사람마다 기특하지 않냐며 자랑을 하고 역시 너는 내 딸이라며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두 팔로 나를 부서져라 안아주곤 했다. 성장기 아이들이라 교복도 6-7월 하복 부터 입기로 하여 얼른 내 딸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며 치료에 열중하던 엄마였다.


   그러나 6월이 오기 전 5월의 끝자락에서 엄마는 불현듯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혈소판 수치가 부족해 자주 수혈을 받았었는데 고혈압성 뇌출혈이 생겨 돌이킬 수 없는 큰 출혈로 번져버린 것이다. 학교 마치고 옷을 갈아 입으러 집에 들렀는데 도통 울릴 일이 없던 집전화를 받고 뛰어갔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역시나 급하게 수소문되어 연락을 받고 달려온 외할머니가 해봤자 소용없다는 수술을 포기하겠다고 의사결정을 하고 난 후였다. 나는 병원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보호자는 난데 왜 할머니가 결정하느냐고. 당장 주치의 아저씨를 찾아가 수술해 달라고 말하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수술이라도 해보자고 할머니 바지 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 의미없는 시점이라는 것을. 중환자실로 옮겨져 숨소리만 붙어 있는 엄마 곁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면 안된다고 간호사 이모들이 뜯어 말렸지만 엄마의 뛰는 심장소리가 듣고 싶어 병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환자 침대에 올라가 엄마를 끌어안았다. 결국 할머니와 외삼촌들 손에 질질 끌려 밖으로 끌어냈지만 안절부절 못하는 내 다리는 가만 있질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거짓말 처럼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하얀 천에 둘러싸인 엄마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아저씨들에게도 기억나진 않지만 뭐라고 못된 말을 한 것 같다. 등 뒤에서 훌쩍이며 들려오는 할머니의 한마디, 저것도 지애미랑 성질이 똑같네.


   놀라웠다.

   장례식장에 찾아드는 외갓집의 어마어마한 친척들 인원수에 한번 놀라고, 그만큼 많이 모인 조의금 마저도 놓고 싸우는 외숙모와 친척들의 모습에 두 번 놀랐고, 네가 복이 있으니 네 엄마가 널 고생 덜 시킬려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위로하는 할머니의 말에 세번 놀랐다.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 엄마가 느낀 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한동안 외할머니집에서 살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수소문된 내 아빠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 누구도 누나이자 언니의 딸인 조카가 외갓집을 떠날 때 작별의 인사나 의미없는 격려라던가 하다못해 아빠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형식적인 위로 한마디 남기는 이가 없어 엄마에게 물려받은 외갓집 미워하기 유전자를 살려 나 역시 모든 친척들과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러다 얼마 후 그래도 엄마가 생전에 가장 좋아라 했던, 첫번째 부인의 딸로 일찍 시집을 가 고향을 떠나살며 엄마를 종종 위로하곤 했던 큰 이모만이 나를 찾아내어 연락이 왔다.


네 엄마가 너 낳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는데도 널 낳고선 얼마나 걱정이 컸는지 몰라. 지 몸은 생각도 안하고 지 몸에서 나온 딸한테 혹시 건강문제라도 생길까봐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모른다. 네가 저체중으로 태어난게 자기 탓이다 싶으니 너를 어찌나 먹여대던지.. 너도 기억나니? 너 유치원 때 구멍난 쌀포대 마냥 끝도 없이 먹었어.


   그땐 참 그랬지 하며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웃고 떠들다 몇 초간의 공백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지나간다. 다행히, 저 쪽에서 먼저 울었다. 고마워요. 울어줘서.


   엄마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엄마 떠나고 몇 달 동안은 평소 믿지도 않았던 '환생'이란 것이 혹시나 진짜 있으면 어떡하나 싶어 파리도 한마리 못 죽였다. 보고싶은 마음에 매일 자기 전 꿈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었지만 나타나진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커가면서 가끔 엄마 사진을 꺼내본다. 엄마 얼굴을 보다가 문득 거울을 봤다. 나는 한동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거울을 보니 그 속에 엄마가 있었다.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엄마,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소리 없이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두 엄마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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