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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핫산 Aug 19. 2021

"부사수는 필요 없습니다."

일이 많은 것보다 사람이 더 힘들다.

"나는 이런 게임을 만드는 기획자가 되고 싶어!"


 신입 게임 기획자 또는 게임 기획자 지망생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어떤 게임'의 기획자가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혹은 그런 비슷한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기도 한다. 

어떤 게임은 아니더라도 특정한 장르, 예를 들면 RPG(롤플레잉게임), FPS(3인칭 슈팅), 퍼즐 등 만들고 싶은 장르가 정해져 있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게임 기획자가 회사에 입사한 후, 자신이 좋아하거나 자신의 취향과 맞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될 확률은 낮다.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거나 1인 개발자가 아니고서야 보통은 누군가가 결정한 흐름에 편승해서 살을 붙여 나가는 일을 하게 된다. 신규 프로젝트도 그렇거니와 라이브 서비스를 하는 게임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지기도 한다. 


물론 입사하기 전부터 어떤 게임을 담당하게 할 거라고 장르나 게임의 이름, 담당할 파트(콘텐츠, 레벨, 시스템 등)를 지정하고 구인을 하는 회사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들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기획'을 할 수 있는 회사는 거의 없다고 본다. 


 우리 회사에 지원하는 신입 기획자는 면접에서 자신이 담당하고 싶은 게임에 대한 포부를 꺼내놓는다. 하지만 입사 후에 그 게임을 담당하게 되는 일은 흔치 않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나도 입사했을 때 어느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할지 논의를 하는 자리를 가졌었다. 물론 논의라고 해도 그 자리에서 나에게 선택권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 당시의 내 사수에 의해, 나는 내 머릿속에 후보조차 없었던, 생각지도 않았던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다. 처음부터 거론되지 않았던 프로젝트였는데 내 사수가 갑자기 입찰(?)에 참여하면서 분위기가 오묘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사수의 아래에서 기획 업무를 돕다가 곧 메인 기획자를 담당하게 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PD를 맡게 되어 어쩌다 보니 3년째 이 프로젝트에 몸을 담그고 있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게임인데 워낙 오래된 게임이다 보니 한계도 많고 그래픽도 요즘 게임과 달리 좋지 않다. 그래도 그 한계를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 보고 개선해 나가고 때로는 경영진과 대립하기도 하면서 좋은 게임으로 만들어 가려고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1년쯤 되었을 때, 유저 게시판에는 이런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지난 2~3년에 비해 최근 OOO 운영자님이 교체된 느낌이야.
뭔가 더 풍성하고 관심이 많음.
유저한테 업데이트도 뭔가 새로움 항상.


 사실 난 모르고 있었는데, 당시 PM 님이 게시글 링크를 주면서 프로답지 못하게 담당자 바뀐 거 들키고 다닌다고 농담하며 칭찬해 주셨었다. 열심히 한 덕분에 유저도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늘어 갔다. 경영진과 다른 팀과 마찰을 불사하면서 없는 일정을 따내기도 하고 뭔가 유저에게 더 주기 위해서 열심히 해온 만큼 내게는 애정이 깊은 게임이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게임은 우리 회사의 신입 기획자에게는 사랑받지 못했다. 새로 오는 신입 기획자는 오래된 게임 그래픽과 시스템에 애정을 가지지 못하고 적응을 미루다가 다른 프로젝트로 옮겨가곤 했다. 누군가는 이 프로젝트에 '기획자의 무덤'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글쎄. 내가 처음에 그들과 같이 생각했다면 지금의 이 게임도, 사랑스러운 유저들도 없었을 텐데. 무덤이라면 내가 퇴사하기 전까지는 이 프로젝트에 묻혀 있고 싶으니 무덤이라면 무덤인데.


 부사수가 없지는 않았다. 

입사하자마자 3개월 정도 일을 배우다가 다른 프로젝트로 차출되어 갔던 기획자가 1년여 만에 다시 부사수로 들어왔다. 그는 늘 내가(사수가) 있는 이 프로젝트가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나는 그게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그는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이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즈음 나름 내 업무 평가가 좋았던 터라 다른 프로젝트에서 러브콜이 있었다. 정확히는 망해가는 프로젝트를 심폐소생하는 역할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이제 안정권에 접어든 이 프로젝트를 다른 기획자에게 맡기고 내가 다른 프로젝트를 맡기를 바랐다. 


