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요즘 마음 기댈 곳이 있는가.
요즘 나는 자주 휘청인다.
발리와 티벳에서
종교가 생활이요, 생활이 종교인 듯한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들의 삶이 나의 것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어쩌면 우린 사랑에 기대 살아왔는 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유년을 지나고,
첫사랑에 홀려 미숙한 어른의 시기를 넘어가고,
찐사랑이라 믿는 이와 가정을 꾸려
금쪽같은 자식에 사랑을 쏟으며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오십을 지난다.
심금을 울리는 그 모든 사랑이 가벼워진 지금,
나는 무엇에 기대 사는가.
종교는 없고 생활은 어수선한 지금의 나는
고적한 듯 평온한 티벳인의 웃음을 웃을 수 있을까.
티벳사람을 지날 때마다, 곁에 잠시 머물 때마다
눈을 맞출 때마다, 카메라 렌즈로 넘겨볼 때마다
그 사진을 거듭 찾아볼 때마다
티끌만 한 평온과 평화가 묻어온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다.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는, 그런 웃음을 웃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꼭 열흘, 동 티벳의 몇몇 곳을 지나오며
풍경은 스쳐 지나가고 그네들의 얼굴은 나를 붙든다.
고요한 얼굴로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잔잔한 미소가 마음을 흔든다.
웃는 웃음이 아닌, 웃어지는 웃음.
카메라가 아닌 나를 보고 웃는 웃음.
그 웃음을 닦아 와 내 거울에 얹고 싶다.
연못의 숨 같은 동그란 웃음,
무엇에 기대면 그리 웃을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얼굴에서 다정함을,
티벳인의 미소에서 평화를 읽으며 되묻는다.
무엇에 기대 살면 그리할 수 있습니까.
어중간하게 발 걸치고 있는 세속의 삶이 지긋지긋해진다.
삶의 덧없음을 알고 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부러 열심히 살려 애쓴 것이 더 덧없다.
늘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던 '살이'의 가치관이 한 쪽으로 기운다.
수박 겉핥기 식 여행에서 얻어야 뭘 그리 얻었겠냐만은,
차곡차곡 쌓인 사람의 얼굴이 심금을 울린다.
피상적인 이미지에 과하게 반응하는 미련한 감성이라 여겨도 어쩔 수 없다.
여행은 또, 그런게 아니겠나.
일상에 욱여넣고 살던 가장 나다운 부분을
스스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나날.
그래서 나는 동티벳에서 더 웃고, 더 슬프고,
더 예민하게 사람에 반응하며 '나'로 살고 있다.
돌아가서 비록 다시 덧없음을 숨기고
속되게 살아가게 될 지라도.
머리를 밀기엔 너무 늦은 나이.
부디 나만의 경건한 기둥을 찾고 싶다.
남은 날, 너무 휘청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