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수생 시절 클럽에서 DJ 일을 했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8년 동안 총 17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심지어 17번 모두 자진 퇴사였다 보니한때는 내가 사회 부적응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보았었다. 지금이야 이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져서 좀 나아지고 있지만 처음 사직서를 쓰던 시기만 해도 한번 들어간 직장에서 끝을 맺는 게 당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여러 퇴사 기억들 중에서 즐거웠던 기억도 있고 화가 치밀었던 기억도 있었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나 혼자 가지고 있기는 아쉬워서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나의 첫 대기업 인턴이자 최악의 직장
나는 대학시절부터 마케터들이 항상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경영학회, 대학생 마케터 등 정말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고 다녔다. 마침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한국의 유명 카드 회사 중 한 곳에서 대학생 인턴을 구한다는 공고를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본사 마케팅 전략팀에서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디자이너를 구인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인포그라피와 데이터 관련 수업들을 들었었고, 관련 활동도 한 경험이 있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운 좋게 인사 담당자분께서 나를 좋게 봐주셔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대학교 2학년으로서는 쉽게 받을 수 없는 파격적인 혜택을 많이 줬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입사 한 달 만에 줄행랑을 치고 말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 팀장님에게 입사 초기에 점, 선, 면 그리기를 연습과 디자인 기초강습을 받아야 하는 점이었다.
당최 경영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왜 예고-미대 출신인 나에게 이러한 강습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팀장님만의 큰 그림이 있겠지 싶어 그의 말을 따랐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조금씩 실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내가 내는 모든 아이디어에 예체능 출신이라 논리가 부족하다는 말로 화답했다. 온갖 노력으로 이를 만회해 보려 했지만 경영학과 출신의 대기업 마케팅 전략팀장에게 미대생의 논리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았다. 약 한 달간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는 마케팅을 좋아하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년 점프처럼 불구덩이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일어났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방향을 틀어 내 장점인 디자이너의 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결국 회사를 떠났고 마케팅은 나에게 있어 직업이 아닌 자기 개발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예상과는 너무 달랐던 스타트업
가을학기에 졸업을 하는 바람에 대기업 공채 일정시작까지는 시간이 애매하게 남은 상황이라 공채를 기다리는 동안 실무도 익힐 겸, 당시 핫하게 뜨고 있던 동영상 SNS 회사에 지원하게 되었다. 앱 다운로드 수가 100만이 넘었고, 회사 로케이션도 강남의 유명 공유 오피스 중 한 곳이어서 나도 스타트업 하는 힙스터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불타 올랐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회사 분위기가 정말 이상했는데, 몇 가지 이야기해보자면, 대표는 대학생들이 수료증이나 인턴경력만 쥐어주면 무급 이어도 얼마든지 일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틈만 나면 어떻게 대학생들을 공짜로 부려먹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가 상상한 스타트업 업무 분위기 (이미지 출처/ "스타트업" 드라마)
또 나를 제외한 직원 전부 남자인 남초 회사라 그런지 사내에서 잡담을 나눌 때 여자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가장 어이가 없었던 점은 면접 보러 온 학생 또는 외부업체 담당자들이 여자인 경우, 빼놓지 않고 얼평과 몸매 평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점이었다. 월급도 적고 일은 많은데 사내 문화까지 안 좋은 이곳에서 계속 몸담고 있고 싶지 않아 사직서를 쓰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꽤 여러 회사를 돌게 되었는데 결국 내가 가본 대부분의 회사들은 내 환상을 충족시켜 주진 못했다.
좋은 회사도 있다는 걸 알려준 스타트업
대학교 3학년 말에 친한 친구의 소개로 친구가 일하고 있는 작은 스타트업에 들어갔다. 이름 있는 스타트업도 아니고 정말 좁은 곳에서 이제 막 시작한 작은 회사였지만, 내가 이 회사가 가장 좋았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대표님과 직장 동료들이었다. 젊은 대표님이라 그런지 학생인 우리들이 자유롭게 낸 아이디어들을 무시하지 않고 항상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셨다. 또한 미대 졸업전시에 들었던 모든 비용을 다 사측에서 지원해 주었는데 학교 측에서도 실제 회사와 콜라보를 해서 진행하다 보니 좋은 평가를 주었고 덕분에 나는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이때 만들었던 졸업 작품은 각종 대기업에서 서류합격과 면접을 통과시켜주는 나의 가장 큰 강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작은 회사였지만 실무경험도 배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정말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었어서 모든 순간순간이 다 행복했던 회사였다. 이렇게 좋은 회사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퇴사를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큰 물에서 놀아보고 싶어서였다. 회사가 스타트업이다 보니 우리가 낸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지원금을 받기 위해 심사위원들에게 피칭을 해야 할 경우가 간간히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우리의 나이와 경력을 가지고 문제 삼았고 우리가 큰 회사에서 돌아가는 업무시스템을 모르기 때문에 미숙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그 스타트업은 지금도 아주 건실하게 잘 크고 있지만 당시에는 VC들 뿐만 아니라 유관 업체들까지 우리의 경력이 적다는 이유로 우리 주력 아이템을 좋게 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업에 가서 직접 그 업무 시스템이란 것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퇴사란
20대 초반은 사실 그 직무가 나에게 맞는지, 회사가 나의 능력을 성장시켜줄 수 있을지 또는 사내 문화가 나의 성격과 맞는지 여부를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계약직, 파견직, 알바, 대기업, 중견 소기업 등 이러한 부분들은 고려하지 않고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다 보니) 닥치는 대로 다양한 회사에 들어가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알고 있는 경험에 근거해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보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통해 나의 선택지의 폭을 넓힌다면 몰랐던 업계를 경험하면서 내 시야가 넓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 업계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느끼게 된 점은 퇴사도 이직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첫 퇴사를 결심했을 때만 해도" 퇴사 = 인내심과 끈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7번의 퇴사의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생각보다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퇴사와 이직의 횟수보다는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20대 중반에 나의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 있어 내가 가야 할 길의 갈래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고 덕분에 미련 없이 앞을 보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20대 후반과 30대의 나에게 퇴사는 새로운 시작 + 나의 목표를 향한 1보 전진에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