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하하. 경쟁력 있는 마케터라. 제목을 정해놓고 보니, 스스로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경쟁력 있는 마케터가 전혀 아니었기에. 어쩌면 그래서 이 글을 당당하게 쓸 수 있는지도.
[마케터]라는 직업 정체성을 내 삶에 비로소 조심스럽게 내걸 수 있을 때 문득 스치는 기억들 - 사수의 가이드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준비해서 처음부터 다시 작업한 자료, 덤벙거리는 성향으로 인해 발생한 광고 운영 사고, 가이드도 없이 처음 작성해본 마케팅 제안서 등. 잘 해냈던 업무보다는, 실패하고 실수했던 그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회고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어쩌면 그런 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걱정하지 말라는 진심 어린 말을 해주고 싶다. 나 역시 그런 신입이었으니까. 많이 몰랐고 많이 부딪혔고. 그래서 많이 아프고 어렵기만 했으니깐.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마케팅을 하는 데 특정한 스킬(Skills)이나 노하우(Know-how)를 논하는 글이 아님을 밝혀둔다. 그런 이야기들은 책방 [비즈니스 & 마케팅] 매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보다 넓고 장기적 차원의 것을 말하고 싶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도 하고, 글로벌 4.0 시대라고도 하는, 그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 마케팅이라는 업에 종사하고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와 역량 같은 것 말이다.
모든 과업의 시작은, 그 업무를 출제한 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많은 경우 일이 태생된 배경이나 맥락, 심지어 목적을 놓치고 무작정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는 산출물의 퀄리티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다. 왜냐하면 결과물 내용이 아예 산으로 가거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클라이언트가 마케팅 에이전시에게 제안서를 요청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메일로 마케팅 제안 요청서 '브리프(Brief)'를 받았다. 당장 마케터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주어진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클라이언트의 의도나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다. 때로는 전화나 미팅을 통해 이메일 상으로 미처 전달되지 않은 광고주의 요청사항이나 제안 배경까지도 숙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미리 준비해둔 질문 리스트를 하나씩 던져봄으로써,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이나 의도를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작 필요한 제안이 전혀 다른 방향이거나 내용, 심지어 제안이 필요 없는 경우를 발견하기도 한다. 일의 효율성(Efficiency) 영역이다.
급하게 제안서가 필요한 팀 내부적인 상황을 이해해볼 수도 있다. 제안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원하는 마케팅 상황이나 근본 이슈를 파악할 수도 있다. 이렇게 파악된 부분들이 오히려 제안이나 기획서에 핵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주어진 정보를 기반으로 바로 업무를 시작하기보단, 발제자의 의도 또는 배경을 보다 꼼꼼하게 파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케팅 업의 특징이, 일이 많고 속도가 빠르며 멀티(Multi)적 업무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해나가야 하다 보니, 실수나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업무 이해도나 숙련도가 향상되어 실수를 줄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신의 실수를 대하는 자세다. 특히 신입과 주니어들이 장착하면 아주 지혜롭고 발전적인 자세다. 처음부터 잘하는 마케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숙련도가 오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배우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이후 마케팅을 경험하면 할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 마케팅 세계는 정답이 없기에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더욱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설령 실수를 했다고 해서 속상해하거나 자책할 필요도 없다. 신입이나 2~3년 차까지는 실수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다만 꼼꼼한 자세로 실수를 줄여나가고,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마케터가 되기 위해 분주히 정진해야 한다. 실수를 빠르게 인정하고, 자신의 약점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마케터는 그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리고 그런 후배에게는 더욱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태도'의 영역이라는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어리석게도 책임자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마케팅에서 접하는 두 가지 비즈니스 상황이 존재한다. 마케팅 목표를 달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 두 가지 경우를 예외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마케팅 전략은 목표를 달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마케팅 전략이란, 주어진 시간과 재화, 비즈니스 흐름과 환경 속에서 가장 최선의 마케팅 안을 도출하는 것을 말한다. 보다 강력한 마케터가 되기 위해 반드시 전략적 사고능력이 필요하다. 이 역량은 단시간에 업무스킬처럼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훈련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글로벌 4.0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재들에게 필요한 역량이기도 하다.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재는, 결코 패턴화 될 수 없는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창의력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탄생한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기에 생각하지 않는 시대 - 결국 생각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그렇다면 마케팅 영역에서 전략적 사고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주어진 비즈니스/마케팅 상황 속에서 1) 목표를 달성하거나, 2)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훈련할 수 있다. 일도 하면서 돈도 벌고, 전략적 사고도 향상하고 이 얼마나 좋은가!