지난해 말부터 부사수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라는 경영진과 매니저의 오더가 있었고 나는 1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내가 사랑하게 된 이 프로젝트를 부사수가 잘 맡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단순 인수인계를 넘어 부사수의 실력을 키워내려고 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나 올해 2분기가 시작할 때쯤, 내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맡겨졌다. 편의상 본래 프로젝트를 L, 새로운 프로젝트를 F라고 하겠다. L 프로젝트의 대규모 패치를 앞두고 한창 바쁘던 시점이었지만, 회사 내 사정이 그러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저 부사수를 열심히 키워 L 프로젝트의 실무를 전담할 수 있게 할 수밖에.


회사는 내가 L 프로젝트의 PD는 유지하면서 F 프로젝트를 전담하길 바랐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부사수가 빨리 업무를 해낼 수 있어야 했다. L 프로젝트는 의욕 넘치는 PM 님 덕분에 업무 호흡이 엄청나게 빨라서 느긋한 마음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숨 가쁘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드디어 L 프로젝트의 대규모 업데이트를 릴리스했다. 2개월의 크런치 모드 끝에 드디어 가장 큰 업데이트가 라이브 서비스되었다.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 두겠습니다."


 앞으로도 할 일이 태산이라서 홀가분한 마음 반, 걱정 반이던 참에 갑자기 부사수가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L 프로젝트의 바쁜 일정과는 별개로 회사에서는 지속적으로 부사수가 지금 나의 업무를 대체해 주기를 바랐다. F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 이후에는 더욱 그랬고. 최근 들어서 그게 요즘 좀 심하기는 했다. 


내가 없는 L 프로젝트를 감당해야 하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왔을까. 아니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월급을 받고 싶었는데 책임감을 지우니 부담스러웠을까. 아무튼 그는 퇴사를 하겠다고 했다. 팀장님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한 편으로는 그가 더 일찍 퇴사하지 않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팀원들도 내심 반겼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부사수는 너무 여유로워 보였다. 회사에 애정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프로젝트나 자신의 일에도 애정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열정이 없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려고 했으나 언제나 실망을 돌려줬고 업무 지시를 메모하지 않아 지시 사항과 다른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적도 많았다. 매뉴얼과 기획서, 노하우를 전부 넘겨주며 떠먹이려고 해도 삼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업무 마감일을 지키지 않았다. 못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업무 마감일을 훌쩍 넘기고도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를 포함하여 일정을 짰던 나와 PM은 그의 몫까지 야근을 하고 주말 근무를 해야 했다.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했지만 질문도 잘 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 이직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이직하려는 사람처럼 마음이 붕 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L프로젝트를 거쳐간 사람 중에는 그의 바로 앞에 이 프로젝트와 맞지 않아서 적응하지 못했지만 다른 프로젝트로 옮긴 뒤에는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사수가 그런 타입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는 그가 원해서 갔었던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업무를 잘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걸 그가 퇴사하겠다고 한 시점에서 내게 알려주는 팀장님도 좀 야속했다.


 연차와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이제 2년 차가 된 그는 갓 들어온 3개월 차 신입만도 못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그렇게 떠나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졸지에 프로젝트 두 개만 남겨졌다. 그가 나를 대체할 거라는 전제에 회사에서 맡겼던 F 프로젝트는 여전히 내 손에 있다. 


할 일이 태산이고 큰 업데이트를 쳐냈으니 이제 좀 쉬면서 건강도 챙기려고 했는데 역시 인생사 계획대로 안된다. 


팀장님은 내게 다른 부사수를 붙여주겠노라고 했다. 2년 동안 사람 가르치는 일엔 이제 지쳤다. 일이 많아서 힘든 것보다 사람이 따라 주지 않아서 뒷수습을 하는 게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인사 관리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태에서 부사수를 수습하는 것은 너무 스트레스였다. 


계속 내가 문제인 것은 아닐까, 내 가르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나를 의심하게 되는 것도 피곤했다. 그냥 일이나 잔뜩 하는 게 마음 편하다. 나는 줄곧 생각만 하던 걸 결국 말해버렸다.



"부사수는 필요 없습니다. 그냥 둘 다 알아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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