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지 못한 뮤지션은 팬 서비스도 잘 못한다
고치시에 처음 도착한 날 고치성 주변으로 산책을 하며 버스킹 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런데 고치시의 분위기는 버스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감하다. 어차피 고치에서 며칠 있지도 않으니 다카마쓰로 넘어가서 하지 뭐 하며 포기했다. 그러다 돌아가려고 하는데 성주변에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바둑을 두고 있는 조그마한 공원 같은 곳이 보였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나무들이 많이 있었고 그 앞에는 벤치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곳이라면 노래를 좀 불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으로 가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몇 곡 불렀다. 그런데 영 흥이 나질 않는다. 배가 고파서인지 고속버스 타고 와 지쳐서인지. 몇몇 사람이 벤치로 와서 앉아 들었지만 삼십 분도 안되어 그만뒀다. 그렇게 첫 버스킹 아닌 버스킹이 흐지부지되고 다음날은 비가 하루 종일 왔고 셋째 날 넷째 날은 고치시 여행 재미에 푹 빠져 악기를 만져 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 날이 되어 버스를 타기 위해 고치터미널로 갔다.
일찍 서둘러 갔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심심해서 악기를 꺼내서 터미널 야외 벤치에서 노래를 불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몇 곡 부르기도 전에 한 어린이가 내 곁으로 와서 계속 듣는다.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노래할 수 있으면 좋다는 마음이지만 이번도 역시 흥이 나질 않는다. 잠시 후에 보니 아가씨도 아주머니도 와서 듣는다. 그동안 고치시에서 버스킹 다운 버스킹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터미널에 이렇게라도 노래해 볼까 하면서 시작은 했지만 몸에 기운도 없고 재미가 없다. 아마도 연 이틀 동안 힘들게 여행한 후유증인 듯하다. 남자 총각들 셋이 나란히 내 앞을 지나간다. 그중 가운데에 있는 총각이 엄지 척을 날리며 간다. 그래 넌 뭘 좀 아는 총각이구나 하며 나도 미소 지으며 바라봐 줬지만 입꼬리는 영 올라가 지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고치시에서의 버스킹 전부다.
나는 고치시에서의 무미건조한 나의 노래 상태를 보며 마쓰야마시에서도 똑같은 경험이 있었던 걸 그날을 떠 올렸다. 그날도 호텔을 이동하는 날이어서 일찌감치 정리를 하고 체크 아웃을 했다. 옮기는 곳의 체크인은 오후 4시라 중간에 비는 시간이 많아 캐리어를 호텔에 맡겨 놓고 우쿨렐레만 메고 다니며 노래할까 생각했다. 그러다 우쿨렐레 가방을 메는 것도 어깨가 아파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바퀴가 필요하다 싶었다. 캐리어를 맡기지 않고 그냥 끌고 나왔다. 그때는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배앓이도 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내가 늘 좋아하던 능선 위의 오로지 하나밖에 없던 벤치, 저 멀리 마쓰야마성이 아름답고 고고하게 보이는 장소도 갈 수 없었다. 캐리어를 들고 많은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그 장소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포기다. 시민회관 앞 너른 운동장이 펼쳐진 공원 벤치로 갔다. 급할 일도 없고 힘도 없었기 때문에 느릿느릿 걸어서 갔다.
나의 배앓이 대처와 치유법은 간단하다. 그냥 굶는 것이다. 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배앓이를 할 때 힘들어하는 장에게 뭘 먹이며 계속 일을 시키는 것보다 푹 쉬게 만들어 주는 것이 회복이 빠르다는 사실. 그래서 전 날 저녁도 아침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공원에 도착할 즈음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늘 그랬던 것처럼 벤치에 앉자마자 악기를 꺼내 들었다. 악기만 꺼내 들고 품에 안으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악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려오면 머리부터 어깨 가슴 배를 타고 내려가며 사르르 내 몸이 녹아내린다. 따뜻한 물속으로 들어가 온몸이 차례대로 릴랙스 되어가듯. 그럼 이미 나는 이 악기와 행복할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몸에 기운도 없고 에너지가 달려서인지 그 효과가 오래가지 못했다. 흥도 안나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했다. 그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속삭이며 들려주듯. 오히려 이런 소리가 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걸까? 한 명 두 명 근처로 와서 안 듣는 것처럼 무심한 척 벤치에 앉아 듣는다. 이미 떨림 방지 내공이 많이 쌓인 터라 나는 미동도 없이 노래를 이어 부른다. 얼마 있지 않아 어떤 남자가 깨리어를 끌고 오더니 내 옆 벤치에 당당하게 앉으며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곡이 끝나자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박수를 크게 친다. 그리고는 엄지 척을 양손으로 해준다. 활짝 웃는 미소를 덤으로 보이며.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른 때 같았으면 나의 입 꼬리는 훨씬 더 올라가고 정말 좋아하며 인사에 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얼굴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배는 점점 더 고파오고. 대충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지경이란 이런 건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일본인 아가씨 둘이 서서 나를 찍고 있다. 기둥 뒤에 자신의 몸이 거의 안 보이도록 가려지게 앉아 있던 할아버지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숨어 있듯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아나보다. 나의 매의 눈으로 다 포착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여튼 여유가 점점 더 생겨가면서 나의 레이더는 포착해 내는 능력이 활성화되어 가고 있었다. 노래를 하면서 관중을 살피고 저 멀리 상황까지 나의 레이더 망에 잡히게 하는 것, 엄청난 발전이다. 화창한 날인데도 그늘 속 벤치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추워진다. 그래서 햇볕이 잘 드는 벤치로 이동했다. 거기에 가니 무언가를 싸와서 함께 먹고 있는 아가씨 둘과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 같은데 상당히 젊은, 딸이나 아들이 무척 어린데 결혼해서 애 낳았나? 하는 오지랖퍼의 상상을 하며 또 나의 아름다운 우쿨렐레의 선율을 선물로 들려준다.
그런데 노래를 몇 곡 부르지도 않았는데 배가 뒤틀릴 지경으로 고파온다. 속을 좀 많이 비워두고 싶어도 이젠 나이가 들어가니 굶는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옛 어른들 말씀에 밥심으로 산다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겠다. 배앓이를 하든 말든 일단 곡기는 끊어지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굶는 것도 젊어야 할 수 있군! 재빨리 악기를 정리했다. 오늘은 또 무얼 먹어야 내 뱃속이 좀 편안해할까를 고민하다 건강해야만이 뭐든 할 수 있고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 것은 제아무리 즐거운 일도 몸 성해야 가능하다는 것!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를 오랫동안 잘 부르려면 정말 건강해야겠구나. 다시 명심하고 늘 건강하고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과 마음으로 살리라 다짐했던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