필자는 [마케팅]이라는 분야가 4차 산업시대 차세대 인재를 육성하기에 매우 적합한 분야라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마케팅을 하다가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고, 마케터이면서 동시에 다른 직업을 다양하게 겸하는 경우도 많다. 인생에서 4~5개의 직업을 갖는 시대 - 중요한 것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역량을 갖춘 인재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전략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주어진 정보를 올바르게 선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빅데이터 시대라고 정보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빅데이터 역시 '정보(Information)'의 한 종류일 뿐이다. 다만 사람이 셀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대량의 정보일 뿐이다. 물론 빅데이터를 올바르게 다룰 새로운 기술은 필요하다. 그러나 주어진 정보를 올바르게 선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정보를 제대로 선별하고 분석했다면 그 정보(Fact)를 의미를 찾는 것이 통찰(Insight)이다. 정보에 대한 통찰은 'So what(정보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데이터를 통해 구매에 특정한 곡선을 그리는 상승 추이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구매 상승 추이를 가지고 어떤 의미를 추출할 수 있을까? 1) 구매가 특별히 높아지는 특정 시즈널리티(Seasonality)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도 있고, 2) 구매가 높아진 원인에 대해 다시금 심층 분석을 해볼 수도 있다. 3) 다음 구매 상승 시점을 예측하여 그때 맞춰서 프로모션을 하거나 다음 제품 런칭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정보를 해석하거나 의미를 추출하여 필요한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일으키는 것, 그것을 바로 통찰(Insight)이라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창조의 영역이다. 통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안을 도출하는 것 - 이 단계에서는 앞서 데이터 정보가 새로운 창조로 치환되는 과정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안을 도출하는 것 - '유레카!' 외칠만한 창의력이 가미되면 보다 막강해진다. 필자는 창의력을 키우는 방안으로 몰입과 모방 두 가지 단어를 제안하고 싶다.
몰입은, 특정 이슈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마치 땅굴을 파듯 특정 생각에 깊이 골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발명가나 학자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레카!'를 외쳤을 것이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겐 너무 괴로운 과정이다. 반면 뭔가 '호잇'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희열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사무실이 아닌 환경에서 몰입의 시간을 갖길 추천한다. 출퇴근하는 길에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걸으면서, 퇴근 후 워킹머신을 타면서, 혹은 주말 산책을 하는 길 등등. 사무실에서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종종 꿈에서 전혀 생각치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재빨리 노트에 적어두고 다시 잠을 청하기도 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오는 창의력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마케터로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양한 사례들을 봐 둔 사람이 또한 그와 유사하거나, 그를 발판 삼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쩌면 창조는 겸손의 영역이다. 천재와 같아서 아무런 자료조사나 노력 없이 창조의 영역을 올라갈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창조한 사례들을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마치 해산하는 고통처럼 고민하는 끝에 자신의 것이 태어난다. 그렇기에 창조물을 그 사람을 닮았다. 그의 인내와 노력이 오롯이 들어가 있기에 그렇다. 창조의 영역을 밟는 단계가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마케터인가' 고민이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마케팅 생태계 차원에서 변화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마케팅을 의뢰하는 브랜드 기업과, 마케팅을 대행하는 에이전시와의 관계가 더 이상 [갑과 을], [을과 병,정]의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업무의 내용 상 수평적일 수는 없겠지만 회사 관계에 있어 수직적 구조(Hierarchy)와 권위주의에 대해 경계한다.
매체 쪽에서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사와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과 유럽(독일), 말레이시아 에이전시와 일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업무 방식에 큰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단순히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대행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의 '파트너(Partner)'로서, 상대방에게 필요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때로는 의견 충돌까지도 종종 일으켰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국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주며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업무방식을 보면서 큰 자극이 되었다. 상명하달 방식의 대행으로는 뛰어난 것이 나올 수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도 상생의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Win-win 파트너십' 문화가 피어날 때 일방적이지 않은 아이디어, 더 높은 차원의 해결 제시가 가능하다.
고객이 요구한 것보다 더 높은 차원 혹은 근원적 문제 해결을 제시할 수 있을 때, 그 부가가치는 결국 양사의 부가가치가 된다. 더 나아가 전체 마케팅 업계의 가치이자, 국가차원의 부가가치가 된다. 그 변화의 출발은 마케터 한 사람의 업무방식, 한 기업의 업무방식 변화에서 시작될 것이다.
경쟁력 있는 마케터가 된다는 것은, 어떤 비즈니스와 직무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경쟁력을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어진 비즈니스 상황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논리적 사고와 입체적인 분석능력, 이를 해석해내는 통찰력과 그 모든 것을 묶어 완전히 새로운 안을 제시하는 창의력까지. 어떤 산업과 직무를 막론하고 위 요소들은 4차 산업시대 인재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다.
너는 마케팅 천재 같아.
제안 이후 대표님의 한마디. 좋은 결과에 기분이 좋으셔서 쉽게 하신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항상 버겁게 느껴졌던 마케팅이라는 업에서 나의 노력과 눈물을 인정받은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마케팅이 내 일, 내 것처럼 느껴진 귀한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마케팅 천재가 아니다. 겉으론 화려하고 우아한 한 마리의 오리와 같은 마케터겠지만 물속에선 그 누구보다도 힘차고 억센 발길질을 하고 있었기에. 울컥 눈물이 났다. 그 발길질을 알아주신 것만 같아서.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것, 칭찬한다는 것이 참 어색한 시대가 아닌가. 특히 마케팅과 같이 업무 속도가 빠르고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오늘 하루 내 파트너사에게, 내 직원에게, 내 후배에게, 내 동료에게 잘한 업무를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모른다. 마치 필자처럼 무심코 던진 칭찬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경쟁력 있는 마케터]가 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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